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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여보라고? 북한서는 촌스러운 말입네다"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0] 평양에서의 마지막 공연
12.08.24 16:54l최종 업데이트 12.08.24 17:21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평양의 중심가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는 '평양 대극장'에서의 공연 날. 오늘은 초대받은 모든 예술단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연을 한단다. 그 많은 예술인들이 모두 무대에 설 수 없어 예술단 중 한두 명이 대표로 선발돼 공연을 하게 됐다. 나는 재미동포 예술단 대표로 나가 노래를 부르게 됐다. 아마도 내가 한복을 입고 북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북한 젊은이들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공연이 끝난 후 세계각지에서 온 동포 출연자들과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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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자 혜영 선생은 "선생님 덕분에 저도 이 좋은 극장에서 연주할 수 있어서 영광입네다"라며 오늘은 특별히 결혼한 언니네 집 앞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왔단다. 혜영 선생은 머리가 흡족한지 거울 앞에서 싱글벙글. 그러고 보니 예전 머리보다 좀 더 우아해 보인다. 미용실에서 얼굴 화장도 신경을 썼는지 다른 날보다 더 예뻐 보였다.

"혜영 선생, 오늘 남자 친구라도 오는가 봐?"
"아닙네다. 아직 남자친구가 없습네다. 대신 어머니가 오실 겁네다."
"오늘따라 너무 예쁜데 어머니께서 선 볼 남자라도 데리고 오시지 않을까?"
"오마나! 선생님이 그런걸 어떻게…그러지 않아도 공연할 때 아버지께서 몇 번 그랬답네다."
"나도 똑같은 경험 많이 했지. 우리 아버지도 여러 번 그러셨단다. 그래, 혜영 선생은 아버지께서 데리고 온 남자들을 만나 봤어? 어땠어?"

"딱 한 사람 만나 봤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그다음부터는 절대 안 나갑네다."
"아버지께서 야단 안 치셨어?"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드니까니 서두르라 하시는데, 저는 지금 하고 있는 음악 활동이 너무 좋아 당분간은… 그래도 생각 안 할 수는 없지요. 역시 우리 나이가 결혼할 나이니만큼 내 또래 동무들 사이에서도 단연 결혼이 최고 관심사 중에 하나입네다."
"여기서는 남녀가 어떻게 만나서 결혼을 해? 연애 아니면 누가 소개해줘서?"
"고저 반반입네다. 서로 좋아해 하는 경우도 있고, 또 누가 소개해줘서 하는 경우도 있습네다. 그런데 누가 소개해 줬다 해도 여러 번 만나 마음에 들어야 하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안 합네다."
"서로 좋아하는데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경우도 있어?"
"그러믄요. 그러나 남녀가 서로 좋아한다는데 그건 누구도 못 말립네다."

인간의 삶이란 어딜 가나 모두 같은가 보다. 이념이 다르고,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인생의 희로애락까지 달라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물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궁금증이 발동한 나는 혜영 선생에게 몇 가지를 더 물었다.

"혜영 선생은 어떤 남자를 좋아해? 잘생긴 남자 아니면 좋은 직장을 갖고 있는 남자?"
"(웃으면서) 둘 다 입네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남자다워야 합네다."
"남자다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야?"
"조국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알고 목숨도 바칠 수도 있는 그런 남자 말입네다."


부끄럽게도 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네다."
"뭔데? 말해 봐."
"신 선생님은 언제부터 남편을 '여보'라고 부르셨습네까?"
"결혼하고 나서부터.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해? 여기서는 그렇게 안 부르나봐?"
"여기서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긴 있습네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이 촌스럽다고 해서 잘 쓰지 않는단 말입네다. 선생님처럼 세련된 부부가 '여보'라는 말을 써서 재미있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드랬습네다."


하기사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잘 쓰지 않는 호칭임은 분명하다.

"그래? 그럼 여기서는 결혼한 부부가 서로를 어떻게 부르지?"
"예를 들어 '철희 엄마' '혜영이 아버지'하는 식입네다."
"남쪽에서도 그렇게들 많이 불러. 그건 크게 다르지 않네. 그러면, 결혼 전에는 서로를 어떻게 불러?"
"나이가 비슷하면 '철희 동무' '헤영 동무'라고 부릅네다. 그런데 남자와 나이 차가 많으면 '동무'란 말 대신 '철희 동지'라고 하고, '동지'라는 말을 씁네다. 그러다 가까워지면 '혜영' '혜영이' 또는 '혜영아' 하고 그냥 이름을 부르기도 합네다. 남쪽에서는 결혼 전에 서로 어떻게 부르나요?"
"보통 이름을 부르거나 '누구누구씨', 또는 여자들이 남자를 보고 '오빠'라고도 많이 불러. 결혼하고도 그렇게 부르는 여자들도 있고."
"오마나, 남편을 '오빠'라고 말입네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나는 너무 재미있어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데, 혜영 선생이 긴장도 풀 겸 바깥 공기를 마시러 나가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정문 쪽으로 나가보니 사람들이 벌써부터 입장을 위해 줄을 길게 서 기다리고 있다. 공연시간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이나 더 남았는데 말이다.

북한서도 일고 있는 금연 운동

공연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관람객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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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어 뒷문 쪽으로 갔다. 남편은 열심히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고, 김정남 안내원은 흐뭇한 표정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는 게 아닌가. 나를 보더니 얼른 담뱃불을 끈다.

"아니 지난번 피자집에서 담배를 끊겠다고 다짐을 하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 아빠 건강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딸한테 아무래도 알려줘야 할 것 같네요. 전화 좀 걸어 주세요."
"사실이지 건강 챙긴다고 술·담배 딱 끊은 친구들이 끊기가 무섭게 먼저 세상 뜨고 말았단 말입네다. 그래서 좀 끊기가…. 제가 지금 담뱃불을 끈 것은 신 녀사님께서 노래를 부르셔야 하는데 담배 연기가 목에 좋지 않아서 끈 겁네다."

김정남 안내원은 눈을 찡긋하며 겸연쩍은 마음을 은근슬쩍 감춘다.

이곳 북한에서도 요새 들어 금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단다. 공공장소에서는 금연 표시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남편이 "정말인가요? 내가 평양에 오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아무 데서나 담배를 마음 놓고 필 수 있어서인데…"라고 장난스레 한마디 건네며 웃는다. 내 남편도 제발 담배 좀 끊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 인공위성 실험한 것은 어떻게 됐어요?"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남편이 물어봤다. 나도 궁금했던 차였다. 김정남 안내원은 "아, 그것이 궤도에 들어가지 못하고 실패했습네다. 인공위성 띄우는 일이라는 게 실패를 해가며 하는 일이니까니 뭐…"라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순간 남편과 나는 서로 쳐다보며 의아해 했다. 이제까지 북한에서는 발사할 때마다 성공했다는 발표만 했는데 이렇게 빨리, 그것도 실패한 뉴스를 발표해 의외였기 때문이다.

북녘 동포들은 이렇듯 과학 기술도 있고 부지런하며 근면하고 재주도 많다. 하기야 조그마한 반쪽 나라, 당당히 세계 경제 대국으로 우뚝 솟아 오른 한국, 우리와 한민족이니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힘들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북녘 동포들을 보니 정말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이유야 어쨌든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버린 남북의 힘든 관계 속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서로 이해하고 도와 가며 새로운 한겨레의 멋진 역사를 행복하게 써내려 가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흐뭇한 기대가 현실로 이뤄질 날을 상상한다. 마음이 마구 설렌다. 언젠가 그날이 꼭 오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본다.

뜨거운 마음... "잠깐 만나도 심장에 남아"

평양대극장 실내 모습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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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순서를 설명하는 연주 해설원의 소개로 무대에 올랐다. 동포들과 뜨겁게 하나가 되고픈 마음을 안고 무대에 오른다. 백 마디 말이 서로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아름다운 멜로디에 진심을 담아 동포들에게 전하니 그저 서로의 호흡에서, 눈빛에서 어그러져 있던 감성들이 포근한 화음이 돼 가지런하게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동안 시나브로 쌓여왔던 미움도, 분열도, 증오도 영혼이 화합하니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 벅찬 감동으로 우리 가슴을 애절하게 달궜다.

내일모레는 우리 일정의 마지막 날.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나면 우리 재미예술단이 다른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공연 관계자들을 저녁 만찬에 초대하기로 했다. 평양대극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 하기로 돼 있어 답사차 둘러보기로 했다. 식당은 아늑했다. 그런데, 식당의 한 구석에는 놀랍게도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호텔 방에 들어와 잠자리에 드니 노랫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아 있는 북녘 동포들, 꿈속에서나마 이 애달픈 마음이 시원하게, 시원하게 풀렸으면 하고 되뇌며 달콤한 잠을 청한다.

웅장한 규모의 '대공연', 이름값 합니다

평양체육관에서 있었던 봄축전의 하이라이트 '대공연' 장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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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체육관에서 있었던 봄축전의 하이라이트 '대공연' 장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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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체육관에서 있었던 봄축전의 하이라이트 '대공연' 장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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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공연이 없는 날이다. 일정이 없는 대신 평양체육관에서 열리는, 태양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대공연'을 보러 간단다. '대공연'은 북한 예술인들이 북한 주민들과 외국 손님들을 위해 하는 공연이다. 얼마나 또 우리를 놀라게 하려고 음악회를 체육관서 한다고 하는지….

안에 들어가 보니 공연 무대 장치만 봐도 이 음악회의 웅장함을 가늠할 수 있었다. 곧 음악회가 시작됐고, 공연 내용을 알리는 해설원이 등장한다. 이 음악회의 주제는 '북한의 역사'란다. 무대 벽면에는 체육관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대형 스크린이 놓여 있었고, 화면 에는 북한의 역사를 시대 순서별로 상영했다.

무대에는 천여 명의 합창단과 수백 명에 달하는 오케스트라 대원들이 연주자들의 반주를 맡았다. 설명이 필요 없는 대단한 공연, 또 다른 '아리랑 공연'이나 다름없다. 큰 체육관의 무대 공간이 부족할 정도의 규모이다. 과연 '대공연'이라 할 만했다.

설경이와의 내기, 남편은 졌습니다

왼쪽이 옥류관 오른쪽이 4월에 완공된 고층 아파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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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번 축제의 마지막 공연날. 공연장으로 가기에 앞서 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 들러 점심을 먹는단다. 사실 지난 10월 첫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꼭 한 번 옥류관 냉면 맛을 보고 싶었는데 당시 옥류관 앞길이 공사 중이어서 갈 수 없었다. 특히 냉면을 좋아하는 남편은 지난번에 먹지 못한 것까지 두 그릇을 먹겠다며 아침부터 벼르고 있었다.

옥류관으로 가는 길에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들이 가로수처럼 죽 늘어서 있다. 지난 10월, 설경이가 "내년 4월이면 완공됩네다"라고 설명했던 그 아파트들이다. 앙상하게 뼈대만 있던 건축물들이 아파트로 태어났다.

'내년 4월까지 다 완공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호언장담했던 남편이 내 귀에 대고 슬그머니 속삭인다.

"저거 순 날림 공사일 거야. 그게 아니면 사람이 살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야. 틀림없어. 아니 6개월 사이에 저걸 무슨 재주로 완공해?"
"여보, 누가 듣겠어요. 조용히 좀 하세요."


지난 10월 여행 당시 봉수교회의 목사에게 "이 교회, 가짜 아닌가요"라고 물어 나를 당황케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안내원에게 '저 아파트에 사람은 살고 있나요'라고 물을 것만 같아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눈짓으로 간청했다.

차안에서 바라본 옥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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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때와는 달리 완벽한 모습으로 단장한 아파트 건물들을 의아해하며 지나치니 멀리 옥류관이 눈에 들어온다. 옥류관 건물 앞은 지방에서 올라온 단체 관광버스로 가득 차 있었다. 남녀노소, 군인 등 수많은 사람으로 무척이나 붐볐다.

우리 일행은 안내원의 도움으로 2층에 마련돼 있는 특별연회장 같은 곳에 들어갔다.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식당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차 있다. 그야말로 안팎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안내원 말에 따르면, 옥류관은 기념비적인 곳이라 한번쯤은 꼭 와보는 식당이지만, 사실 평양에는 시민들이 자주 찾는, 맛있는 식당들이 더 많이 있단다. 요즘은 식당들끼리 경쟁도 치열하다고. '식당들 사이에 경쟁이 붙었다'는 말에 남편이 뭔가 물으려고 하다 내가 신호를 주자 이내 포기하고 만다.

담백하면서도 짜릿한, 달지 않으면서도 감칠맛 나는 시원한 냉면 국물을 그릇째 들이켜고 나니 노래가 절로 나올 것만 같다.

마지막 공연서 북한의 '목화 할머니'를 만나다

마지막 공연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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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공연이 시작됐다. '애증의 화석 덩어리가 송두리째 애정의 불덩어리로 변해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워진 내 마음을 이 무대서 쏟아 놓으리라'고 다짐했다. 달아오르는 마음을 한 음절 한 음절 헛되지 않게 털어놓으려니 가슴에 눈물이 알알이 맺힌다. 내 마음을 들이마신, 사랑하는 내 동포들이 눈물로 화답한다.

노래가 끝나자 네다섯 명의 여성들이 한복과 양장을 정숙하게 차려입고 무대 위로 꽃다발을 들고 올라온다. 감동에 겨운 눈빛으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교환한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순간 낯이 익은 또 한 여성이 꽃다발과 함께 눈물을 닦으며 무대 위를 걸어온다. 아! 조선미술박물관의 그 정 많고 살가웠던 해설원이 아닌가. 며칠 전 우연히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공연 소식을 전하긴 했으나 용케 이렇게 찾아올 줄은 미처 기대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꽃다발을 무대 위에 내려놓은 채 그 안내원과 무대 위에서 특별한 상봉을 한 것처럼 진심 가득한 포옹을 했다. 감격의 마음이 서로의 눈물이 돼 눈가를 촉촉이 적신다.

오늘의 이 숨 가쁘도록 벅찬 순간은 또 다른 그리움이 돼 속절없는 세월 속에 묻히겠지. 하지만 이 순간의 감격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공연을 마친 후 터질듯한 감격으로 분장실에 앉아 남북 한민족이 사랑으로 하나 될 그날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기도를 하고 있는데 여러 재미동포분들이 분장실로 찾아왔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서로의 마음은 서로 꼭 잡은 손을 통해 오가고 있었다. 한 분 한 분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분들이다.

특별히 그 중 한 분은 미네소타에서 공부하던 시절, '미네소타 한인 장로교회'에 나와 함께 다니시던 분으로 그 시절부터 북한의 농업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김필주 박사님이었다. 북한의 시골 구석구석을 다니며 농작물 품종 개발에 지금까지도 당신의 평생을 던지고 계신다. 김필주 박사님은 2011년 뉴스위크지가 선정한 '세계를 뒤흔드는 여성 150인'에 힐러리 클린턴,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등과 함께 오르신 분이다.

훌쩍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드신 선생님은 북한에서 '목화 할머니'로 통하신단다. 아마도 '목화꽃'처럼 마음이 순백하고 실질적 삶에 도움을 주는 분이라 그렇게 불리는 게 아닌가 싶다. 선생님과의 반가운 재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지난날, 무심히 살아온 내 삶을 반성해본다.

지난 열흘 동안의 감격스러운 공연은 오늘로 막을 내렸다. 그동안 우리를 위해 수고해 준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관계자들, 그리고 재미동포 예술단은 저녁 만찬을 위해 평양대극장 안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에서의 마지막 만찬인 셈이다.

솟아오르는 애달픔... 아리랑만 목놓아 부릅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의 마지막 만찬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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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간 내 노래 반주를 하느라 애를 쓴 박혜영 선생도 이 만찬에 참석했다. 혜영 선생은 내 옆에 앉아 언제 다시 보게 될 지 모를 내 손을 꽉 붙잡고서 연신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나 역시 혜영 선생과의 기약 없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대동강 맥주잔을 꼭 쥔 채 차오르는 슬픔을 꾹꾹 누르고 있다.

이미 음악을 통해 서로 마음을 나눈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한 식탁에 둘러앉자마자 다가올 이별에 대한 애틋한 교감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늘 함께해온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말이다.

우리는 어느새 화음을 넣어 가며 <아리랑>과 <고향의 봄>을 힘차게 부르고 있다. 중간중간에 자신들의 악기 소리를 목소리로 내 간주와 박자를 넣어 가면서...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우리들의 얼굴 언저리에는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쓰라린 우리 민족의 운명과 아픔의 잔재가 드리워져 있었다. 내 앞의 순박하게 생긴 연출자 아저씨,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했다는 젊은 지휘자, 광부로 있다가 발탁돼 왔다는 '바순' 부는 정 많은 아저씨, 남편이 비뇨기과 의사라며 "남편에게 물어볼 것 없이 자기에게 직접 먼저 물어보면 웬만한 것은 자신이 다 고쳐줄 수 있다"며 박장대소를 끌어내는 재치 넘치는 바이올린 연주자의 얼굴 위에도...

우리는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가야만 하는, 아무도 알 길이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 묵묵히 떠내려가야만 하는 것일까.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애꿎은 "아리랑… 아리랑…" 노랫말이 하염없이 입가에 맴돈다.

열흘간 목에 걸고 다녔던 아이디 카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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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대한항공만큼이나 익숙해진 고려항공. 비행기 안에서 그동안 목에 걸고 다녔던, '신은미, 재미조선인예술단 자유 가수'라고 적혀 있는 아이디 카드를 바라보니 아름다운 기억들이 애달픈 추억으로 스멀스멀 피어올라 눈물이 주르륵 떨어진다.

끊이지 않는, '내 생애에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