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의 봄을 기다린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전본부 공동대표 지은주

 

Jieunjoo.jpg200610월의 어느 날, 겨레하나로부터 평양참관단을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고 방북교육을 들으며 방북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해의 참관단은 겨레하나에서 지원하고 있는 평양의 공장들과 문화유적지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언젠가는 가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평양을 갑자기 가게 되니 마음이 몹시 분주해졌다. 그동안 듣기만 했던 말과 평양의 이미지를 그려보면서 또는 다녀온 이후 지인들에게 보고 느꼈던 것들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란 생각들을 하면서 기대감 반 긴장 반 상태로 지냈던 것 같다.

2000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남북의 다양한 부문들이 교류를 진행했었고, 수많은 지원물자들이 오고갔던 터라 계획대로 직항로로 바로 갈 것이라 생각했었으나 당시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급작스레 냉랭해진 남북관계로 인해 그전까지는 별다른 말이 없었던 통일부에서 북의 민항기에 대한 입국불허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북 운항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민간차원의 방북을 불허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조건과 선별적인 민간교류였던 것이다.

 

남북관계의 얽혀 있는 문제들은 당국자들이 풀어야 할 것인데 민간에게 책임을 떠넘기듯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정책이 뒤바뀌는 것이 어이없기도 하고 여전히 분단된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일깨워주는 듯해서 서글퍼지기도 하였다. 당시 겨레하나에서는 지속적으로 통일부와 계획대로 직항로로 방북하는 안을 협의하였으나, 결국은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평양을 중국을 경유하여 하루 뒤에 평양에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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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하나 평양 참관단은 총 두 차례로 방북하였는데 나는 1차로 60여명의 방북단과 45일간의 여정을 함께 하였다. 몇 해 전 기억이라 흐릿하기는 하지만 처음 본 평양의 도시와 거리는 무척이나 활기 넘쳤고 깨끗했다고 기억된다. 아침이면 주민들의 출근길과 아이들의 등굣길로 분주했고 손잡고 거리를 다니던 연인들로 인해 나 역시 괜스레 웃음 지어졌으며, 남에서 온 손님들에 대한 따뜻하고도 밝은 인사들이 정겨웠다. 어디서건 들리는 나와 같은 언어들이 한층 더 그들과 친밀하게 만들어줬다. 겨레하나에서 북측과 협력사업을 진행하는 북녘어린이영양빵공장, 콩우유공장을 견학하면서 이런 곳들이 하나 둘 늘어나서 견고한 성과 같은 북에 대한 편견들이 벗겨지고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졌다.

우리가 지원한 공장에서 생산되는 먹거리를 먹고 자라고 있는 유치원의 아이들을 보면서 더욱 그 바램이 절실해졌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잡아끌면서 안기고 잘할 수 있는 춤과 노래를 보여주는 아이들에게 그 어떤 사심도 욕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최선을 다하며 고마움의 표현을 하는 것뿐이다. 어른들의 욕심과 이해타산으로 인한 고통을 이 아이들은 더 이상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과 북의 화해협력의 선언이었던 6.15, 10.4선언이 사문화되어가는 요즘의 상황들을 볼 때마다 6년 전 방북했을 때의 그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 약속들이 지켜졌다면 지금처럼 한반도에 긴장상태도,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고령의 이산가족들의 상봉이 허무하게 미뤄지는 아픔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남과 북 모두 어떤 정치적 상황에도 악용하지도 서로의 이권에 따라 휘두르지 않을 때라야 그 선언들은 빛을 볼 것이다. 지금처럼 서로의 차이만 강조하고 엇나가기보다는 차이를 인정하고 동질성을 찾기 위한 부단한 노력들이 이뤄질 때야 비로소 냉랭한 남북관계에 봄이 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갈수록 마음의 분단선은 옅어진다는 글귀를 생각하며, 마음의 분단선이 더 견고해지기전에 어서 하루라도 빨리 민간교류가 활성화되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그 날을 그려본다. 타국을 돌아 멀리 가는 길이 아닌 우리 땅을 밟아서 6년 전의 그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