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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탄 유엔 안보리
유엔으로 건너간 천안함과 KAL858-박강성주
2010년 07월 05일 (월) 15:40:23 박강성주 http://onecorea615.cafe24.com/xe/tongilnews/mailto.html?mail=tongil@tongilnews.com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나에게는 이유가 중요해."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미국은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발표한다. 그 정보에 의해 의심이 가는 곳을 수색하지만, 매번 실패한다. 그러자 수색임무의 책임자인 장교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다. 그렇게 의문을 품는 이에게 동료가 말한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고. 그러자 그가 위에서처럼 말한다. 나에게는 그 이유가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고, 나는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미국의 대량살상무기 정보조작을 다룬 영화, <그린 존>에 나오는 대목이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의 공식조사 결과가 발표됐고, 이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에게 정부는 말한다. 왜 의문을 품느냐고. 그냥 우리가 발표한 대로 믿으면 된다고...

천안함(PCC772)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 1987년 북한 공작원 김현희.김승일에 의해 폭파됐다고 공식 발표된 KAL858기 사건을 떠올린다. 처음에는 나만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인지 의아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KAL858기 실종자 가족들과의 면접을 포함해, 천안함을 둘러싼 논란의 과정에서 그것이 나만의 생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생각 중 하나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관련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유엔으로 날아간 KAL858

먼저 한국 정부가 KAL858기 사건을 유엔 안보리로 가져갔을 당시의 배경을 짚어보자. 공식적인 안보리 논의는 1988년 2월 16일부터 17일까지 이틀에 걸쳐 진행됐다. 그 시기는, 안기부가 공식결과를 발표하고(1월 15일), 미국이 북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고(1월 20일), 일본이 북에 대한 제재조치를 발표한(1월 26일), 그리고 미 하원에서 사건 관련 청문회를 진행한(2월 4일) 바로 뒤였다. 다시 말해, 공식결과가 북의 테러로 발표되고, 한국의 '우방국'인 미국.일본이 이를 적극 지지한 이후였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당시 공식결과를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한 시기였다는 점이다. 거의 유일한 물증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유일한 생존자' 김현희였다. 공식결과는 대부분 김현희의 진술에 의존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 북은 사건과의 관련성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조선중앙통신사 대변인 성명을 시작으로(1987년 12월 5일), 안기부 수사결과에 대한 전반적인 반박(1988년 1월 1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논의에 대한 비판(1988년 2월 16일) 등 북은 최소한 6번의 공식성명을 냈다. 요약하면, 증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북의 테러라는 공식결과가 발표됐고, 북은 이를 적극 부인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논의가 시작된 과정은 어땠을까. 한국은 1988년 2월 1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를 요청한다. 그 요청서에서 한국은 KAL858기가 "두 명의 북한 공작원에 의해 폭파"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같은 날, 일본 역시 사건의 논의를 위해 긴급회의를 요청하게 된다(김현희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했다는 이유였다).

한국과 일본이 유엔에서의 논의를 추진하자, 북쪽도 대응에 나서게 된다. 같은 날인 2월 10일, 북은 한국의 수사결과를 반박하는 내용의 문서를 유엔에 공식 제출한다. 이어서 2월 12일, 한국(일본)의 요청대로 안보리 회의를 소집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비공개모임이 열린다. 이사국들이 참여한 이 모임에서 소련과 중국은 회의 소집에 반대의견을 낸다(유엔 문서 S/19514, 3쪽). 하지만 결국 비공개모임은 안보리 회의를 열기로 결정하고, 이에 북도 회의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요약하면, 일단 한국이 안보리 소집을 먼저 요청했고, 소련과 중국이 반대하는 가운데 미국이 포함되어 있는 이사국들이 안보리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논의 자체는 어땠는가. 안보리 회의에는 회원국 자격으로 15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일본, 서독, 이탈리아, 알제리, 아르헨티나, 브라질, 네팔, 세네갈, 유고, 잠비아), 참관국 자격으로 3개국(한국, 북한, 바레인) 등 모두 18개국이 참여했고, 의장국은 미국이 맡았다.

논의는 크게 4가지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유엔 속기록 S/PV. 2791, S/PV. 2792). 첫째, 북쪽의 테러. KAL기 사건은 '북이 서울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테러공작'이라는 입장이다. 한국, 일본, 미국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남쪽의 조작. 이 사건은 '남측 지도부가 대통령 선거의 승리를 목적으로 꾸민 조작극'이라는 것이다. 바로 북의 입장이다. 셋째, 논의 반대 및 우려. 이 사건을 '안보리에서 다루는 것에 반대'하고 아울러 '깊은 우려를 표명'하는 입장이다. 소련, 중국, 네팔 등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 독립적인 조사 필요. 한국에 의해 진행된 수사에는 문제가 있으며 따라서 '심층적이고 독립적인 수준의 조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독, 이탈리아, 잠비아 등이 이를 대변한다. 이 밖에, 한국의 수사결과에 '주목'한다는 입장(영국, 프랑스), 누가 했든지에 상관없이 '테러에 반대'한다는 입장(유고, 아르헨티나) 등이 있었다. [관련 자료1 보기] [관련 자료2 보기]

이렇듯 여러 입장들이 논의됐던 회의는, 이런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장의 발언과 함께 특별한 결의안의 채택없이 마무리된다.

요약하면, 안보리 논의는 한국.일본.미국의 '대북 유엔동맹'이 이루어진 가운데 진행됐고, 결론적으로 한국은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 했다(사실 한국은 구체적인 결의안의 채택을 의도했다기보다, 국제무대에서 북을 고립시키는 상징적인 효과를 노렸는지 모른다).

유엔으로 건너간 천안함

그럼 이를 바탕으로 천안함 사건을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까지의 진행상황, 곧 회의배경과 소집과정은 KAL858기와 거의 비슷하다.

2010년 5월 20일, 한국은 천안함이 '북 잠수정에서 발사된 어뢰에 의해 침몰했다'는 공식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확실한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북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공식입장을 밝혔고 검열단을 파견하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정리하면, 증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또는 증거에 심각한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북의 공격이라는 조사결과가 발표됐고, 북은 이를 적극 부인하는 상황이다.

2010년 6월 4일, 한국은 이 사건에 대해 유엔 안보리가 논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미국과 일본은 한국의 움직임에 적극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국이 안보리 논의에 부정적이고 러시아(소련)는 자체 검증을 통해 공식조사 결과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리하면, 한국이 이 사건을 유엔 안보리로 가져갔고, 이를 미국과 일본 등이 적극 지지하는 가운데 중국과 러시아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결국 적어도 지금까지의 상황은, 마치 유엔 안보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1988년 KAL858기 사건 논의 당시로 돌아간 듯하다. 과연 논의내용과 결과까지 그렇게 될지 주목된다.

그리고 몇 가지 지적할 점이 있는데, 먼저 천안함의 경우 (한국 출신의) 유엔 사무총장이 이 사건을 "북에 의한 용납될 수 없는 행위"(Such an unacceptable act by the DPRK)로 규정했다는 것이다(유엔 홈페이지, 2010년 5월 24일). 곧, 유엔의 최고책임자가 한국이 제출한 조사결과를 이미 지지한 상황이다. 다음으로 천안함 사건에서는 조사 관련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한국정부의 단독조사가 아니라 몇 개 국가들(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형식을 띄었다는 점이다. 한국은 이를 조사결과의 정당성을 높이는 지렛대로 사용하려 할 것이다(물론 그들의 구체적인 활동여부, 대부분 한국에 우호적인 나라 출신이라는 점 등이 지적되어야 하겠다).

한편, KAL기 사건 당시 언론보도를 검토한 결과, 안보리의 논의내용과 결과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보도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경향신문><한국일보><서울신문> 등 이른바 '주요언론'에 예외가 없었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1988년 2월 18일)는 "일.영.프 등 강력응징 주장"이라는 소제목으로 기사를 냈지만,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한국쪽 수사결과에 주목한다는 차원의 발언을 "강력응징"으로 입맛에 맞게 바꾼 것이다. 그리고 <동아일보>(1988년 2월 19일)의 경우, "KAL기 폭파는 분명한 북한소행"이라는 제목으로 안보리가 사건에 대해 북의 테러라고 분명히 밝힌 것처럼 보도했으나, 이 역시 논의결과를 크게 왜곡한 것이었다. 유엔 속기록과 언론보도를 직접 비교해가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모든 언론이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나마 괜찮았을 <한겨레>를 살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찾지 못 했다. 1988년 2월 당시, 창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허탈감과 언론에 대한 불신으로 국회도서관에서 한숨을 내쉬던 기억이 난다. 유엔 안보리 논의에 대한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는, 한 마디로 '왜곡보도의 모범답안'이었다.

천안함의 경우에도 언론들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가능은 하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지금은 '인터넷'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정부는 이마저 통제하려 한다). 아울러 인터넷 언론을 포함한 몇몇 언론들이 초기부터 공식결과를 나름대로 검증하고 있는 상황은, 언론과 관련해 약간의 희망을 갖게 한다.

이명박 정부의 타임머신

이 언론부분을 포함해, 천안함과 KAL858기는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다. 무엇보다 KAL기의 경우 물증이 될 수 있는 '믿을 만한'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천안함의 경우에는 선체가 발견되었다. KAL기 가족분들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린다면, 천안함의 경우 시신도 함께 발견되었다.

그리고 1987년 당시와는 달리 지금은 많은 시민.전문가들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마도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조사관련 문서를 '유엔 안보리'에 제출한 것이 아닐까(유엔 홈페이지 검색결과, 사무총장 대변인 일일회견에서 6월 14일, 15일, 17일에 걸쳐 적어도 3번 정도 참여연대 문서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한편 이를 둘러싼 참여연대에 대한 공격은 부당한 것이라 생각한다). 2010년의 천안함은 이런 점에서 다르고, 그래서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KAL기 사건이 아쉽기도 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당시 KAL858기 가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다름 아닌 1980년대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시절이다. 그 고립감과 외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러한 가족들의 상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천안함 가족들의 경우, 공식조사단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그 이유를 '들러리' 역할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KAL기 가족들의 외로움이 천안함 가족들의 경우에도 얼마든지 해당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유엔 안보리만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자체가 타임머신을 타고 있다(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결국, 이명박 정부는 1987년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2010년 3월 26일 저녁으로 돌아가야 한다. 천안함과 KAL858기. 두 사건 모두 (의문들이 많지만) 북이 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걸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고 전면적인 조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빨랐다. 유엔 안보리로 가는 타임머신의 속도가 KAL기.천안함의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그래서 그 안에 타고 있던 이들은 외롭게, 남겨졌다.

* 이 글은 다음의 책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박강성주, <KAL858, 진실에 대한 예의: 김현희 사건과 '분단권력'>(선인,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