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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한 판문점... 느닷없이 북한 군인이 달려왔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3] 사리원, 개성 그리고 판문점
12.09.12 09:44l최종 업데이트 12.10.24 22:17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판문점에 또 가야 한다. 단체관광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달랐다. 이번 여행에서 꼭 들려야 할 곳, 황해도 사리원을 거쳐 간다. 사진을 부탁한 할아버님 생각에 사리원을 향하는 내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없다. 그분을 대신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사진기에 담아야 하니 어깨가 무겁다. 말이 안 된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 땅에 찾아가 일가친척도 만나 볼 수 없다니...

북한사람, 모자 하나 바꿔 썼을 뿐인데...

평양 교외의 대성산성 일부인 소문봉 성벽에서 설경이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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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과 판문점으로 가기 전, 평양 교외의 대성산성에서 소풍을 겸해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산성의 일부인 소문봉 성벽에 오르니 멀리 평양이 한눈에 들어 온다. '아리랑 공연'을 하는 모란봉 경기장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인다. 경기장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산성은 고구려 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설경이가 옆에서 산성의 건축사적 의의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나 같은 문외한의 눈에는 그저 돌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1600~1700년 전 우리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동, 또 감동이다. 교실에서나 듣던 대제국 고구려. 나도 그들의 후예라는 것을 실감하며 성벽을 어루만져 본다.

남편의 가방을 메고 남편의 골프모자를 쓰고 있는 방현수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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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방현수 안내원은 남편의 가방이 무거워 보였는지 꼭 자기가 메고 다닌다. 남편이 방현수 안내원에게 양복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 편하게 다니라고 하며 골프 모자까지 씌우니 전혀 다른 이미지다. 정장을 하고 왼쪽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단 방현수 안내원을 공항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전형적인 북한의 남성이었다. 그런데 여행 가방을 메고 골프 모자를 쓴 방현수 안내원의 모습은 남한의 평범한 남성과 다르지 않았다. 모자와 가방 같은 것들이 사람을 이렇게 달리 보이게 하다니...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며 남북이 하나 됨을 느낀다.

설경이가 말해준 '로동'의 보람

모내기가 한창인 5월의 북한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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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가 한창이다. 얼굴이 탈까봐 여인들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챙이 긴 모자를 쓰고 일한다. 이따금 농기계도 보이지만, 대부분의 작업은 손으로 이뤄진다.

지금 북한에서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 문제 다음으로 시급한 게 에너지 문제인 듯하다. 전기가 모자라 정전이 자주 되는 것을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전기 에너지에만 국한돼 있는 게 아니다.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석유를 전적으로 외국에서 수입한다. 그런데 외환고는 부족하다. 그러니 기계는 있으나마나. 농기계도 이 모양인데, 공장은 제대로 가동될 수 있을까.

설경이도 우리 단체의 관광 일정이 끝나면 농촌에 '로력 봉사'를 다녀올 예정이란다. 북한에서는 직업에 관계없이 누구나 일정 기간 '로력 봉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농번기에는 주로 농사일을 거들고, 그렇지 않을 때는 건설현장에 가기도. 피부가 이렇게 고운 아이가 농사일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설경아, 너 농사일 할 줄 알아?"
"그러문요, 오마니. 모내기·김매기·추수·탈곡... 다 합네다."
"힘들지 않아?"
"힘들지요, 오마니. 그렇지만 쌀밥 먹으면서 모내기 한 번 안 해서리 되겠습네까. 꾸부리고 모를 심다 허리를 펴면 땀이 주르르 흐르는데, 심어놓은 모를 바라보면 정말 보람이 있습네다. 그러다 홍수라도 나서 다 자란 벼가 쓸려나가기라도 하면... 그 쓰라린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네다. 오마니는 농사일 해 보신 적 있으십네까?"

남편이 옆에서 대신 답한다.

"그럼 있지. 집에서 화초에 물도 주고..."

남편의 빈정대는 농담, 설경이는 재미있는지 배꼽을 잡고 웃는다.

북한 대학생들이 여름에 하는 '로력봉사'

모내기가 한창인 5월의 북한 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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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니. 미국의 오마니집 사진 보니까 마당이 아주 크던데, 텃밭이라도 가꿔 보시라요. 정말 로동의 보람을 느끼실 겁네다. 단고기(개고기) 먹는 것도 대학교 때 '로력봉사' 나갔다가 배웠습네다."
"어머, 설경아, 너도 개고기 먹어?"

"저도 우리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더라니 단고기를 못 먹었단 말입네다. 농촌으로 봉사 나갔다 처음 먹었는데 정말 맛있습네다. 우리 복실이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복실이가 누구야?"
"우리집 강아지 이름입네다. 암놈인데 이름이 '복실이'입네다."
"얘, 설경아... 농사일하고 싶어도 개고기 먹게 될까봐 못 하겠다."
"'개고기'가 아니라 '단고기'라니까요. 건강에도 아주 좋고... 오마니, 단고기 잡수시면 목소리도 더 고와져 노래도 더 잘 될 거야요."

노래를 더 잘 부를 수 있게 된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농촌으로 '로력봉사'를 나갔다가 결혼 날짜도 받아 놓은 아이 피부가 상할까 걱정이 돼 가방 속에 가지고 다니던 'BB크림'을 꺼내줬다.

"이거 꼭 바르고 다녀. 가만 보니까 안내원이라는 직업이 일 년 내내 바깥에서 지내야 하는데 피부가 많이 상하기 쉽겠더라고... 이건... 일명 '피부의 만병통치약'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도 보호해주고, 영양도 줘서 피부를 더 곱게 만들어 준단다. 게다가 얼굴 빛깔도 화사하게 해주고... 화장도 잘 먹게 해준단다. 아주 좋아."

"오마니, 저도 다 알고 있습네다. 기억 못 하시는 모양인데 지난해 10월에도 주시고 가셔서 제가 얼마나 잘 발랐드랬는지 모릅네다. 여기서도 BB크림이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아주 많습네다."

여성들의 미적 관심은 남한이든, 북한이든, 세계 어디에서든 똑같다. 타고난 특질인가 보다.

아, 드디어 사리원에 닿았다

북한 전역에 있는 구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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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구호의 나라이다. 들판에도 거리에도 건물에도 수많은 구호들이 붙어 있다. 그 중에는 '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를 건드리면...'이라는 식의 반미 구호들도 있다. 한 친구가 때마침 "저 구호의 내용이 뭐야?"라고 물어본다. 난처한 마음으로 그 내용을 설명했더니, 의외로 '재미있고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인다. 구호들이 점점 눈에 많이 띄는 걸 보니 시내로 들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 사리원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쿵쿵거리며 고향이 사리원이라고 하셨던 그 할아버님이 떠오른다. 그분의 심정을 떠올리니 내 마음도 울컥. 얼마나 그리우실까. 마음속에 가득, 이곳의 기운과 풍경 그리고 사람들의 온정을 담아 할아버님께 빠짐없이 전해 드려야겠다. 설레던 가슴이 이내 뜨거워진다.

사리원의 도로는 북한의 다른 지방 도시에 비해 상태가 매우 좋았다. 설경이가 옆에서 설명을 잇는다.

"사리원 도로는 남조선에서 성공한 한 기업인께서 새로 놔주신 겁네다. 그분의 고향이 사리원인데, 사리원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셨습네다. 이곳 사리원 사람들은 다들 그분을 존경하고 있습네다. 인품도 참 좋으신 분이라고 들었습네다."

이 북한 땅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북한 주민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엇이든 하고 싶은데... 이곳이 고향인 그분은 무엇인들 안 하고 싶었으랴.

사리원의 신혼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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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가로 질러 가니 '사리원 민속거리'가 나온다. 여기에도 갓 결혼한 신랑신부들이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신랑! 너무 좋아하는거 티 나누만 기래. 벌어진 입좀 다물라우. 야! 결혼 못한 총각, 애간장 녹게 하누만."

신랑 친구들의 짓궂은 농담에 신부가 얼굴을 붉힌다. 다른 한쪽에서는 중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혹시나 그 할아버님의 친척이나 친구분들의 자손일 수도 있겠다 싶어 카메라에 담아뒀다.

강서고분 벽화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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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관광객들은 우리 일행뿐이다. 아담하게 꾸며놓은 공원은 겉보기에 어설프고 빈약했지만, 속을 보면 충실했다. 고인돌 무덤부터 광개토대왕릉비, 강서고분과 경주에 있는 첨성대까지 있었다. 게다가 공원 내 인공 호수에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모형물도 있다. 공원 안을 이리저리 안내하며 하나하나 빠짐없이 설명하는 공원 해설원 아가씨가 살짝 안쓰러워 보이기도.

공원을 나서니 사리원 주민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우리를 보더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눈빛으로 인사한다.

학교가 파했는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어디론가 향하고, 개구쟁이 남학생들은 친구와 장난을 치면서 뛰어다닌다. 또 몇몇 학생들은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며 거리를 행진한다. 아이들은 이방인인 우리를 보고 잠깐 주춤하나 싶더니 이내 "헬로, 헬로"라면서 반가움을 전한다.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이다. 그 속에서 나는 희망찬 미래를 그려본다.

고목나무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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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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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 있는 고목나무 거리를 앞에 두고 있다. 나무들이 수백 년은 돼 보이니, 그 할아버님이 사리원에 계셨을 때도 틀림없이 이 자리에 이 나무들이 있었을 것이다. 얼른 사진을 찍는다. 어쩌면 이 고목나무 거리와, 공원 안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만 봐도 '아, 내 고향 사리원'이라며 알아보실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리원의 내음, 거리의 풍경들, 그리고 사람들... 어느 것 하나도 무심코 스쳐 지나감 없이 온몸과 마음에 담았다.

그래도 걱정이 살포시 고개를 든다. 과연 할아버님께서 이 사진들만 보시고 이곳이 사리원이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까. 고목나무 거리와 누각 사진이 있지만, 역시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사리원을 떠나는 길, 차 안에서 길거리 풍경을 마구 찍어댔다. 사리원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말이다. 사리원 약국, 사리원시 직매점, 사리원 영화관...

'어서 미국에 돌아가 이 사진들을 보여 드려야 하는데'라는 마음이 앞선다. 돌아가려면 아직 2주일 정도 남았는데 말이다.

할머니의 향기가 나는 곳, 개성

개성 '민속려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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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원을 떠나 한 시간가량을 더 달리니 개성이 나온다. 전통 가옥의 고풍스러운 내음을 은은히 풍기는 '민속려관'에 짐을 풀었다. '민속려관'은 오래 묵은 목재로 지은 기와집들로 이뤄져 있는데, 못을 하나도 안 쓰고 지었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민속려관' 안에 있는 식당에서 한단다. 밤에는 전기가 잘 나갈 수 있으니 손전등을 가져오라고 귀띔한다. 식당에 들어가니 넓은 방에 아기자기한 개성식 밥상이 보기 좋게 차려져 있다. 다행히 식사가 다 끝날 때 즈음 전기가 나갔다. 다리를 쭉 펴고 몸을 벽에 기대고 창밖을 보니, 달빛이 은은하게 방안에 스민다. 기분 좋은 밤이다.

구수하면서도 퀴퀴한, 싱그러우면서도 텁텁한...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향기가 방안에 들어온다. 그래, 친할머니나 외할머니가 사시던 시골집에 가면 맡을 수 있었던 그 향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향기가 쌀쌀한 아침 공기에 실려와 내 눈을 뜨게 했다. 그 향기에 취해 방문을 열고 나가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세월을 꿀꺽 삼켜버린 듯한 앞마당 단풍나무와 하나가 돼 서로에게 아무런 바람이나 욕심이 없어 보인다. 내 마음도 그들과 하나가 돼 세상을 어우르듯 너그러워진다.

개성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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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에서 잠을 자던 설경이가 무거운 눈을 억지로 뜨면서 나온다. 미국에 있는 우리 아이들처럼 한창 잠이 많을 나이인데 하루도 쉴 틈 없이 강행군을 해야 한다는 게 참 안쓰럽다. 게다가 외국인 관광객들을 책임지고 다니려니 고충도 많을 것.

"설경아. 조금 더 자지 왜 나왔어. 문소리에 깬 거야?"
"아닙네다. 무슨 말씀을... 오래된 집이라 방이 춥고 불편하셨지요? 다른 분들께서는 무탈하신지 한 번 돌아보고 오겠습네다."

설경이는 축 처진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다른 일행들이 머물고 있는 가옥을 향해 걸어간다.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데다 속까지 깊은 설경이. 어찌도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북녘땅에 딸 하나는 확실히 잘 뒀다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과 함께 든든한 마음이 생긴다.

판문점에 걸려 있는 민족의 미래

개성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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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을 참관한 후 남포 근처에 있는 온천으로 가 하루를 머무를 예정이라고 한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던' 판문점으로 향한다. 지난번 판문점에 들렀다가 가슴 저리게 느꼈던 민족의 비극이 다시금 떠오른다.

일전에 우리의 경호를 맡았던 '국철'이가 참관을 마치고 기념품 가게 안에 있는 우리를 알아보고는 달려와 반갑게 손을 잡고 흔든다. 우리는 단번에 그 군인 아저씨가 국철인지 알았지만, 국철이가 우리를 알아보리라곤, 또 여기서 그를 다시 만날 것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

"오마니, 아버지, 안녕하셨습네까? 언제 또 오셨습네까? 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아니, 어떻게 우리를 알아봤지?"
"재미동포 아니십네까. 지난해 가시고 난 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네다. 언제 또 오시나 하고..."

판문점 회의실 안에서. 이 회의실의 절반은 남한인데, 방현수 안내원과 나는 실질적으로 남한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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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오는데,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니 고마운 일이다. 지난번에도 우리가 떠날 때 "오마니, 아버지..."라며 다정하게 손을 잡으며 인사를 나누더니 우리를 잊지 않고 친근하게 맞아준다. 우리에게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건강하시라'고 인사한다. 오가는 정 때문에 차마 헤어지가가 힘들다.

"국철이도 잘 있어. 군에서 몸조심하고. 고향의 부모님들도 안녕하시지? 보고 싶어 하실 텐데..."
"잘 계십네다. 걱정 없습네다."
"우리 나가서 사진이나 같이 찍자."
"네, 오마니."

오른쪽이 다시 만난 국철이, 그리고 왼쪽은 이번에 우리를 안내한 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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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판문점의 국철'이도, 새롭게 만나서 우리 일행을 경호해줬던 인상 좋은 군인 아저씨도, 그저 함께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한마음이 된다. 입고 있는 옷은 달라도, 그들은 우리가 함께 보듬고 걸어갈 내 민족이요, 내 사랑하는 아들들이었다.

적국의 나라사람, '철천지 원쑤, 미제의 나라 사람들'도 손님이 돼 이 북녘땅을 드나드는데, 왜 남쪽의 형제들은 눈빛조차 보낼 수 없고, 그리움 담긴 한숨조차 크게 내쉴 수 없는 관계가 돼버렸단 말인가. 형제를 그리워함이 죄가 돼 그리워도, 보고 싶어도, 입 밖으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시국은 대체 어디를 향해서,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용서하는 마음으로 서로 품을 때 사랑의 불씨가 훨훨 타올라 단단한 강철판에 새겨진 어떤 미움과 증오의 응어리진 쇳덩이를 녹여버릴 텐데 말이다.

판문점을 떠날 때의 마음은 항상 착잡하다. 남편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설경이와 방현수, 이들 또한 민족 비극의 주인공인지라 그 마음에 통감해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저 판문점이 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북한사람들은 조개를 이렇게도 먹는다

휘발유를 끼얹어 익히는 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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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함을 안고 묵묵히 달리던 버스가 '공민왕릉' 앞에 섰다. 침묵 속에 내린 일행은 설경이와 방현수 안내원의 안내 아래 왕릉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우리 부부는 지난 10월 여행 당시 이미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어 신선한 경관에 착잡한 마음을 날려 보내기 위해 주위를 거닐었다. 한 곳에서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뭔가 태우고 있다. 멀리서 보니, 마치 숯덩이에 휘발유를 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 가서 보니 조개를 휘발유 불에 굽고 있다. 바닥에 조개를 펼쳐 놓고 그 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이며 조개를 익히고 있었던 것. 우리가 신기해하며 주위를 기웃거리자 조개를 굽고 있던 아저씨가 "조개가 다 구워져 가니 드시고 가시라요, 남포에서 가져온 조개인데 그 맛이 기가 막힙네다"란다. 그 아저씨의 설명에 따르면 그들은 평양서 온 외무성 직원들인데 몽골 외교관들을 데리고 공민왕릉을 참배하러 왔단다. 아마 몽골 사람인 '노국공주'가 함께 묻혀 있으니 이곳에 닿은 듯하다.

이내 조개가 맛있게 구워졌다며 먹기를 권한다. 휘발유 냄새가 역겨워 먹기가 꺼려졌으나 막상 먹어보니 크고 싱싱한 조개 맛에 휘발유 냄새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휘발유가 아닌 숯불에 구웠더라면 훨씬 더 맛있었을 텐데... 아쉽기만 하다.

차안에서 바라 본 남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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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남포 시가지를 지나 남포항으로 달리고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남포시는 초라하고 쓸쓸해 보인다. 살림집들을 끼고 있는 산마루들이 엉성하게 누런 살을 드러내고 있어서 더 그렇게 보인다.

푸른 바다가 넘실대고 있는 남포항이 눈에 들어오니 남포시가 훨씬 생동감 있는 도시로 보인다. 아마 바다가 품고 있는 싱그러운 색채가 가미돼 그런 듯. 남포댐을 둘러본 우리 일행의 다음 목적지는 남포시 근처에 있는 '온천장'. 그런데 어디를 봐도 온천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남편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설경이한테 말한다.

"설경아. 오늘은 '온천장'에서 쉬고 내일 평양으로 간다고 했지? 오는 길에 어디쯤 온천장이 있을까 싶어 유심히 봤는데... 아무래도 이 근처에는 제대로 된 온천장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그냥 평양으로 가는 게 어떻겠니?"

남편이 왜 이런 말을 안 하나 싶었다. 사실은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농기구도 없이 힘겹게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 그 뒤로 벌거벗은 산들, 그리고 황량해 보이는 아파트들과 살림집들... 이런 배경을 앞에 두고 포근하게 쉴만한 '온천장'이 있을 거라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남편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 설경이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답한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잘 왔다고 생각하실 겁네다. 절 한번 믿어 보시라요."

다시 돌아온 평양, 이젠 내 집 같다

'온천장'에서 설경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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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커덩거리며 20여 분을 달렸을까. 갑자기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푸른 숲길을 지나 10여 분께 달리니 멋진 건물이 보인다. 나무와 꽃으로 둘러싸인 리조트 타운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가 오늘 우리가 묵고 갈 '온천장'이란다. 이런 별천지가 갑자기 어떻게 나타났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건물과 실내가구, 그리고 주위 환경들을 정성껏 치장을 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속적인 관리는 잘 이뤄지지 않는 듯. 이 큰 '온천장'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일행과 중국서 온 관광객 한 팀뿐이니 그럴 만도 하다.

'온천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우리는 평양으로 향했다. 이제는 내 집처럼 익숙해진 평양, 시가지가 보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제는 내집처럼 느껴지는 평양의 거리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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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주일이다. 봉수교회로 예배드리러 가는 날. 내게는 이번 여행에서 중요한 일정 중 하나다. 지난해 10월 여행 당시, 늦게 도착해 예배를 드리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설경이에게 신신당부해뒀다.

'북한도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꼭 들어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