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의 고요에, 그 평화의 역사에 사랑의 편지를 보내요

-김학중

 

1

지금 밖에는 눈이 내립니다. 밤이지만 눈이 쌓이는지 창밖은 조금씩 밝아져 옵니다. 거기에도 눈이 오나요. 아니. 이렇게 묻는 것은 잘못되었네요. 이 편지가 도착하는 시간에는 이미 내린 눈이 다 녹아있겠지요. 그래도 지금 창밖을 밝히며 내리는 눈에 대해 나는 좀 더 쓸게요. 내리는 눈 위로 많은 사람이 다녀갔어요. 발자국 위로 내린 눈 위로 다시 발자국이 지나고. 하루가 가면 다시 하루가 오고. 하루의 발자국 소리 사이로 눈이 내려요. 지금은 이 편지 위에도 눈이 내려요. 쓰고 있는 글 위로 내리는 눈. 지우는 눈. 지우며 쓰는 눈. 이 작은 눈송이들이 내리며 세상의 소음들을 머금는 것을 혹시 아시나요. 소리를 움켜잡는 이 작은 손들은 지금 또 새롭게 무언가를 쓰고 있어요. 저는 그걸 감히 역사라고 써요. 여러분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써요.

 

2

그래요.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우리 집은 가난했고, 그 섬에 간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으로도 많이 기뻤던 날들을 기억해요. 바람과 바다와 돌 하루방의 섬. 친구들은 자라며 하나 둘씩 그 섬에 다녀왔지요.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 섬은 점점 비슷한 모습을 띤 평범한 섬이 되어버렸어요. 하지만 저는 정말 그 섬은 그냥 아름다운 풍경의 관광지이기만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요. 가보지 못한 저는 파도치는 바다 쪽으로 곧장 떨어지는 폭포와 그것을 배후로 서서 다정한 포즈를 취한 친구의 가족사진을 볼 뿐이었죠. 하늘과 바다와 땅이 만나는 그 곳에서 저는 들리지 않는 폭포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었어요. 무언가 내가 듣지 못한 것이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언제 저 섬에 갈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쩌면 지금 이 편지를 보는 당신들도 웃을지 모르겠네요. 아니. 거기 가는 게 그렇게 어려웠냐고. 하지만 그렇게 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저는 제주라는 섬이 그냥 놀러가는 섬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 섬의 이야기가 더 궁금했을지도 몰라요. 어떤 작가가 '타오르는 섬'이라 부른 그 섬에 대해서요. 그리고 저는 그 섬의 슬픈 역사까지 다 찾아 읽은 머리 굵은 청년이 되어서야 제주에 첫 발을 디딜 수 있었지요. 그래서요.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더 어려웠어요. 그렇게 오래 그리워하고 가고 싶어 했던 섬이었는데 저는 이전에 다녀간 친구들처럼 똑같은 코스로 여행을 했거든요. 다만 그날의 바람과 그날의 파도와 그날의 바위들은 결코 같은 것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래요. 제가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렇게 하루하루 다른 날씨처럼 스스로의 역사를 써가는 그 섬이었다는 것을 그때에 알았어요. 누가 알까요. 조용히 써내려가는 섬의 연대기를 말이에요. 천지연 폭포에서 물소리에 귀를 씻으며 아직도 듣고 싶은 섬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 기뻤어요.

 

3

그래요. 그 섬의 이야기를 아마 우리 모두가 잘 모를 거예요.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저는 섬의 역사가 섬마을 사람들의 역사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래요. 그 섬의 작은 부분들까지 다 포함하는 역사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 역사는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그 사라진 곳에 다시 쓰이기도 했어요. 그래요. 이 글을 쓰는 지금 밖에 내리는 눈, 내리는 저 세계와 같이. 그 역사는 수천년의 역사이면서 늘 다시 태어나는 아이 같은 역사예요. 하나이면서 여럿이에요. 그래요. 눈처럼. 내리는 눈은 하나이면서 언제나 여럿이잖아요. 저는 그 역사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눈을 뭉치면 그 역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눈사람을 만들면 고요가 나누어주던 삶을 살아간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지금 그 섬의 바다는 내리는 눈을 뭉쳐 보려고 해변에서 하얗게 부서져요. 까아만 모래의 해변에 내린 눈, 그 눈에 남은 물결자국들은 어떤 소리의 흔적일까요. 들리세요? 들리세요? 들리지 않는 역사의 소리가. 여기 늘 있던 섬의 목소리가. 들리세요?

 

우리는 왜 들리지 않는 소리는 없다고 생각하는지.

단단한 바위처럼 늘 거기 있는 고요를.

수천년의 역사이면서 늘 다시 태어나는 섬의 역사를.

 

그래서 우리는 쉽게 그것을 부수는 게 아닐까요?

 

그 섬에서 누군가는 꼭 필요한 항구를 짓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들은 그저 바위하나를 폭파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들은 그냥 그 섬이 하나의 평범한 땅덩어리인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죠.

수천년동안 거기 서 있던 바위는 처음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냈어요.

그리고 그날 소리 없는 역사를 쓰던 구럼비 바위의 역사는 끝이 났어요.

그런데 그날 파괴된 것이 구럼비 바위 하나일까요?

늘 다시 태어나는 아이들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날의 비명이 그저 폭발음뿐이었겠지만 그날, 그 역사 속에 살던 사람들도 죽었어요.

그 평화 속에 살던 아이들도 죽었어요.

살아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던 고요가 없기에.

그들은 살아서 죽었어요.

그것을 그들은 알아야만 해요.

당신들이 날려버린 것은 그 마을 사람들을 키워왔던

섬의 역사라는 것을. 그 역사가 들려주는 고요의 소리라는 것을.

그 고요의 역사를 평화라고. 저는 그렇게 써요. 여러분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그렇게 써요.-그러나 분명 저 혼자만은 아닐 거예요.-그래서 평화는 보이지 않는 것이죠. 그건 들어야 하는 거예요. 아이들의 옹알이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들어야 하는 거예요. 내리는 눈 위로 눈이 내리는 소리 같은 속삭임이니까.

 

들리나요.

 

들리지 않는다고요. 그 소리는 귀가 멀어야 들릴까요? 그렇다면 나는 그 소리에 귀가 멀기를 기도할 거예요. 그 미세한 속삭임에. 그 소리 속에서 우리는 미래를 들어야 해요.

 

4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분들 계실 거예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세요. 저는 미래의 섬에게 이 편지를 쓰는 거예요. 미래의 파도에 이 편지를 쓰는 거예요. 미래의 아이들에게 이 편지를 쓰는 거예요.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웠지만. 이제 미래의 평화에 사랑한다고 말할래요. 그 항구를 세운 사람들은 콘크리트 항만이 영원히 단단할 것이라고 믿겠지만 저는 아니에요. 바다가 다시 역사를 쓰기 시작할 거예요. 그 섬의 바람이. 그 섬에 내리는 비가. 폭폭 내리는 눈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역사를 쓸 거예요. 평화를 쓸 거예요. 저는 그 평화의 역사를 믿어요. 저는 그래서 미래의 그 섬에. 미래의 강정에 이 편지를 부쳐요. 눈이 묻은 이 편지를 부쳐요. 그곳에는 다시 평화가 탐스러운 눈송이가 되어 내릴 거예요. 우리에게 추위를 준 이 세계를 축복하며 잠재우며 다시 새로운 날을 쓰기 위해 하얗게 내릴 거예요. 봄이 오면 녹은 눈을 머금고 꽃이 필 거예요. 마을에 꽃이 필 거예요. 수천년을 써온 역사를 다시. 늘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들처럼. 꽃이 필 거예요. 사랑해요.

 

저는 또 편지를 쓸게요.

    



 

<그대, 강정 /> 대전 콘서트 장면  <그대, 강정>은 43명의 작가와 7명의 사진가들이 글과 사진을 두루 모아 제주 강정에 대해 쓴 책으로, 서울, 제주 등을 돌며 북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대전에서도 지난 5월 10일 선화동 삼성성명 6층 AV홀에서 북콘서트를 진행한 바 있다. 이 글을 쓴 김학중 시인은 1977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책 <그대, 강정>은 계룡서점 등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