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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당국에 감사" 이 유럽인들 왜 이러는 걸까요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4] 평양봉수교회, 푸에블로호 그리고 백두산
12.09.14 21:24l최종 업데이트 12.09.17 09:47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평양에서의 찬양예배, 감동이 밀려왔다

오늘은 주일날이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예정 출발시간보다 일찍 서둘러서 '봉수교회'로 향했다. 서두른 보람이 있어 예배시간 20여 분 전에 도착했다. 이미 와서 자리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성가대원들이 눈에 띈다.

예배를 기다리는 신도들이 성경을 읽고 있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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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이가 '미국에서 방문하신 분들'이라며 목사님에게 우리를 소개해주었다. 목사님은 나와 남편을 보시더니 금방 우리를 기억해 내셨다.

"지난 가을이었던가, 그때 오셨던 두 분 아니십네까? 정말 반갑습네다. 그리고 부인께서는 '리화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했다고 하셨디요?"
"네, 맞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도 기억하고 계세요?"


"지난번에는 늦게 와서 예배도 못 드리고 기냥 기도만 하고 간 것 다 생각납네다. 남편께서 '이 교회 가짜 교회 아니냐'고 물은 것도 기억 나고…. 북남교류가 활발했을 시절에 '리화여대' 출신의 성악가를 비롯해서 몇분의 성악가들이 방문해 은혜스런 찬양을 불렀댔디요. 지난 번에 부인께서 리화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하셨다고 해서 예전 생각이 났습네다."

목사님은 그때 온 성악가들의 이름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그들 성악가 중에는,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솔리스트로 활동한 서울 강남 '소망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한 언니도 있다. 그 언니는 지금 한국에서 유명한 성악가이자 교수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시절, 같은 성가대에서 봉사하던 사람 중에 지금의 우리나라 최고 높으신 분의 사모님도 계셨다.

'아!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으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찬양을 드리던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라는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나니 세월 속, 누렇게 빛 바랜 지금의 내 영혼이 부끄러워 괜시리 움츠려 든다.

목사님은 내게 '예배 중 특별찬양을 불러주면 고맙겠다'고 청했고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목사님 옆에 서 있던 한 여인이 본인은 교회 전도사라면서 반갑게 우리에게 인사를 한 뒤 우리 일행을 앞쪽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평양봉수교회 성가대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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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교회 피아노 반주는 설경이 친구의 엄마라는 분이 하고 계신다. 드디어 예배를 알리는 개회 찬송이 성가대원들의 찬양과 피아노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교회 안에 울려 퍼진다. 내 영혼의 간절한 소원도 찬양의 소리에 하나의 울림으로 흡수되어 북녘땅의 하늘 위로 널리 널리 메아리 치고 있음을 감지한다.

적어도 오늘,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북한의 이 동포들은 진정으로 우리 민족이 사랑으로 하나되어, 흑암 가운데 방황하는 많은 나라들을 밝게 비춰주는 등대와 같은 민족이 될 수 있도록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목사의 축도를 받고 있는 신도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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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사님의 대중 기도에 이어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다. 오늘이 '어머니 주일'이라며 어머니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에 빗대어 설교하신다. '어머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면서도 올바른 질책과 때로는 자신의 살이 떼어지는 듯한 아픔을 감수하듯, 하나님도 한량없는 사랑을 베풀면서도 더 큰 인간이 되도록 시련과 연단을 주신다'는 그런 내용의 설교였다. 북녘 땅에서 동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니 한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나의 특별찬양 순서가 되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 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그저 나의 간절한 기도가 찬양이 되어서 '하늘로 하늘로' 울려 퍼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보다 앞서, 이곳에서 찬양을 부르고 간 선배 언니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그 언니의 찬양이 한목소리 되어 나와 함께 부르고 있는 듯하다. 내 영혼이 떨린다. 신도들이 구석 구석에서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나와 함께 찬양을 따라부르고 있다. 어떤 성도는 나즈막하게 기도를 하고 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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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가 끝나자 신도들이 다가와 인사를 하며 반가움을 전한다. 손을 잡아 체온이 느껴지니 눈물이 난다.

평양에 오면 좋은 점이 하나 더 있다. 교회가기를 게을리 하는 남편이 평양에만 오면, 이미 정해진 일정 때문이겠지만 '군말없이' 꼬박 교회에 '졸졸' 쫓아나오니.

"조국을 무시하는 행동은 참을 수가 없다"

대동강에 전시되어 있는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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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마친 후 미 해군 함정이었던 '푸에블로'호가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한다. "북한 영해를 침범해 원산 앞바다에서 첩보활동을 하다 나포될 당시 배의 안팎을 그대로 보존해 놓았다"고 한다.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사건을 아세요?"

"응. 내가 중학교 때가 아닌가 싶네. 당시에는 전쟁나는 줄 알았지. 자세한 내막은 나도 커서 알았어."

"무슨 일이었어요?"
"미국은 '공해상에서 합법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배를 북한이 불법나포했다'고 말하고, 북한은 그 반대로 주장했었어."

"누구 말이 맞아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냥 여기 해설원 얘기 들어봐."


푸에블로호의 여성 해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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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호. 원 안은 당시 전투 상황을 말해주는 총탄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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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을 입은 여자 해설원이 그 당시에 어떻게 나포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때의 생생한 기록 필름도 보여주었다. 풀이 죽은 미국 군인들이 생포된 채 배에서 끌려나오는 장면과 미국이 국제법을 어겨 책망받는 그런 내용의 흑백 기록 필름이었다. 미국은 사과를 하고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포로들을 석방했다고 기록 영상은 말한다.

미국 친구들이 마음이 불편하고 난처한지 아무렇지도 않은듯, 이해하는 듯 하면서도 알고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그들의 방식대로 북한에 대한 가시달린 부정적인 말들을 비웃듯이 내뱉었다.

영어를 잘 알아듣는 내 옆의 설경이가 신경쓰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는 미국 친구들은 여전히 큰소리로 웃어가며 불편하고 난처한 마음을 감추는듯 드러낸다. 남편도 그들의 의식없는 행동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자기의 막말 때문에 그 동안 내가 겪은 고초를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겠지.

푸에블로호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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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표정으로 설경이를 쳐다 보니, 의외로 설경이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 바깥에 나와 나는 조용히 설경이에게 그들을 대신해 이해를 구했더니 설경이는 이렇게 말한다.

"저도 저분들의 언행에 순간 마음이 격분했지만, '저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갔지…' 생각하며 이내 마음을 다스렸습네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방식을 따르라'는 말도 있는데 전세계가 미국의 잘못을 비방하고 인정한 사건을, 속으로는 어떨지라도 예의상 저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우리 조국을 완전히 무시한 행동으로 보였습네다. 우리 아바지, 오마니, 친구분들이시고 또 조국을 찿아온 손님들이니 어쩌겠습네까만, 저는 우리의 조국을 무시하는 행동은 참을 수가 없습네다."

우리와 함께 온 일행들은 대부분 퇴직 교수들인데 다행히 우리의 부탁을 잘 이해하고 협조를 하겠다고 한다. 그래도 오늘은 평양에서 맞는 포근한 일요일이다.

프로펠러 비행기에 몸을 싣고 백두산으로

내가 태어나서 말을 하기 시작하며 배운 노래 중 하나가 애국가이다. 아무리 불러도 '동해물과 백두산'은 마르지도 않고 닳지도 않지만 가볼 수 없는 산, 백두산. 내게 백두산은 상상의 산이었지 실제로 존재하는 산이 아니었다.

한때 우리 부부는 남의 땅을 밟고서라도 백두산을 보기 위해 중국 여행을 계획한 적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바라보는 그 산은 장백산이지 백두산이 아닐 것이다'라며 계획을 포기했었다.

평양 순안공항의 비행기 시간표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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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우리는 비행기로 '삼지연' 공항에 내려 백두산으로 간다. 나는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 '백두산 가기 전날 밤은 흥분이 되어 틀림없이 잠을 못 이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나는 차분한 마음이 되어, 상상 속 백두산의 장엄함에 미리 취해 스르르 잠이 들고 있다.

'엄숙한' 자세를 취하고 일어나 로비에 내려가니, 설경이와 방조카는 오늘 점심에 먹을 도시락과 물을 버스에 실어 나르고 있다. '삼지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곧바로 '백두산'으로 향하는데 산 정상에 다 갈 무렵 백두산 봉우리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을 예정이라고 한다.

'백두산을 바라보며 도시락을 먹는다?' 아! 마르고 닳도록, 이제서야 흥분이 되고 가슴이 두근 두근거린다.

평양 순안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방조카가 나보다 더 흥분해 있다. 나는 순간, '이곳 동포들에게도 백두산은 그 언제 가봐도 흥분이 되는 산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방조카가 흥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방조카는 '비행기를 처음 타 본다.'

옆자리에 앉아 휘파람을 신나게 분다.

"휘파람 소리가 신바람나네. 백두산 가서 좋은가 보지?"
"이모, 나 지금…뭐…신나고 떨리고 하디. 비행기를 처음 타니까니."

"비행기 타는 거 재미있을 것 같아?"
"재밌지 않캈나? 하늘을 날으는데… 야, 이거야 뭐 흥분되 죽갔구만."


북한 동포들은 꾸밈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 같으면 비행기 못 타본 게 창피해서라도 잠자코 가만이 있을 법도 한데. 흥분한 방조카가 계속 쉬지 않고 떠든다.

"또 내가 삼지연에서 군대생활을 하지 않았갔시요? 그곳에서의 추억도 많고 보고싶은 사람도 있디. 그 시절 내 상관이었던 분이 아직 그 곳에서 살고 있디. 꼭 뵙고싶은 분이디요. 자상하고 따뜻하신 분입네다. 배도 고팠고 힘도 들었던 시절이었는데 그 상관이 큰 힘이 되어 주셨디. 참, 기리구 백두산에 가면 그곳에서 자라는 '불로초'가 있는데, 만병통치약으로 아주 유명하니까니 이모도 꼭 한 봉다리 사가디고 오시라요. 나도 집사람이 사가디고 오라해서리 꼭 사야해요. 안 기러면 집사람 달래느라 또 양말 꿰지지 뭐."

"꼭 사가. 그래봐야 방조카 해 줄라고 그러는 거지."

혼자 비행기를 타고 백두산에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부인한테 전화를 한다.

"나 지금 공항으로 가고 있디. 알았어, 알았어, 안 잊어먹갔서."

목소리가 들떠서 날아갈 지경이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아이 같다.

세계에서 단 두 대만 남아있는 희귀 비행기

세계에 단 두 대밖에 없다는 옛 소련산 프로펠러 비행기. 비행 가능한 것은 이 비행기 한 대 뿐인데 우리는 이 비행기를 타고 백두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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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니 오십여 명 정도의 한 그룹이 우리보다 먼저 와서 비행기 탈 수속을 하고 있다. '조선국제려행사'를 통해 온 이 단체는 '항공 애호가 동호회' 회원들인데 유럽에서 왔다고 했다. 우리가 백두산에 타고 갈 비행기는 옛 소련에서 생산한 프로펠러 비행기다. 세계에 단 두 대만 남아있는 희귀종 비행기라고 한다. 한대는 이곳 북한에 있고, 다른 한대는 소말리아에 있는데, 소말리아에 있는 것은 관리 불량으로 폐기처리 일보직전이라 날지를 못한단다. 그러니 북한의 이 오래된 프로펠러 비행기가 유일하게 타 볼 수 있는 귀중한 비행기라고 한다.

'항공 애호가 동호회' 사람들이 자신들은 '행운아들'이라며 오늘의 감격스러운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함인지 연신, 쉬지 않고 비행기를 향해 사진을 찍어댄다. 이들은 오로지 이 비행기를 만져보고, 또 타보기 위해 여러 유럽나라에서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저 오래된 프로펠러 비행기에 한 시간 동안 목숨을 맡길 생각에 바짝 긴장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는데, 저들은 비행기를 보고는 "아름답다. 사랑스럽다. 멋지다…"라며 영어, 불어, 독일어로 할 수 있는 감탄사란 감탄사는 모조리 입밖으로 낸다. 이들의 말이 가히 교향곡 수준이다. 그리고 이 비행기를 탈 수 있게 잘 관리해 준 북한 당국에 고맙다는 말과 함께 타 볼 수 있게 돼 영광이라고까지 한다. 저들의 감격적인 비행기 상봉식을 우리는 넋을 놓고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사물을 어떤 마음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이다니… 사소한 상황 속에서 삶의 지혜를 하나 터득했다.


비행기를 처음탄다는 방현수 안내원이 앉아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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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수 조카는 내 옆에 앉아서 자신의 휴대폰에 달려있는 카메라로 비행기 좌석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런 저런 포즈를 취해 가며 찍고 있다. 소위 우리 아이들이 말하는 '셀카 촬영'을 하는 것이다. "나이에 안 맞게 뭘 하고 있는거야?" 했더니, 자기 부인한테 보내주어야 한다며 자신도 조금은 겸연쩍은지 키득 키득 웃으면서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다 찍었는지 조그마한 소리로 부인에게 전화를 건다.

"나, 지금 비행기 안이야. 사진도 몇 장 찍었디 뭐. 다녀오갔시요."

애교스럽게 존댓말을 하며 전화를 끊는다. 금실 좋은 부부가 살아가는 흐뭇한 모습이다.

설경이는 몹씨 피곤한 모양이다. 비행기 안에서 단잠을 잔다. 얼마나 피곤할까. 아홉 명, 그것도 머나 먼 미국 땅에서 온 이 까다로운 사람들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온통 여린 어깨에 울러 메고서… 최선을 다하여 조국의 좋은 모습과 이미지를 심어주려 얼마나 애를 써야하고, 또 신경이 쓰일까. 설경이의 쪼그리고 잠자는 모습 속에서 이 딸아이의 깊은 마음 속을 모조리 읽을 수가 있겠다. 자는 모습이 안쓰럽다.

방현수 조카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이륙을 시작하자 의자의 팔걸이를 손으로 꼭 쥐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희미한 안개빛 바깥세상을 집중해서 노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저토록 골똘히 하고 있을까. 머릿속, 세상을 그려보고 있겠지. 어쩌면 백두산이 아니라 외국여행하는 상상을. 아니면 온 세상이 한데 어우러져 구름처럼 둥실 둥실 떠다닐 수 있을 앞날의 세상을.

평양 순안공항에서 한시간 정도 비행한 것 같다. 삼지연 공항에 도착을 알리는,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억양의 기내 방송이 흘러 나온다. 방조카는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조금 더 탔으면 하는 표정이다. 비행기가 곧 착륙을 한다니까 다시 긴장하는 얼굴이다.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쿵' 하는 소리를 내자 얼른 좌석의 팔걸이를 꼭 잡고 앞만 바라본다.

삼지연행 국내선 비행기 내부. 스튜어디스가 바쁘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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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탄 비행기의 승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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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비행기에서 내려와 본다는 방현수 '조카'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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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베리아 벌판에 도착한듯 5월의 봄 공기가 쌀쌀하다 못해 살갗을 시리게 한다. 왠지 백두산의 천지를 구경할 수 없을것만 같은 실망감이 차가운 고개를 든다. 게다가 오후에는 비가 올 수도 있단다. 설경이는 서둘러 백두산에 가야 한다며 느릿느릿,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얘기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우리더러 버스에 빨리 오르라고 손짓한다.

버스에 탄 남편은 주위에 좀 높다 싶은 봉우리만 보이면 "저것이 백두산이냐"고 방조카와 설경이에게 묻는다. 설경이는 웃으면서, 지금부터 한 시간 정도 숲 속을 달려야 하는데, 그나마 날씨가 좋아야 봉우리를 볼 수 있다며, 백두산 천지 구경은 90퍼센트가 운이라고 한다. 아마 아직도 천지는 얼어있어 올라가도 푸른 천지물은 감상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그 웅장한 전경을 볼 수만 있어도 다행이란다.

백두산 26km를 알리는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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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고도가 높아지며 침엽수림으로 바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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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고도가 높아지며 침엽수림으로 바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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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지대가 높지 않아서인지 우리의 차는 푸른 숲 속을 달리고 있다. 백두산 '26 km' 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인다. 버스는 백두산을 향해 끝도없이 펼쳐지는 침엽수 숲 사이 길을 달린다. 사방이 산이고 도대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표지판이 없다면 같은 곳을 계속해서 빙빙 배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설경이 말이, 이 끝없는 '잇깔나무' 숲을 따라가면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깊은 산 속으로 연결되고, 그 산은 만주로도 연결된다고 한다.

"우리는 이 항일의 역사를 배우면서 자라납네다"

이곳이 바로 일본군과 싸우던 '항일유격대'의 근거지라고 설경이가 설명한다. 5월인 지금도 이렇듯 쌀쌀한데 '모든 삼라만상이 얼어붙는 겨울에, 이런 곳에서 어떻게 그 강력한 일본군에 항거하여 싸울 수 있었는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다. 그저 나라의 독립을 갈망하던 강인하고도 숭고한 그들의 피맺힌 삶과 의지에 내 마음이 숙연해질 뿐이다.

남편이 우스갯소리로 한마디 한다.

"설경아, 나는 따뜻한 여름에는 몰라도 추운 겨울에는 유격대원 못하겠다. 5월인 지금도 이렇게 추운데… 한 칠월에서 구월 초순 정도까지만 하다가 일단 내려가서 지내고… 이듬해 여름 다시 올라와 싸우다가… 9월 초순에 다시 하산해서…."
"'아니, 아버지, 유격전을 한 여름 캠핑하듯 해서 언제 일본놈들 때려 잡고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갔시요?"

"야,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춥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요. 그러니 우리가 그분들을 존경하는 겁네다. 여기가 한 겨울에는 영하 30도를 오르내립네다. 보시다시피 먹을 것이라곤 찾을래야 찾을 수 없습네다. 하물며 겨울에는 말할 것도 없구요."

"설경아, 그런데 이 항일 유격대에는 여성들도 있었다며?"
"그라문요. 어린 소녀들도 있었습네다."

"설경아, 너도 그 때 태어났다면 총을 들고 유격대원 할 수 있었겠니?"
"물론이지요, 아버지."

"얘 인마, 거짓말 하지마. 얼굴이 하얀 게 비실비실해 가지고 유격대는커녕…."
"아바지는 저를 아직 잘 모르시는군만요. 모든 게 정신에 달려 있습네다. 아무리 연약해도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으면 강인한 힘이 나옵네다. 우리는 이 항일의 역사를 배우면서 자라납네다."


북한에서 백두산은, 그냥 추상적인 '민족의 영산'이라든가 하는 곳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의 성지인 곳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나도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만약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과연 나도 총대를 메고 이 밀림 속에서 헤맬 수 있을까?"

지난 4월 평양의 해방산 호텔에서 열병식 맨 앞에 등장했던 여성 항일유격대원들의 행진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했던 질문을 또다시 해본다.

구름이 약간 걷히자 드디어 봉우리들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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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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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너머에 백두산 천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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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는 계속해서 완만한 경사길을 올라간다. 이제는 더 이상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풀만이 자라는 초원 같은 느낌인데 곳곳에 녹지 않은 눈과 얼음이 보인다. 차가 고갯길 하나를 넘어섰다. 안개 같은 구름 속에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대자연의 병풍을 펼친 듯한 '천지창조'의 모습을 드러내니 바로 백두산이었다.

"야, 백두산이다, 백두산이다!"

운전기사가 차를 멈춘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봉우리를 바라봤다. 아무 말이 안 나온다. 구름에 가려 봉우리들만 보이는 것이 "아, '하늘위'의 뫼이로다!"

백두산이 손에 잡힐 듯 차가 달려가다 점점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멈춰 섰다. 운전기사가 내려서 길을 살피더니 더 이상 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내려가 보니 한 50m 정도의 구간이 마치 도로가 물에 잠긴 듯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남편이 마구 우겨댄다.

"아니, 이 구간만 도로를 벗어나 풀 위로 운전해 가면 되는데 더 이상 못 간다니 말이 됩니까? 빨리 갑시다."
"선생님, 저 풀 밑의 땅이 질어서 사람은 걸어갈 수 있는데 차는 들어가면 바퀴가 빠져, 가는 것은 고사하고 나오지도 못합네다."


의심많은 남편이 도로 옆 풀 위의 땅을 몇 번 디뎌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백두산을 허무하게 바라본다. 구름이 거치면서 봉우리들이 땅과 맞닿아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상이 오히려 그 모습을 더 신비하게 그려준다. 게다가 저 위에는 구경조차 하지 못한 천지라는 '하늘의 호수'가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주체할 수 없는 애국심이 솟아올랐다

우리는 갈 수 있을 때까지 걷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손을 잡고 백두산을 바라보며 걸으면서 애국가의 첫 소절을 불러봤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주체할 수 없는 애국심이 용솟음쳐 오르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에 복받쳐 힘차게 불러댔다.

우리나라는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남으로는 제주도에 열대의 야자수가 넘실 대고 불을 뿜던 한라산이 이를 지켜준다. 북으로는 툰드라의 초원 위에 백두산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민족의 에너지를 하늘의 호수에 담고 있다. 어찌 대국이 땅덩어리만 크다고 대국이라 하겠는가. 우리에게는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탕감해 주는' 깊고 넓은 도량을 갖고 있는 국민이 있다.

조국이 통일이 되어 새로운 애국가가 만들어 지게 된다 해도 가사에 백두산만은 꼭 넣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꼭 올림픽 메달 시상식에서가 아니더라도, 애국가를 들으면 백두산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것이 뻔하다.

하산 중에 마주친 유럽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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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 길에 본 백두산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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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산 위에 케이블카 레일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것 같다. 밖이 너무 춥고 바람이 불어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은 뒤 우리는 다시 삼지연으로 향했다. 유럽 관광객들을 태운 세 대의 버스와 마주 쳤다. 설경이가 차에서 내려 '조선국제려행사' 동료인 그들의 안내원에게 상황을 설명해 준다. 그들의 차는 계속 산을 향해 올라간다. 아마 그들도 갈 때까지 가 볼 심산인가 보다.

평화로운 산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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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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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텔로 가기 전 '이명수 폭포'라는 곳에 들렸다. 폭포로 가는 길에 있는 산장식 마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내가 이제까지 본 북한의 시골 마을 중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그동안 지나치면서 늘 봐 왔던 가난한 북한의 시골마을 같지가 않다. 마치 어느 여행 잡지에서 본 듯한, 조그마한 나라의 이름 모를 한 동네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비 온 뒤의 투명빛 공기 그리고 집집마다 밥 짓는 굴뚝의 연기는 새 하얀 물감이 되어 푸른 하늘을 스르르 물들여 간다. 북한의 온 마을이 여기만 같았으면….

폭포는 바위 위로부터 물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위 틈새로 물이 새어나와 떨어지고 있었다. 그림 같은 폭포수에서는 크리스탈 물망울이 쉬지 않고 살아서 굴러내린다. 청명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영락없는 잡지 속의 사진이다. 희귀한 폭포다. 우리나라에는 별 게 다 있었구나. 포근한 한 편의 영상 필름을 본 것 같은 기분으로 오늘 머무를 호텔로 향했다.

천지까지 올라가지 못함을 그 누구보다도 설경이가 제일 안타까워 한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천지를 우리 일행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제 나라의 절경을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소개하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 당연할 테니 말이다. 설경이는 백두산의 천지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온 손님들에게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그 마음 백 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렇게 미련을 남겨두고 가야 다음에 또 이곳에 올 구실이 생기지. 안 그래?"
"8월경에 백두산을 오는 것이 제일 좋으니 그때 다시 오십시오. 정말이지 8월의 백두산 천지는 온 하늘을 담아 놓은 것처럼 푸르고 아름답습네다. 정말 꼭 다시 오셔서 보셔야 합네다. 안 그러면 평생 후회하실 겁네다."


'꼭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손가락 걸고 도장도 찍고 손바닥으로 복사도 해가며 약속을 했다. 다음 번에는 백두산뿐 아니라 함경도에 있는 칠보산도 가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서로 총을 겨눈 군인들끼리의 대화가 이렇게 정겹다니

호텔 마당에서 삼지연 감자를 굽고있는 유럽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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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도착하니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항공 애호가 동호회'사람들이 호텔 앞마당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삼지연 동네에서 캐 온 감자를 구워먹고 있다. 방조카는, "이모 제가 잘 구운 것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하더니 염치불구하고 유럽사람들이 구워놓은 감자 한 접시를 들고 온다.

"이모, 감자는 삼지연 감자 맛이 최고디요. 드셔보시라요. 내래 삼지연에서 군대생활 할 때 감자 많이 훔쳐다 먹었디요."

한 입 베어 먹어 보니 구수함과 달큰함이 입안에서 어우러져 스르르 녹는다.

"방조카가 왜 이 감자를 서리해서 먹었는지 알 것 같다. 정말 맛있네. 나라도 그랬겠다. 이렇게 맛있는 감자만 먹었으면서 군대생활이 뭐가 힘들었다고 엄살을 부렸어?"

이 말을 들은 남편이 가만있을 리가 없지 한 마디 한다.

"조카야, 군대는 아무리 잘 입혀주고, 잘 먹여주고, 잘 재워줘도 항상 춥고, 배고프고, 졸린게 군대야. 근데 자네는 맛 있는 건만 훔쳐 먹었네. 나는 훈련 나갔다가 밭에서 똥냄새 나는 무 훔쳐 먹었어. 지금은 화학 비료를 쓰지만 당시만 해도 밭에다 인분을 뿌렸거든. 똥냄새가 사르르 나는 것 같은데 그런게 다 뭐야, 그냥 베물어 먹었지. 너 지금 이 구운 감자 먹으면서 군소리 하지마, 다 뺏어 버릴거야."
"구운 감자요? 감자를 오데서 굽습네까, 불 피웠다간 큰 일 날라고. 날 감자 한번 드셔 보시라요. 그 떫은 맛이 어떤지."


"가서 날감자 하나 가져와봐, 내가 먹어 볼 테니까."

내가 일어나서 가져오려는 시늉을 하는 방조카의 옷소매를 잡고 자리에 앉혔다. 방조카는 당시 '감자 몇 알이라 해도 인민의 재산'에 손을 댄 생각을 하면 지금도 '량심'에 가책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자 남편이 한마디 한다.

"뭘 그런 걸 갖고 그래. 나는 훈련 나가면 또 뽑아 먹으려고 그 무밭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는데. 자네는 나보다 양심이 있네."

재미있게 듣고만 있기에는 내 마음이 착잡해진다. 저 대화가 어찌 서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의 얘기라 할 수 있겠는가. 마치 한 나라 군대의 다른 부대 출신 군인들이, 서로 자기 군대 생활이 더 힘들었다며 주고 받는 옛 이야기 같아 보여 씁쓸하다. '전방' 삼지연에 근무하는 평양 출신의 군인 방조카가 이모를 찾아 서울로 휴가를 나오면 나는 조카가 좋아하는 '소 육개장'을 끓여 배불리 먹여주는 그런 상상을 해본다. 통일조국을 안타깝게 그려 보면서.

함께 앉아 있는 다른 팀 안내원들은 한국의 군생활 얘기가 새롭고 흥미로운지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듣고 있다. 아마 자신들 생각에 남한은 '자유국가'라서 군대 생활도 '자유롭게 슬렁 슬렁' 하지 않나 생각한 것 같다. '고되고 철저하게 훈련 받는다'는 의외의 얘기에 놀라워한다. 얘기를 듣던 한 여성 안내원 아가씨가 말한다.

"남조선의 남성들은 '련약하다' 생각했는데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그렇지 안갔습네다."
"그렇고 말구, 같은 민족인데. 내가 멋지고 강인한 남한의 남성을 소개해 줄게요.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특별히 좋아하는 스타일은?"

"선생님, 꼭 약속 지키시라요. 선생님 약속 기다리다가 저 결혼 못하는 것은 아니갔지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 보니, 이곳이 백두산인지, 제주도인지 아니면 속초의 한 야영 캠프장인지,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가고 머릿속이 희미해진다.

한 빨치산 소녀의 물 떠먹는 모습에 '뭉클'

손으로 물을 뜨는 빨치산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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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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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삼지연' 이곳 저곳의 기념비적인 장소를 구경 다녔다. 그 중, 내 마음에 깊이 깊이 새겨진 잊지 못할 조각상이 있다. 삼지연 호숫가에 세워져 있는 '한 빨치산 소녀의 물 떠먹는 모습'이었다.

'꿈을 먹고 사는 시절의 어린 소녀가 험한 산속, 일본군을 피해 몸을 숨겨가며 총 칼을 들고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다. 행군 중 불어터진 발을 질질 끌고 호숫가로 다가와 조막만한 손으로 물을 떠먹으려 한다. 지치고 목마른 마음과 몸에 한 모금의 호숫물을 떠마시며 행복의 미소를 짓고 있다'.

내 마음을 에이도록 슬프게 하는 이 앳된 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자꾸만 내 양심을 시험하고 있다.

'과연 나도 저 시대에 태어나 저 동상의 어린 소녀이었다면, 소녀처럼 일본군에 대항해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 빨치산이 되었을까. 아니면, 나도 우리의 일부 선생님들처럼 일본의 '우에노 음악학교'에 가서 음악 공부를 하고 돌아와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군 입대를 종용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을까.'

잠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니 그 어린 소녀의 모습이 살아서 내 마음을 온통 차지한다. 가슴이 아려와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 '나는 저 소녀의 나이에 무엇을 하였던가…' 아무도 보지 않는 캄캄한 이 밤, 부끄러운 마음에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삼지연 스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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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인데도 아침 공기가 초겨울 같다. 오늘은 삼지연 시내를 거쳐 공항으로 갈 예정이란다. 삼지연 시내에 들어서니 스키장이 한눈에 들어 온다. 백두산을 바라보며 스키를 타는 상상만 해도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삼지연은 천혜의 입지를 갖춘 세계적인 겨울 스포츠 도시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든다.

남편 말에 의하면 20년 전 이 곳이 동계아시안게임 개최지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북한은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에 들어섰으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개최권을 반납했다고 한다. 후일 통일 조국에서 다시 동계올림픽을 개최한다면 그 장소는 여기 삼지연이 될 것이 틀림없다.

금강산 관광 재개와 더불어 어서 빨리 백두산 관광을 시작해야 한다. 백두산 관광은 우리 국민에게 관광의 즐거움 뿐만이 아니라 남과 북이 한 민족으로 그 뿌리가 하나라는 것을 가슴 깊숙이 새겨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프로펠러 비행기가 기다리는 삼지연 공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