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63493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마지막 리허설을 마친 날 오후, 휴식을 위해 우리는 김일성 광장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광장에서 춤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박물관에서 한 여자가 뛰어나와 우리의 손을 잡아 흔들며 반기는 것이 아닌가! 지난번 방문 때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것이 남편을 잘 만나서 그런 것 같다"고 농담했던 바로 그 해설원이다.


너무나 놀라며 "어떻게 또 왔느냐"고 묻는다. 재미동포 예술단원으로 왔다고 하자 자기도 꼭 구경하러 가겠단다. 나를 아는 북한 사람이 객석에 앉아 내 공연을 지켜본다는 것을 상상하니 갑자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의 도시 '평양'

 

 다시 만난 조선미술박물관 해설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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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막식 공연 장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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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 우리는 봄축전 개막식에 참가했다. '재미동포 예술단'이라는 푯말을 앞세우고 어린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동평양대극장'에 입장했다. 지난번 뉴욕필하모니가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공연을 했다는 바로 그 극장이다. 과연 뉴욕필하모니가 칭찬할만하다.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평양은 '공연장의 도시'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극장들이 도처에 널려있으니 말이다. 북한 사람들에게 음악은 생활화돼 있는 듯하다.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안단다. 그런데 이들에게 음악이란 단순히 즐기는 오락만은 아닌 것 같다.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이 사상을 고취하고 단결을 도모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듯하다. 거의 모든 예술 작품들이 그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드디어 연주회 날이 밝았다. 내 노래를 들어 줄 북한동포들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그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북한 성악가들이 마이크 쓰지 않는 이유, 따로 있었네

 

 같은 날 공연하는 외국 예술단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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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음대 연주홀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온 유럽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리허설을 하고 있다. 무대 조명 및 소도구 등을 챙기는 아저씨들과 음악감독 아저씨도 분주히 오간다. 도대체 누가, 몇 시에, 몇 번째 순서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이곳 연주홀에 오기까지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다. 우리의 안내원 아저씨들에게 물어봐도 "공연 시작할 때가 돼봐야 압네다"라는 말 한마디뿐이다. 도저히 공연이 제대로 진행될 것 같지 않았다.

 

"마지막 점검 순서가 됐다"며 한 남학생이 분장실로 나를 찾으러 온 것을 보니 오늘 연주를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교복으로 보이는 하얀 셔츠에 검정색 치마 내지는 바지를 입은 학생들이 열심히 경청하고 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음악감독이 "마이크 없이 한 번 더 불러 주시겠습네까"란다. 예전에는 모든 음악에 무조건 마이크를 사용했는데, 요즘 들어 마이크 없이 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의 성악가들에게 다른 나라들의 성악가들처럼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방도를 찾으라고 생전에 지시했다고 한다. 그 대책의 일환으로 이탈리아의 '벨칸토식' 창법을, 1년에 몇 개월씩 외국에서 성악가를 초빙해 특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아마 수년 뒤에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며 들어왔던 북한식 전통 창법은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특별히 음악감독 선생이 내게 마이크 없이 노래를 부르라고 한 것도 아마 학생들에게 교육 차원에서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리라.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분장실에 돌아오니 남편이 중요한 비밀정보라도 입수한 듯 헐레벌떡 분장실로 뛰어들어왔다. 공연장의 여러 사람한테 물어서 어렵사리 알아냈다며 정확한 내 연주 차례를 가르쳐 주고 갔다. 그나마 그 정보가 정확한지 조차 의문이다. 과연 정상적으로 연주가 진행될 수 있을는지 내 눈에는 모든 정황들이 어설프게 보인다.

 

북한의 성형수술 그리고 멋부리는 여자들

 

반주자 박혜영 선생은 옆에서 열심히 치장을 하고 있다. 크고 예쁜 눈을 더 크고 더 예뻐 보이게 하려는지 눈꺼풀 위에 쌍꺼풀을 만들어주는 임시 테이프를 붙이고 있다. 예전에 내 친구가 자기 눈이 작다면서 틈만 나면 테이프 같은 것을 열심히 눈에 붙이던 기억이 살아나서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김정남 안내원이 그 광경을 지켜보더니 한마디 한다.

 

"아무튼 우리 딸을 비롯해서 여자들 맵시(모양) 내는 것은 아무도 못 말립네다. 머리에 물들이는 것을 그렇게 단속해도 소용이 없습네다. (조그마한 소리로 귀에다 대고는) 요즈음 들어서는 쌍꺼풀 수술이 유행입네다. 엉터리 시술사한테 해서 실패하는 녀성들도 꽤 있답네다. 오죽하면 '수술하는 것은 말리지 않으니 제발 정식 병원에 가서 제대로 쌍꺼풀 수술을 받으라'고 하겠습네까?"

 

그러고 보니 쌍꺼풀 수술을 한 여성들, 그리고 머리카락을 밝은 색상으로 물들인 여성들이 종종 눈에 띈다.

 

 쌍꺼풀 수술을 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 여성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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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관심은 '내 순서는 몇 번째며 언제 무대 뒤로 나가 있어야 하는지'였다. 하지만 김정남 안내원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선생님 순서가 되면 부르러 오겠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사라졌다. 이런 상황이 매우 익숙한지 박혜영 선생 또한 별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머리를 동네 미장원에서 하고 왔는데, 어색해 보이지는 않습네까"라며 화장을 하다 말고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며 안절부절해 한다.

 

내가 "아니야, 너무 예뻐. 마치 궁전 안을 거닐고 있는 공주 같아"라고 말해 주니 '다행이다' 싶은지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이리저리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멋진 포즈를 잡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박혜영 선생의 예쁜 모습에 빠져 정작 나는 무대에 오를 때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 게 좋을지 정하지도 못했다.

 

사실 나는 외국 노래를 부를 생각에 서양 드레스에만 신경을 써 가지고 왔는데, 이곳 노래를 부르게 됐으니 드레스보다는 한복을 입는 게 나을 듯했다. 혹시나 해서 미국서 가져온 한복을 입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동포 예술단 중 어느 누구도 한복을 입은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조선 옷은 단아해야지요... 요새 옷들은 촌스러워요"

 

 분장실에서 대기 중인 필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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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여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복을 즐겨 입는다. 그것도 화려한 디자인의 한복을 말이다. 이들 한복에 비하니 내 한복은 초라하기 그지없어 불쌍해 보일 지경. 그래도 나는 한복을 입기로 결정했다.

 

정신없이 치장하고 있던 박혜영 선생이 한복 입은 나를 보더니, "선생님, 너무 좋습네다. 빨간 저고리에 단순한 문양의 하얀 치마가 너무나 고와 보입네다"라고 말한다. 한복이 초라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들통 났는지, 박혜영 선생의 위로는 끊이지 않는다.

 

"선생님, 자고로 조선 옷은 단아하고 정숙해야 지조 있어 보이지 요즘처럼 너무 화려하게 만들어진 조선 옷은 멋져 보이기는커녕 촌스러워 보입네다." 

 

박혜영 선생의 말 한마디에 위로가 된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 고맙게 느껴진다.

 

드디어 시작된 평양 공연

 

연주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한복을 차려입은 안내원들이 줄지어 들어오는 관객을 객석으로 안내한다. 남성 관객들은 신사복이나 인민복, 여자들은 한복이나 정장을 차려입고 왔다. 극장 안내원은 바지를 입고 온 한 여성 관객에게 '다음부터는 치마를 입고 오라'며 정중한 주의를 주기도 했다.

 

관객들은 자리에 앉아 엄숙한 자세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경연대회의 심사위원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이내 주의사항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공연 중 옆 사람과 얘기를 한다든가, 껌을 씹는다든가, 손전화를 켜놓고 있다든가 하는 행동을 자제해 주십시오."

 

 관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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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과연 저 딱딱한 모습의 사람들에게 내 마음이 노래로 전달될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게다가 죽 늘어선, 중계방송을 위한 텔레비전 카메라들이 내 마음속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무대 뒤에 있는 연습실로 향한다. 오로지 내 마음이 공연장을 찾은 저 북한동포들에게 순수히 전달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박혜영 선생과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 연습에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제법 지나 김정남 안내원이 허겁지겁 나를 찾아왔다. 다음에 무대에 올라가야 하니 준비하라고.

 

 한복을 화려하게 차려 입은 공연 사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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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중인 필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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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한복을 멋지게 입은 사회자가 내 차례를 소개한다. 살짝 객석을 내다보니 빈자리 없이 꽉 차 있다. 마음이 어느새 벅찬 감격으로 흥분된다. 

 

드디어 나는 무대의 중앙에 섰고, 화려한 불빛 조명을 받았다. 박혜영 선생의 감미로운 전주곡이 시작된다. 마치 심사위원처럼 심각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관객들 사이에 작은 파장이 인 듯하다. 앞서 연주한 사람들 모두가 서양음악을 연주했는데, 내 차례가 되고 북한 노래가 흘러나오니 전주서부터 벌써 관객들은 감흥을 느낀 듯하다.

 

민족이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의 소망이 노래를 통해 저들의 마음으로 흘러들어 감을 느낀다. 저들은 한 소절, 한 박자도 놓침이 없이 내 마음을 꼭 안아 준다. 어느새 내 영혼도 동포들과 하나가 돼 그들의 마음속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낀다. 관객석 여기저기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모습들이 보인다. 나 또한 눈물을 떨군다. 목이 메이면서도 노래는 저들과 나를 이어주고 있다.

 

문득 지난해 10월, 눈물의 연속이었던 첫 북한 여행 당시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 공연마저도 아직 그 연장선 상에 있는 모양이다.

 

"재청! 재청! 재청!"

 

공연장에 울려 퍼지는 관객들의 목소리. '아! 내 생애 최고의 공연이구나. 음악을 공부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로 북녘 동포들과 한 마음을 이뤘으니...

 

헤어진 가족, 60년 만에 다시 만나다

 

공연을 마치고 호텔 식당으로 들어섰다. 황연희 아가씨가 예쁜 미소로 우리를 반긴다.

 

"선생님 공연 잘 하셨습네까? 저도 꼭 보고 싶었는데... 아마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을 겁네다. 이런 귀중한 공연들은 방송국에서 녹화해 두고두고 보여줍네다."

 

그리고 "제가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제가 접대하고 있는 분이 공연에 초대돼 오신 분들인데, 가서 공연을 보라'고 했습네다"라고 진심 어린 말을 건넨다. 따스한 미소 만큼이나 마음도 따뜻하다.

 

우리 식탁 건너편에는 애절해 보이는 여러 가족이 앉아 있다. 텔레비전에서 혹은 말로만 듣던 이산가족 상봉식이었다. 식탁에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음식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서로의 손을 붙잡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만 닦고 있다. 각자의 사연들을 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상봉 장면은 내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한 여인은 사업상 남쪽에 내려가 있는 남편을 찾아 뱃속의 아이와 두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 가기로 결심한다. 그 여인의 엄마, 즉 아이들의 외할머니는 '곧 전쟁이 마무리될 덴데 홀몸도 아니고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니까 걸을 수 있는 여섯 살바기 큰딸만 데리고 가고, 두 살짜리 여자 아이는 내가 보살피마'라고 말씀하셨단다.

 

그 후 헤어져 살게 된 60여 년의 세월. 두살바기 여자 아이는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후 한 많은 세월을 살았단다.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돌아가신 외할머니 또한 어린 손녀딸을 혼자 남겨 놓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지... 그 심정, 미루어 가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도 연로해 거동이 불편한 애기 엄마는 평생을 북쪽에 남겨놓고 온 딸 생각으로 살아도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한 채 사셨단다. 마침내 이들 가족은 남겨 두고 온 딸을, 동생을, 누나를 한 번이라도 만나 볼 생각으로 미국 시민권을 받았단다.

 

다행히도 애기 엄마는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육십 노인이 돼 버린 두 살바기 어린 딸을 만날 수 있었단다. 지금은 거동이 불편해 엄마는 북한에 올 수 없다고. 여섯 살 언니와 뱃속 남동생이 엄마 대신 기회가 닿는 대로 북한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나마 엄마는 큰딸과 아들이라도 두 살바기 딸 아이를 만나보고 올 수 있으니 그 희망으로 남은 여생을 버티신단다.

 

"이산가족은 이 순간에도 고통 안고 죽어갑니다"

 

아무리 자주 찾아와 본들 지난 60년의 그리움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그저 일주일 내내 서로 붙잡고, 껴안고, 울고 또 울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섯 살바기 언니는 훌쩍 늙어버린 사위와 며느리를 데리고 온 두 살바기 동생이 못내 안쓰럽고 가여워 눈물을 닦아줄 힘마저 없어 보인다.

 

한편, 한 할아버지는 그 옆 테이블에 앉아 한 할머니와 60대로 보이는 남성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전쟁 때 헤어진 부인과 아들이란다. 부인은 남으로 간 남편이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것이라 믿으며 아들을 키우며 일생을 혼자 살았단다.

 

이 이산가족들이 옆에서 함께 눈물을 닦고 있는 우리에게 한마디 한다.

 

"그래도 우리는 외국 시민권을 갖고 있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쓰라린 고통을 안고 죽어 가는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분들께 너무나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이런 비극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으랴. 피붙이를, 내 형제, 내 자매, 내 부모를 생이별하고 남북 두 나라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끊어진 인연의 끈을 방치하고 있는 두 나라에 어떤 벌이 내려질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 비극은 그 어떤 번드르르한 말로도, 그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밤은 너무나도 길고, 또 슬프다. 미어지는 가슴을 추스르기 힘들어 창문을 연다. 하늘의 별빛이 희망의 속삭임으로 다가와 조금은 위안이 된다.

 

이틀 동안 재미동포 예술단은 같은 연주홀에서 두 번의 공연을 더 했다. 공연은 회를 거듭할수록 서로를 향하는 뜨거운 민족애와 하나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채워졌다. 노래를 부르는 나도, 내 노래를 듣는 북한동포들도 마음에 드리우고 있던 잿빛 장막을 걷어 올리고 자유롭게 교감했다. 같은 언어, 같은 정서를 공유한다는 것이 이렇게 따스함으로, 친근함으로 다가올 줄이야. 몇십 년을 살아온 미국에서도 사람들로부터 이와 같은 친화력을 느껴보지 못했다. 분명 내 민족, 내 나라에서만 느껴 볼 수 있는 감정의 하모니였다.

 

김일성 주석 기리는 열병식... 정말 보고 싶었지만

 

 대성산 공원 입구에 있는 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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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김일성 주석의 '100주년 탄생 기념일'이다. 북한의 제일 큰 명절이요, 축하행사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날이란다. 그 축하 행사의 백미는 예전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그리고 내 머리 신경세포를 쭈뼛 세우게 한 '열병식'이란다.

 

남편은 당연 '열병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큰 기대에 마음이 들떠 있었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이나 외국 초청 손님들은 김일성 광장에서 벌어지는 열병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같은 시각, '대성산 공원'이라는 곳에서 친선 도모를 위한 공연 관람 및 체육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남편은 열병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학수고대하고 있다가 참석하지 못한다는 말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체육대회 같은 것으로는 명함도 못 내밀 대체 수단이었다. 안내원은 대성산에 가자며 우리를 부르러 방에 올라왔다. 남편은 호텔에서 쉬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안내원 이야기로는, 열병식 대열이 호텔을 끼고 있는 양쪽 도로를 지나가기 때문에 호텔 안의 모든 투숙객들은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고 한다. 순간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친다.

 

"여보, 아마 오늘 대성산에 가면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설경이'라는 말에 침대에 누워있던 남편이 벌떡 일어난다.

 

"설경이를 만날 수 있다고?"

"아니...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왜냐면 모든 외국 관광객들이 대성산 유원지에 모인다는 데 설경이네 팀도 그곳에 오지 않겠어요?"

 

북한에 다시 닿은 뒤 한순간도 설경이와 만룡 안내원, 그리고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를 잊은 적이 없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조선국제려행사'라고 쓰여 있는 버스를 보면 혹시 그들이 아닐까 눈이 빠질 듯, 목이 빠질 듯 쳐다봤다.

 

운좋게도 그저께는 우리 호텔 앞에 '조선국제려행사'라고 써 붙인 자동차가 서 있었다. 그 운전사에게 리인덕 운전사의 안부를 물었다. 마침 그 운전사는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와 잘 아는 사이여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줬다. 우리는 전화가 터져라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우리는 서로 반가움에 울먹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리인덕 운전수 아저씨의 말이 "설경이는 판문점 쪽에 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연락을 해봤으나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만룡 안내원은 대학원에 진학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역시 전화가 안 된다고 했다. 리인덕 아저씨만이라도 통화가 된 것이다. 당시의 반가움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오늘, 설경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비록 1%의 확률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대성산 유원지에 가야 한다는 희망적인 '명분'임은 분명했다.

 

우리 부부는 쏜살같이 대성산 유원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안내원들은 문제아 학생들을 개과천선시킨 것 마냥 흐뭇하게 우리를 반긴다. 

 

대성산 유원지에 도착하니 관광객을 실어 나른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그 중 많은 버스들이 '조선국제려행사'에서 온 것들이었다. 우리의 기대는 확률적으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도착하기가 무섭게 남편은 설경이를 찾는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도 나름 한쪽으로 안내원들의 지시 사항을 준수하며 다른 한쪽으로는 신경을 곤두세워 '설경이 찾기'에 온 집중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그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외국인들을 위해 공연을 베풀어준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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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들어와 있는 모든 관광객, 그리고 외국 손님들은 다 이곳에 불러 놓은 모양이다. 한쪽에서는 흥겨운 밴드 연주에 맞춰 사람들이 춤을 춘다.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를 위해 공연을 하러 온 어린 아이들과 사진을 찍기 바쁘다. 그 와중에 주최 측 지침에 잘 따르고 있는 일부 모범생 외국 손님들은 주최 측에서 정성스레 준비해온 체육대회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청군·홍군 모자를 쓰고 말이다. 가끔씩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왔다갔다하는 남편의 모습이 애절해 보인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있다. 이제는 나도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며 설경이를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로 찾아다닌 보람이 있는 지 설경이가 이곳에 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우리 부부는 안달이 나 설경이를 찾아다녔다. 설경이 뒷모습을 닮은 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멀리서 나를 다급히 부르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린다. 순간 '찾았구나'라며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꿈인지 생시인지 남편이 설경이 손을 꼭 잡고서 뛰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서로 얼싸 안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눈물로 반가움과 기쁨을 표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겁네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기쁜 일이... 꿈은 아니갔지요? 4월에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5월에 오실 거라는 소식은 회사에서 말해줘서 알고 있었습네다."

 

설경이는 차오르는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한다. 나 역시 어떤 말로도 이 반가움을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그저 우리 셋은 잡은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마음을 대신했다.

 

 다시 만난 설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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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무심하게도 빨리 지나갔다. 또다시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됐다. 남편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설경아, 우리 다음 달에 다시 보자. 너를 꼭 우리 안내원으로 해 달라고 부탁해 놨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우리는 서로 갈 길을 향해 이별의 손짓을 해야 했다. 마음뿐 아니라 무엇이라도 주고파서 뒤돌아 보는 설경이를 쫓아갔다. 그리고, 내가 차고 있던 팔찌를 설경이에게 채워줬다. 설경이는 팔찌를 채워주는 내 손을 물끄러니 쳐다보며 내 손등에 눈물을 떨군다. 

 

호텔로 돌아와 침울한 마음으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안내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든 소지품을 호텔방에 놔두고 로비로 내려오란다. 특히 남편의 담배는 물론이고, 라이터는 더더욱 안 된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불안해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