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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제게 물으신다면?

[연재를 마치며] 북녘 동포는 보듬어 안을 우리 형제
12.10.11 19:58l최종 업데이트 12.10.12 11:35l
2011년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에 이끌려 내키지 않는 북한에 첫발을 디딘 이후, 지난 5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40일 동안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다소 교만하고 냉소적인 마음가짐으로 떠난 첫 북한 여행은 저의 거짓 신앙과 삶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저는 경상북도 대구 태생으로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개신교 목사였던 외할아버지께서는 포항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제헌국회를 시작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국회의원을 직함을 달고 지냈던 보수 정치인이셨습니다. 아버지 또한 한국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참전해 조국의 최북단까지 올라갔던 군인이셨습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저 역시 지극히 보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나마 제가 남편을 따라 북한에 여행을 간 것도, '그들은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라는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 차례에 걸친 북한 여행을 통해 '어쩌면 우리와 그렇게 똑같을까'라는 동질성을 깨닫게 됐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나, 유적지를 참관할 때나, 인생의 희로애락을 이야기할 때나... 그 어떤 것도 제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또 동질성을 느끼면 느낄수록, 조국이 분단돼 있다는 생각에 슬픔은 배가됐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을 체험하고,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이와 동시에 민족 통일에 대한 염원을 품게 됐습니다.

북한동포. 이들이야말로 분명 우리가 사랑하고 보듬어 안아야 할 우리 민족이요, 제 형제자매, 그리고 이웃이었습니다. 보잘것없고 편협하기 그지 없었던 내 마음의 빗장을 깨부수고 활짝 열어젖히니, 어두웠던 곳곳을 환히 비춰주는 따사로운 빗줄기가 마음속에 들어옴을 느끼게 됐습니다. 진작에 열어젖히지 못한, 미련하고 어리석었던 내 마음에는 아쉬움만이 가득했습니다.

북한 동포들과의 추억, 아직도 가슴이 뭉클해

원산 시민들. 얼굴 표정에 굳은 삶의 의지가 보인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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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는 북한 여행을 통해 생각 없이 살아온 지난날의 제 모습을 스스로 고백하고 반성하고자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 저와 함께 마음을 나눴던 분들께서 <오마이뉴스>에 여행기를 연재하길 권했습니다.

사실 연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과연 사람들이 이러한 여행기에 관심이나 가져줄까'라는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매회 기사 조회 수가 수십만에 이르는 것을 보며, '아직도 우리 국민들이 민족이나 통일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남과 북이 사랑으로 하나된 '통일조국'을 상상해보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매회 원고를 쓸 때마다 지나간 기억을 되살리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여행 중 만난 따듯한 북한 동포들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제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사이에 비친 그들의 가난은 지금도 제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북한에 다녀온 후 사람들이 제게 '북한은 어떤 나라냐'고 물으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난한 나라'라고.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을 통해 뜨게 된 마음의 눈으로 내내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슬픔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됐을 때, 마음에서 진정한 사랑이 배어 나오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사랑으로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니, 그 어떤 것도 굴절되지 않고 어그러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였습니다.

2013년, 다시 북한에 가려 합니다

을밀대를 넘어 개선문 광장으로 가는 길에 설경이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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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이 잘 전해지지 않아 독자들로부터 심한 비난의 댓글을 받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글을 연재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쓰기를 그만두려고도 했습니다. 또한 실향민들과 이산가족분들로 부터 '죽기 전에 고향 땅 한 번만 밟아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쪽지를 받았을 때는 그런 곳에 한가하게 여행이나 하고 돌아온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분들께 미안한 감정을 넘어 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신 <오마이뉴스> 독자들을 생각했습니다. 독자들이 있었기에 다시금 힘을 얻어 계속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이 연재 여행기의 출판을 권했습니다. 또 일본의 한 출판사를 비롯해 국내의 몇몇 출판사로부터 단행본 출간을 요청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네잎클로바 출판사로부터 장문의 출판 제의 메일을 받고 출판을 결심했습니다. 이 여행기를 읽고 단 한 사람이라도 민족의 앞날과 통일에 대해 관심을 더할 수 있기만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는 2013년 또다시 북한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지면을 허락한다면, 독자 여러분들께 북한 동포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여행기가 연재되는 동안 수많은 분들께서 아름답고 애절한 댓글을 달아주셨고, 쪽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반대 성격의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도 많이 계셨지요. 그분들의 심정 역시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곱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해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겠나'라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이 여행기의 연재를 다듬어준 <오마이뉴스> 편집부 기자들, 수십만 회씩 기사를 클릭해주신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들, 조국의 정보에 어두운 저에게 <오마이뉴스>를 알려주신 UCLA 교환학자 이병한 선생님,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의 저자이시며 제 '민족통일학'의 스승님이신 재미동포 의학자 오인동 박사님, 그리고 연재가 나가는 동안 많은 격려를 보내주신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끝으로 제게 북한 여행을 제안하고 마음의 눈을 함께 뜬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우리가 여행을 떠난 동안 집에서 혼자 지내야 했던 막내딸 수민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2012년 10월, 캘리포니아에서, 신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