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쓰러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민초들이 일어선 동학혁명운동의 발상지 정읍을 다녀오다.

-현태봉(우리겨레하나되기대전충남운동본부 회원/6.15대전본부 후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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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꽁꽁 언 땅에 있으면서도 따뜻한 햇살을 머금으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이 마치 단하나의 임무인 것 마냥 온갖 잡초며 나무들은 힘껏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모인 생명들은 서로의 의무를 다해 들판이며 산을 녹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봄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하룻밤에도 부쩍 자라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4월의 어느 날, 대전충남 겨레하나 평화역사기행 프로그램인 동학혁명운동 발발 120주년을 기념하여 그 발상지인 정읍을 다녀왔다.

 

우선, 만나면 반가운 회원 분들과 함께한다는 설렘 반, 역사과목을 잘하지 못했음에도 세월이 흘러서는 관심을 갖게 된 역사의 그 현장에 가게 된다는 설렘 반으로 아침부터 세차며 준비물 챙기기에 부산을 떨었다. 그것도 그냥 나들이가 아니라 역사기행이라는 성격상 더 기대를 하게 되었으리라.

 

일단 회원 분들이 모두 모여야 했기에 첫 장소는 정읍의 식당으로 송참봉네 조선동네라는 곳으로 예전 모습 그대로를 최대한 간직하고 있었다. 12일과 런닝맨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인데 굳이 따로 소품 따위를 준비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옛 볼거리며 즐길 거리로 충분해서 한 회분은 너끈히 촬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거기에 숙박비도 저렴하니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며칠 쉬어가고 좋을 곳이었다.

 

식사를 하고난 후 처음으로 간 곳은 동학혁명 모의탑이다. 동학혁명운동의 처음 시작은 20명 남짓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69년에 운동 참여자의 후손들이 세웠다고 한다. 이 모의탑에는 참여자들의 이름을 둥근 사발 모양으로 적어 대표가 누군지 모르도록 적고 동학 각 리의 대표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작성되었다하여 유명한 사발통문으로, 후면에는 운동 참여자들의 생사연대와 후손들의 거주지가 적혀있다. 사발통문은 1893년에 작성되었는데 사실 이때의 최초 원본에는 16명의 이름이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재 전해지는 사발통문은 20명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사발통문에는 참여자의 이름 외에도 네 개 조항의 결의문이 있는데 당시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았던 탐관오리 조병갑의 처단, 위로는 아부를 밑으로는 수탈을 자행하는 벼슬아치를 벌하는 일, 무기를 입수하고 전주감영의 함락시킴과 동시에 서울로의 진격을 행하자 등이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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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모의탑: 탑 중간 우측에는 참여자들의 이름이 사발모양으로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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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거사를 도모하며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

 

그 다음 이동지는 현재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사발통문 작성의 집을 지나 동학혁명 무명농민 위령탑이었다. 사실, 동학혁명운동의 시작은 조병갑이라는 인물을 빼놓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조병갑은 고부군수로 있는 동안 수많은 폭정을 저질렀는데 그 예를 몇 개만 소개하자면, 엄청난 흉년이던 해에 식량을 풀어주기는커녕 강제 징수는 기본에 죄 없는 농민에게 갖은 죄를 뒤집어씌워 재물을 빼앗고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세금을 거두었다. 그뿐 아니라 동진강 상류에 보를 세웠는데 이미 상류에 보가 있어서 물살이 세지 않음에도 일만 석의 쌀을 얻는다하여 만석보를 강제로 짓게 하더니 또 이를 통해 물세를 받았다. 군수의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러 민초들의 삶을 어렵고 억울하게 만들었을지 짐작할 만 했다. 그래서 상소문도 올려봤지만 이미 외세에 의존하던 조정과 민중의 삶은 관심 밖이던 관청 등에서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더 강한 억압 뿐이요. 그러다보니 민초들의 삶은 갈수록 어려워져 자연스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장정뿐 아니라 아녀자, 어린 아이들까지 행동에 나섰다. 그래서 동학혁명 운동 과정에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름 없는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현재의 주산마을 녹두회관 앞에 위령탑을 설치했다 .(주산마을은 원래 대나무가 많다하여 죽산(竹山) 마을이었으나 일본이 뭉치지 말고 배처럼 떠돌아 다니라하여 주산(舟山)마을로 바꾸었으며, 전봉준 장군이 체구는 작지만 단단하다하여 녹두라는 별명이 있어 녹두마을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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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동학 농민군 위령탑: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각계의 성금을 모아 1994911일에 건립되었다.

 

그 다음 이동지는 전봉준 장군의 거처를 재구성한 고택을 방문했다. 사실 전봉준 장군은 초가집에 방 두 칸, 부엌 한 칸인 초가삼간에 살았다는 증언이 있지만 현재 재구성한 고택은 방이 세 칸에 주방이 있고 옆에는 잔디밭도 딸려있게끔 변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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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선생 고택

 

그 다음으로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응징하기 위해 1천 여 명의 농민들이 모였다는 말목장터를 지나 조병갑이 세를 더 걷기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만석보, 끝으로 황토현 전적지를 다녀오는 것으로 정읍 동학혁명운동 기행을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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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석보 유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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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 조감도: 조감도에 보면 고부군수 조병갑이 축조하고 그 2년 뒤 농민군이 혁파했다고 씌여 있다.

당시 조병갑이 만석보를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폭정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

 

동학은 제세구민의 뜻을 품은 최제우를 1대로 유불선의 교리를 토대로 삼았다. 또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해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설령 동학의 개념을 재해석 하지 않더라도 고매한 역사학자의 역사관을 고민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동학혁명운동의 의의는 중요하다. 한 갑자가 60, 두 갑자를 지난 120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동학혁명운동의 원흉인 다른 조병갑이 없지 않고 당시의 민초들 삶이 오늘날에도 재연되고 있다. 더욱이 이웃나라인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를 과대평가하고 우월함을 비추려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동학혁명운동은 한 때 난으로 표기되거나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마저도 우리 역사를 축소, 왜곡하려하고 있다.

 

동학혁명운동에서 빛났던 지혜와 정의를 추구했던 훌륭한 선조들의 노력으로 오늘을 물려받았다. 그러함에 나 역시도 가까운 내일, 먼 미래에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있는 하루였다. 정읍은 동학혁명운동과 관계가 깊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역사 유적지도 많다고 하니 전북 정읍은 다시 한번 찾아가볼만한 곳이다.

 

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고 유익한 설명을 해주신 정읍동학혁명 계승 사업회의 임원이자 정일여자중학교에 재직중이신 송은숙 역사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한, 후에 학생들을 대상으로 알찬 준비를 하기 위해 이번 기행을 먼저 다녀오도록 준비한 대전충남겨레하나 가족 분들의 노고에도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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