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44343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북한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여행을 준비해줬던 미국 여행사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르면 두 명의 안내원과 한 명의 운전기사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가 세관을 통과하고 난 뒤, 공항에서 우리를 금방 알아챈 두 선남선녀가 뛰어오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부부가 낑낑거리며 끌고 온 가방들을 얼른 들었다. 두 남녀는 걸어가는 동안 우리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머나먼 미국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이 드셨느냐"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 잠시 착각했다" "휴가 여행으로 조국을 찾아주신 우리 동포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등등. 졸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우리의 '조국'이 돼 버렸다.

 

그들은 우리 부부의 어색함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쉬지 않고 말을 걸었다. 그동안 일부 재미동포들이 이산 가족을 만나기 위해 또는 친선을 목적으로 한 대표단으로 평양에 오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우리처럼 순수히 관광을 목적으로 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우리의 운전기사는 '로동당원'

 

 왼쪽부터 남편, 운전사 리인덕씨, 남성 안내원 리만룡씨.
ⓒ 신은미

관련사진보기

나는 긴장을 많이 했는지 내 의지를 조절하는 뇌 신경기능이 잠시 멈춰버린 것 같았다. 마치 무중력 상태인 달나라에서 허공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 앞에 도착해서야 의식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마 나의 무의식 속에는 북한 사람들이 이럴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내 머릿속의 프로그램이 리셋되고 있었던 것 같다.

 

자동차에 오르기 전 우리는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자동차 속 좁은 공간에서 서로에 대한 어색한 탐색전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 손으로 우리 손을 꼭 잡으며 반가움을 전했다.

 

호남형인 남성 안내원의 이름은 리만룡. 평양외국어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나이는 서른다섯. 그는 약사인 아내와 두 아이가 있다고 했다. 웃는 인상이 친근감을 더 해줬다. 그리고 아주 예의가 밝았다.

 

첫눈에 봐도 단정하고 멋을 잘 내는 여성 안내원은 김설경. 하얀 눈처럼 깨끗한 성품을 가지면 좋겠다는 뜻으로 아버지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셨단다. 나이는 스물다섯이며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다. 아직은 미혼이지만, 앞으로 결혼할 사람이 있다며 남자친구에 대한 은근한 자랑을 덧붙였다. 그때, 내 머릿속 정보입력 담당 기관이 다시 한 번 기능을 멈췄다. 북한 여성으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와 말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의외였다.

 

순박한 아저씨 같은 운전사의 이름은 리인덕이다. 나이는 마흔하나이며, 고등학교 졸업 후 줄곧 운전을 했다고 말했다. 기혼이며 두 아이의 아빠로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단다. 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순간 나는 스스로 되뇌었다. '아니, 난 대체 어떤 모습의 아빠를 이곳 북한에서 찾으려 했던 거지? 왜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모습에서 갑자기 배신감이 느껴지는 거지?'라고. 내 머릿속 신경세포가 갈피를 못 잡는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여성 안내원이 말했다.

 

"앞으로 우리를 위해 운전해 줄 리인덕 동무는 운전을 시작한 후 지금껏 사고가 한 번도 나지 않았습네다. 리인덕 동무는 조선 로동당 당원입네다. 리만룡 동무와 저는 아직 당원이 아닙네다."

 

이말을 듣자 몸둘 바를 모르고 수줍어하며 부끄러워 하는 운전수 리인덕 아저씨의 모습은 내 뇌리에 박혀 있는 노동당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 내 감춰둔 의식 세계에서 북한은 우주 밖, 외계인들이 사는 나라이길 기대했었나 보다. 아니면, 속세와 단절돼 있어 그 어떤 평범한 상식도 통용되지 않는, 도깨비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기한 나라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공산 혁명의 수도' 평양의 퇴근길

 

 전기버스가 보인다. 버스 안에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 신은미

관련사진보기

우리 부부와 열흘 동안 함께 북한을 다닐 자동차는 은색 7인승 밴이다. 북한에서 생산되는 남북합작기업인 평화자동차에서 생산됐다고 들었다. 운전사 아저씨가 잘 관리한 흔적이 배어 있었다.

 

자동차가 평양 시내를 향해 가고 있는 모양이다. 여성 안내원은 내게 남성 안내원은 남편에게 뭔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듣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 아무 소리도 알아듣지 못했다.

 

5명을 태운 자동차는 회색 아스팔트 길을 무표정으로 달린다. 표정을 달리할 어떤 장애물도 없이 온통 회색빛인 세상을 달린다. 드디어 눈에 익숙한 건축물이 보인다. 파리의 상징인 개선문보다 더 규모가 큰 개선문이라는 설명이 들린다. 파리 개선문은 컬러 사진 속에 있는 것 같다면 평양 개선문은 흑백 사진 속에 있는 것 같았다.

 

 평양 개선문 앞에서.
ⓒ 신은미

관련사진보기

 

사진을 찍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봤다.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멋있다. 먼 발치서 지레짐작하고 그냥 지나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비단 건축물뿐만 아니라 인생사 모든 면에서 범하기 쉬운 교훈이 아닌가 싶다.

 

안내원들은 개선문의 역사적 의미를 열심히 설명해줬지만, 내 눈과 귀는 주위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과 청바지 차림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개선역(지하철역이라고 함) 앞에 서 있는 전기버스, 광장 끝에 보이는 벽화, 그리고 주위 건물 위에 적혀 있는 구호들이 눈에 보였다.

 

그러나 정작 '내가 지금 평양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은 시내로 들어가면서 본 창밖 풍경이었다. 퇴근 시간이 돼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역사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공산주의 국가, 바로 그 모습이었다.

 

 평양의 퇴근길. 사람들은 주로 국방색이나 진한 고동색 인민복 차림에 일부는 모택동 기록영화에서 봤던 모자(붉은 별이 붙어 있는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 신은미

관련사진보기

사람들은 주로 국방색이나 진한 고동색 인민복 차림에 일부는 모택동 기록영화에서 봤던 모자(붉은 별이 붙어 있는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옷과 거의 비슷한 색깔의 배낭을 메고 집을 향해, 아니면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자본주의 국가의 거리 풍경에만 익숙한 내 눈에 비친 평양 퇴근길 풍경. 이 풍경 속 사람들의 모습은 사람들의 영혼마저도 위축돼 정지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이 놀라운 풍경은 영원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풍경 하나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저 '동무'라고 부르시면 됩네다"

 

 여성 안내원 '설경이'(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설경이는 후일 우리 부부가 평양에 두고 온 딸이 돼버리고 만다.
ⓒ 신은미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곧바로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이 음식점 이름은 '민족식당'. 남편이 미리 조사해놨던 평양 유명 식당 중 하나였다. 식당 내부는 조화들로 나름 신경 써서 치장해놨다. 외국 관광객들이 오면 무조건 한 번은 들르게 하는 식당인 모양이다. 옆 테이블에서는 중국말 소리가 들린다.

 

이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북한 민속음식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뒤섞여 있어 음식 고르기를 포기하고 안내원들에게 음식 주문을 맡겼다. 두 안내원은 우리를 위해 정성껏 음식을 주문했다. '조국에 관광 온 재미동포 부부'에게 선보일 음식이니 오죽 신경 써서 고르고 싶었을까. 우리 부부의 환영 파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구이와 냉면으로 식사를 마친 뒤 안내원들은 자신들이 속해있는 조선국제여행사를 소개했다.

 

조선국제여행사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으며 영어과, 독일어과, 프랑스어과, 스페인어과, 러시아어과, 중국어과, 일본어과 등이 있는데 자신들은 영어과 직원들이라고 했다. 우리가 미국에서 왔기 때문에 영어과 직원들이 나왔지만, 우리는 정겨운 우리말로 대화를 나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남북 간의 언어가 이질감이 커져 이러다가 통일 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던 어느 학자의 말이 생각났다. 기우도 그런 기우가 없다. 우리의 의사소통은 완벽했으며 이들의 억양에서 나는 우리 언어의 다양성을 다시 한 번 실감했을 뿐이다.

 

식사 중 나온 대동강맥주 몇 잔이 돌자 벌써 남자들은 경계심을 풀고 친근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로서는 전혀 재미없는 이야기, 북한의 맥주맛은 어떤지, 담뱃맛은 어떤지 등에 대해서다.

 

남성 안내원과 운전기사는 내 남편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남편도 남성 안내원을 '리 선생님'이라고 칭하자 그는 "선생님이라니요?"라며 거북해했다. 그러자 남편은 연하인 안내원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들에게 "그러면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고저 '리 동무'라고 부르시면 됩네다."

 

'동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섬뜩했다. 나는 어렸을 때 '친구'라는 말 대신 '동무'라는 말을 썼다. 어렸을 적 '동무들아 모여라'라는 노랫말로 시작하는 동요를 부른 기억도 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게 언제부터인가 '친구'라는 말을 사용했다. 반공교육이 판치고 있을 때, '동무'라는 말은 공산당원이나 쓰는 말로,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남편은 알겠다고는 대답했으나 좀처럼 '동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모양인지 말을 꺼내려다 상대를 쳐다보며 "있지요..."라는 말을 꺼냈다. 나는 스물다섯 여성 안내원을 '설경이'라고 불렀다.

 

"터졌습네다! 관광 봇물이 터졌습네다!"

 

 멀리서 찍은 양각도 호텔. 왼쪽 뒤로 보이는 섬에 있는 건물이다.
ⓒ 신은미

관련사진보기

양각도 호텔에 도착했다. 양각도는 대동강에 있는 섬으로 이곳에는 호텔, 경기장, 그리고 극장이 있다고 했는데 주위가 컴컴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서늘했던 거리 풍경과는 달리 호텔 안에는 수많은 외국 관광객, 특히 중국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호텔 커피숍에서 우리는 여행 일정을 보고 받았다. 안내원들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변경할 수 있으니 주저 말고 얘기해달라고 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용 없는 말이었지만, 상당히 의외였다.

 

사실상 우리 모두는 여행 일정을 넘어 어딘가에 있을, 함께 공유하고 싶은 다른 세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침묵 속에 흐르는 교감은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이제 미국에서 이 세 사람을 생각하며 준비한 선물 꾸러미만 전달하면 오늘 하루 일정이 끝날 것이다. 선물을 주기 위해 사람들이 덜 붐비는 곳을 찾아 짐을 풀었다. 마치 친정엄마가 자식들 주려고 고향서부터 몇 날을 싸 짊어지고 온 심정이 이럴 것 같았다. 커다란 보따리 세 개를 꺼내고 나니 가방 하나가 텅 비었다. 보따리 속에는 초콜릿을 비롯해 각종 과자, 화장품, 약품, 비누 등등이 있었다. 조그마한 잡화점 같았다. 차 안에 방치해두면 내용물이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에 지금 바로 집에다 갖다 두라고 남편이 말했다. 마침 이들의 집이 호텔 근처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내원과 운전사가 진심으로 감격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며칠 동안 이리저리 선물을 사러 다녔던 노고가 스르르 풀린다. 무엇보다 선물을 받고 기뻐할 집 안의 아이들 생각에 내 마음도 흥분됐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돼버린 미지의 세계에서의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호텔방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앞은 마치 헐값 처분을 하는 상점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저 많은 사람들이 오늘 안에 각자의 방으로 올라갈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최근 들어 중국 관광객들이 밀물 들어오듯 북한을 찾는다는 설명이다. 호텔 직원은 "마침내 터졌습네다. 관광 봇물이 터졌습네다!"라고 말했다. 한 번만 더 터졌다가는 호텔 로비에 이불 펴고 자야 할 지경일 듯싶었다.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수용 가능한 숙박시설과 쾌적한 환경을 일관성 있게 제공해야 관광객들이 북한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우리는 겨우 엘리베이터를 타고 '미지의 첫날밤'을 보내러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