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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만 구경? 누가 관광객에게 감옥 보여주나"

[인터뷰②]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연재 마친 신은미씨 부부②
12.10.23 14:39l최종 업데이트 12.10.23 15:41l
오마이뉴스 사무실을 방문한 신은미-정태일씨 부부가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조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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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편 "호기심에 떠난 북한 여행, 내 인생 바꿔놨어요"로부터 이어집니다.)

"이동 중에 주민들의 가난한 삶 목격... 미안해서 사진 못 찍을 정도"

- 여행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안내원 데리고 다니면서 북한이 홍보하고 싶은 것만 보고 온 것 아니냐"고 지적합니다.
신은미(신) : "그런 측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죠. 그러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봅시다.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이 소련에 살면서 남한에 여행을 왔다고 가정해보자고요. 그럼 남한 당국이 그 사람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가게끔 둘까요. 결국 남한이 보여주고 싶은 데만 데리고 다니지 않겠느냐고요."

- 상대적으로 발전된 평양 등 대도시만 구경했지, 생활이 열악한 시골이나 인권유린이 난무하는 곳, 예를 들면 강제수용소 같은 곳은 못 봤지 않냐는 얘기도 합니다.
: "우리는 관광을 위해 북한에 간 사람들입니다. 어느 나라 여행사가 관광객들을 데리고 감옥 같은 곳을 구경시킬까요."
정태일(정) : "솔직히 북한 여행은 안내원이 없으면 안 됩니다. 교통이 열악하기 때문이죠."

- 어쨌든 북한의 좋은 곳만 본 것은 사실 아닌가요.
: "세 번을 방북했는데, 20여 일 동안 여러 도시를 다녔어요. 이 도시 저 도시로 이동하다 보면 북한 사람들의 삶이 다 보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융숭하게 식사를 대접한다고 해서 그 집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아니잖아요. 또, 자유시간 때에는 여행객들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합니다. 남편은 마음대로 사진도 찍었죠. 자유시간 때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지 못한 것은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 안내원들은 어디에 가고 싶다고 하면 기꺼이 안내합니다. 꼼짝 못하게 하는 규제는 없었어요. 사람들이 '북한을 좋게 표현했다'고 하는 비판하는 부분은 내가 '그들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며, 우리는 한 형제자매 동포이고, 수천 년의 문화·역사를 공유한 하나됨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 대목일 것입니다. 나는 특별히 북한을 선전하는 듯한 글을 쓴 적은 없습니다."

: "우선 안내 관광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좋은 곳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북한에서, 특히 지방에서 그들의 가난한 삶을 다 봤어요. 스쳐 지나가면서 본 것이기 때문에 여행기에는 그 정도 수준으로 언급할 수밖에 없었죠. 실제 우리 여행기에는 '가난'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뭘 먹고 사나 구경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미안해서 사진을 찍지 못할 정도로 그들의 삶은 힘들게 보였습니다."

- 주민들의 삶이 어느 정도로 힘들어 보였나요.
: "시골에 가면 교통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소달구지 같은 게 교통수단인 것 같았어요. 우리는 목탄차를 난생 처음 봤습니다. 60~70년 전에 폐차됐어야 할 차들인데... 또, 군용트럭 같은 게 지나가면 사람들이 그 뒤에 타고 가더라고요. 오래돼 보였지만, 그래도 다른 것에 비하면 군용트럭이 비교적 나아 보였습니다."

: "'예전에 남쪽에서 쌀을 보냈을 때, 쌀이 다 군대로 간다는 말이 있었다'고 물어봤더니, 안내원이 웃으며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었을 겁네다. 운반수단이 모자라니 군용트럭을 동원해 거기에 실을 수밖에...'라고 답하더라고요."

"북 주민과 함께 사는 사촌동생, 진심으로 실질적 도움 줬기 때문에 가능"

라진-선봉에서 북한 주민들과 함께 살고 있는 신은미씨의 사촌동생 크리스(선글라스 쓰고 있는 이)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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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진-선봉에서 북한 주민들을 도우면서 함께 살고 있는 크리스 가족의 경우는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미국 국적인 그가 폐쇄적이라고 하는 북한에서 그들과 어울려 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 "크리스가 북한에서 사업을 하며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줬기 때문에 북한 당국도 그를 인정한 것으로 봅니다."(미국서 잘나가던 엔지니어, 북한서 15년 살고있다고?)

- 크리스가 북한에 간 것은 혹시 선교가 목적 아닌가요.
: "애초 크리스가 북한에 간 것은 전공인 컴퓨터 공학을 살려 북한을 돕기 위해서였어요. 신앙의 가르침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지, 북한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러 간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북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신념으로 삼고 살고 있습니다."

- 10여 년 전 크리스가 북한 정착을 시작할 당시 상황은 열악했을 텐데.
: "고생을 정말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전기상황이 좋지 않아 지난 겨울부터서야 따뜻하게 잘 수 있게 됐다더군요. 지난해부터 석탄을 여유롭게 사들여와서 난방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죠."
: "크리스네 가족은 예전에 움집 같은 데서 살다가 2~3년 전에 집을 새로 지었습니다. 크리스는 신해리에 풍력발전소 같은 시설을 세우고 있답니다. 동시에 석탄으로 화력발전소를 운영할 수 있게 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라진-선봉이 국제도시라고는 하지만 실상 가보면 60~70년대 남한의 중소 도시 수준밖에 안 됩니다."

- 크리스를 보는 북한 당국의 시선은 어떤가요.
: "북한 사람들은 크리스처럼 자기네들과 하나가 돼서 함께 생활하면서 도움을 주는 것을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크리스와 북한 사람들은 서로 진심으로 도와주며 정이 트는 관계를 형성했던 것이죠. 그들은 해외동포, 우리 형제들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 북한이 해외동포들의 도움을 절실히 원한다는 말인가요.
: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우리 같은 동포들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남한에서 나서는 게 핵심입니다. 현재 라진-선봉은 중국법을 적용받게 됐는데,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남한이 라진-선봉에 투자를 하게 되면 남한과 중국 사이에 마찰이 생길 수도 있어요. 크리스도 이제 중국법을 적용받게 돼 비자 처리에도 애로사항이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 "북한 사람이면서 중국시민권을 갖고 있는 한 인사가 크리스에게 '중국법이 적용되면 그동안 해놓은 게 무산될 수 있다'고 귀띔해줬다고 해요."
: "중국사람들이 현재 라진-선봉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해외동포들은 상대가 안 돼요. 궁극적으로는 남한이 움직여야 합니다. 개성공단·황금평·라진-선봉 등 이미 노무현 정부 당시 이야기가 다 된 것들인데... 남한이 놓치고 있습니다."(중국에 팔려가는 북한 땅, 속이 쓰립니다)

- 크리스 말고 북에서 사업을 벌이는 다른 재미동포가 또 있나요.
: "있습니다. 평양에 약국을 연 재미동포도 있다고 합니다. 동포애에서 우러나와 하는 것이지 절대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또 중국 옌지(연길) 같은 곳에는 북한에 들어가 그들을 돕겠다고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와 같은 정서 갖고 있는 사람들... 얼마든지 같이 살 수 있다"

- 신 선생님 북한 여행기에 나오는 안내원들의 말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던 경직되고 무뚝뚝한 북한 사람들의 이미지와 많이 다른 느낌입니다.
: "요새 북한 사람들에게 비즈니스 마인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일례로 방현수 안내원은 자기 꿈이 주유소를 하나 여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 남쪽의 많은 사람은 오랜 분단으로 남북간 이질화가 너무 심해진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 "라진-선봉에서 우리 승합차를 운전하던 아저씨가 '딸 남자친구가 싫다'고 하더군요. 이유를 물으니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다'며 '요새 애들이 부모 말도 안 듣고 너무 버릇이 없다'는 것이에요. 요즘 아이들 버릇없다는 얘기는 남북을 넘어 세계 공통의 주제 같아요.(웃음) 또, 라진-선봉에서 문호영 안내원이 휴대전화로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막 소리를 질러대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죠. 알고 보니 그의 누이가 집에 찾아와 문호영 안내원이 생활비 하라고 어머님께 드린 돈을 가져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소리 질러 미안하다' 사과하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알겠다고 하더군요. 북한의 배급제가 무너지면서 새 경제체제가 도입되고 있으며, 우리와 동일한 정서를 갖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습니다. 안 그랬다면 내가 어머님께 사과하라는 말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 북한에 휴대전화는 어느 정도 보급돼 있던가요.
: "지난해 10월에 평양에 갔을 때 이용자가 80만 명이라며 연말까지 100만 명을 넘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애들도 휴대전화가 있더군요.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 갖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 "라진-선봉에서 우리가 만난 사람들도 다 휴대전화를 갖고 있었어요."
: "휴대전화로 <로동신문>을 내려받아 보기도 하더군요."

신은미씨가 삼지연 빨치산 소녀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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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과 장소가 있다면?
: "물론 설경이, 방현수 등 안내원들이 생각나지요. 안내원들을 제외하고 정말 깊게 기억하는 이는 조선미술박물관 해설원입니다. 정말 착하고, 유머러스하며, 따뜻한 사람이에요. 지난 4월 평양에서 노래를 할 때 그 해설원이 내 공연 일정을 파악하고 직접 찾아와 꽃다발을 건네줘서 감동했어요. 그녀와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 5월 갔을 때는 선물을 준비했는데 배송시간이 맞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이 기억납니다.(키 150cm 북한 군인들, 믿기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백두산 삼지연에 있는 빨치산 항일유격대 기념공원이었습니다. 동상 걸린 발을 끌고 나와 물을 마시며 행복해하는 빨치산 여자 대원의 동상이 서 있었어요. 그 동상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린 소녀아이가 나라를 찾겠다고 총대를 메고 나선 모습 자체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어요. 그 동상을 보면서 '남은 인생, 나는 조국을 위해서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게 됐습니다.("북한 당국에 감사" 이 유럽인들 왜 이러는 걸까요)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정치문제 자연히 해결... 교류가 우선"

- 세 번의 방북으로 북한, 나아가 통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셨군요. 통일이 되려면 어떤 마음 자세가 필요할까요.
: "먼저 사고의 전환이 돼야 합니다. 북한에 가보기 전에는 그동안 배워온 것을 기준으로 판단해 그들에 대한 마음이 열리지 않았죠. 그때는 주변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설령 듣는다 해도 한 번 비꼬아 듣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고 나니 사고방식이 바뀌었고 그들을 향한 마음이 열렸죠. 그만큼 사고의 전환은 쉽지 않습니다.

우선 남북교류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원수지간도 손 한 번 잡는다면 백 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감정의 전환이나 교류가 생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치공학이라든가 이런 것을 떠나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게 되면, 정치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될 것입니다. 교류가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