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속 우수에 찬 그녀는 '평양 스타일'?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5]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 이제 라진-선봉으로
12.09.18 14:17l최종 업데이트 12.09.18 18:09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

삼지연공항에 도착하자 이미 와 있던 항공기 애호 동호인 모임의 유럽 관광객들이 또 비행기에 가까이 가 온갖 찬사를 늘어놓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도대체 옛 소련 구형 프로펠러 비행기의 어느 곳이 아름답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겁이 날 뿐인데...

내가 이 비행기를 보며 겁이 났던 이유는 이 비행기가 프로펠러 비행기치고는 너무 컸기 때문이다. 미국 소도시로 여행을 갈 때,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야 할 때가 있는데, 대부분 작은 소형 비행기였다. 그런데 우리가 탔던 이 비행기는 프로펠러가 네 개나 달려 있었으며, 그 크기는 제트 비행기만 했다. 이 큰 비행기가 앞에 달린 '바람개비' 네 개로 하늘을 난다고 생각해보니 겁이 났던 것.

북한 고려항공의 국내선 프로펠러 비행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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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평양 순안공항에서 이 비행기를 처음 봤을 때보다는 겁이 덜 난다. 이미 올 때 한 번 타 봤으니까. 사실 이·착륙할 때의 느낌은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특히 이륙할 때는 제트 비행기보다 사뿐하게 떠오르는 기분. 느낌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 비행기가 조금은 아름다워 보이기도. 덩달아 나도 비행기를 카메라 앵글 안에 담았다. 나중에 미국 친구들이 이 프로펠러 비행기에 대해 물어보면 어떤 대답을 할지 미리 생각해두면서 말이다. 아마도 내 대답은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It's just so beautiful!'(이건 진짜 아름다워!)

순간, 북한 관광이 마치 이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공산주의 국가, 그 중 가장 '폐쇄적인' 나라로 알려져 있는 북한. 이곳을 여행할 때, 처음에는 무척 겁이 나지만 일단 한 번 와 보게 되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기 때문이랄까.

특히 남한 출신의 외국 국적자는 어려서부터 받은 '반공 교육'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할 것으로 보인다. 돌이켜 보니 나도 거의 종교에 가까운 '반공 세뇌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 여파로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북한 사람들은 실제 뿔이 달리고 얼굴이 새빨갛다고 믿고 있었다(내가 우둔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물론 나 역시 커가면서 '북한사람들이 (생물학적으로) 뿔이 있거나 얼굴이 빨갛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그래도 북한 사람들을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로봇' 같은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어려서 받은 이런 교육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덕분에 북한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러니 나뿐만 아니라 나처럼 '반공 교육'을 받고 자라난 사람들이 잔뜩 겁을 먹고 북한에 오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내 북한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구나'라는 말을 하게 된다. 내가 북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사람들은 내게 '북한이라는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냐'라는 내용의 질문을 많이 던지고는 했다. 나는 서슴없이 이렇게 답하곤 했다.

"북한?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가난한 나라야."

평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남편과 나는 내년 8월, 다시 북한 여행에 갈 것을 다짐했다. 백두산 천지에 오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함경도 칠보산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내 사촌 은영이와 그녀의 가족이 살고 있는 라진-선봉에 '다시' 가기 위해서 말이다.

이번 여행서 우리는 평양을 떠나 옌지(연길)로 가서 육로로 라진-선봉에 간다. 그곳에 가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사촌 은영이 가족이 그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은영이 부부는 무엇 때문에, 안락한 삶을 저버리고 온 가족, 아이들까지 모두 북한에 데리고 가 살고 있는 것일까.

텅 비어 있는 김일성대학... 무슨 일이지?

김일성대학 전자도서관 입구에 붙어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교시.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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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우리는 김일성대학을 참관했다. 북한의 수재들이 모두 모여 있다는 대학에 닿았다. 5월인데, 학교는 텅 비어 있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교직원에게 남편이 물었다.

"아니, 학생들이 거의 보이질 않네요... 지금 여기는 방학입니까?"
"아, 지금 많은 학생들이 로력 봉사 나가 있습네다."
"어디로요?"
"건설현장에 나가 있기도 하고, 모내기하는 데 가 있기도 하고 그렇습네다."


김일성대학 교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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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원에 가는 차 안에서 설경이가 대학교 재학 당시 농촌에 '로력봉사'를 나가 '단고기'(개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우리 일정이 끝나면 농촌으로 '로력봉사'를 나갈 것이라고 했던 게 떠오른다. 그 말을 들으며 손가방에서 BB크림을 꺼내 설경이 손에 쥐여주던 순간 역시 함께 따라온다. 당시 나는 설경이의 이야기를 반신반의했다. 설경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나저나 내게 북한 대학교의 이름들은 참 생소하다. '김일성대학' '김책공대' '김원균 음악대학' 등등. 나도 우리나라 대학들의 이름들이 북한처럼 지어졌다면 어땠을까. '김구대학' '유관순여자대학' '김좌진 육군사관학교' '이순신 해군사관학교' '장영실 공대' '한석봉사범대학' '우륵음대', '김홍도미대' '허준의대'... 제법 그럴싸해 보이는 이름들이 뇌리를 스친다.

유람선에서 바라 본 평양 시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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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대학 참관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대동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점심을 먹었다. 유람선 안에서 바라보는 평양시의 모습들이 햇살을 받으며 물 위를 유유히 행진하듯 지나가고 있다. 유람선을 바라보는 시민들이 대동강변에서 손을 흔든다. 아이들은 배를 쫓아오면서 손을 흔들기도. 추억 속에 아련히 새겨지는 모습들이다.

'내일은 설경이와 방현수 안내원을 데리고 한강에서 유람선을 탈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 모습을 상상해보니 세상이 온통 평화의 빛으로 가득 찬 것만 같다.

2013년 8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다

다시 만난 리인덕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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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에서의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소년학생궁전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뜻밖에 우리가 그리던 사람을 만났다. 차에서 내려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누군가 낯익은 이가 작은 승합차를 닦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지난해 10월, 북한에 처음 닿았을 때 우리를 태우고 다니며 열흘 동안 함께 했던 리인덕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였다. 너무나 반가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소리쳤다.

"당원 아저씨! 당원 아저씨!"
"어, 어, 신 녀사님, 종 손생님(정 선생님)!"
"어머,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미국 손님 두 분을 모시고 왔는데, 지금 소년궁전에 들어가 계십네다. 그러지 않아도 지난달 공연차 오셔서 통화할 때 해방산 호텔에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가 인사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저도 그때 손님들을 모시고 있어서..."


"부인하고 아이들도 모두 잘 있지요?"
"네. 5월에 오신다는 건 회사에서 들었는데 이번에는 단체로 오셔서 큰 차가 동원된다고 해서 다른 동무가 운전을... 녀사님 공연하는 걸 록화중계로 봤습네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저는 녀사님을 지난 번에 열흘 동안이나 모시지 않았습네까. 화면을 보니 눈물이 핑 해가지고..."
"그러셨어요? 있잖아요... 우리 내년 8월께 또 올 예정인데, 그때 회사에 부탁해 놓을께요. 우리 설경이하고 다함께 다녀요."

남편이 얼른 차에 가 과자와 초콜릿 한 봉지를 가지고 왔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다. 왜 북한 사람들은 한 번 만나면, 발걸음을 쉽사리 뗄 수 없는 것인지... 소년궁전으로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니 당원 아저씨는 어서 들어가라며 손을 휘휘 젓는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공연을 보는 내내 내 마음은 마치 박하사탕을 입에 쏙 넣은 듯 환해졌다. 그러나 공연장을 나오는 순간, 가슴이 쓰리고 아파온다. 북한 여행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좋은 것을 보면 볼수록 고통이 배가 돼 뒤따른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조국이 갈라져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냉면 이야기에 가슴이 아리다

두 손으로 공손히 손님의 전화를 받는 식당의 종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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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도착한 식당. 자리를 배정받으려고 기다리는 동안, 한 종업원이 전화로 예약을 받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저리도 공손히 두 손으로 전화를 받는지 예뻐 보여 얼른 카메라에 담아뒀다.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 온갖 정성이 담긴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나온다. 그런데 매번 식단에는 미국 친구들이 좋아하지 않는 요리가 '꼭' 하나둘씩 섞여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들이 싫어하는 요리는 '꼭'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것이라 모두 우리의 차지가 된다는 것. 오늘도 예외 없이 우리 부부의 입맛을 사로잡는 요리가 나왔다. '가자미식해'가 바로 그것. 냄새가 너무 향긋해 바로 먹기 아까워서 접시를 먼저 들고 향을 맡아봤다. 옆에 서 있던 여종업원이 얼른 다가오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뭐가 잘못 됐습네까?"
"아니요. 냄새가 너무 향긋해서 그만..."
"재미동포라고 들었는데, 미국서도 '가자미 식해'를 먹나요?"
"제가 사는 캘리포니아 남부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거기 순대집이 몇 군데 있는데, 그곳에 가면 먹을 수 있지요. 남쪽에서도 즐겨 드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고요."

"순대도, 가재미 식해(설경이는 꼭 '가재미'라고 불렀다... 기자 주)도 모두 함경도 료리입네다."

웨이트레스 아가씨의 말이 끝나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설경이가 가자미식해를 예찬한다.

"오마니, 저는 어려서 아버지 일 때문에 함경도에서 살았습네다. '가재미 식해' 많이 먹었지요. '녹말 국수'를 겨울 김치국물에 비벼 '가재미 식해'에 얹어 먹으면 정말 맛있습네다. '가재미 식해' 말고 명태 식해를 얹으면 더 맛있습네다. 국수가 '어적어적' 씹히는 게 잘 끊어지지도 않아요. 끊어지질 않으니 어떨 때는 다 먹을 때까지 국수를 입에 주렁주렁 매단 채 계속 씹는 거야요."
"어머, 얘, 나도 먹어 보고 싶다. 근데 '녹말국수'는 무슨 국수야?"
"감자로 만든 국수야요."


얘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한마디 거든다.

"당신 많이 먹어 봤으면서 딴 소리하긴..."
"아니, 내가 언제 '녹말국수'를 먹어 봤어요?"
"당신이 좋아하는 '함흥냉면'이 바로 '녹말국수'야. 나도 어렸을 때 부모가 함경도 분들이신 친구네 집에 가서 이북식 '녹말국수'를 먹어 봤는데, 왜 남쪽 식당에서는 가자미식해나 명태 대신 홍어 무침을 넣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당신, 냉면 먹을 때 가위 갖다 달라는 소리 좀 제발 하지마. 설경이 말 들었지? 국수를 다 먹을 때 까지 주렁주렁 입에 매달고 씹을 때도 있다고. 냉면을 가위로 잘라 먹는 것은 꼭 햄버거를 나이프로 썰어 먹는 격이란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냉면 국수를 가위로 잘라 먹는 법이 없다. 지난해 북한에 처음 와 냉면을 먹었을 때도 가위 좀 가져다 달라고 했다가 주위 사람들 모두를 의아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왜 남에서는 함흥냉면이라고 그래요?"
"글쎄... 모르겠네. 함경도 함흥분들이 내려와 만들어서 그랬나..."


가자미식해가 정말 향긋하고 맛있다. 한 점을 입에 넣고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피어난다. 함께 섞여 있는 무 한 점을 입에 넣으니 개운한 맛이 돌아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이렇게 정신없이 가자미식해를 즐기고 있는데, 방현수 안내원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바라본다.

"방 조카는 많이 들었어?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싱글벙글이야?"
"이모가 식해 먹는 거 보고 그렇디 뭐. '이모도 역시 조선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럼 나도 같은 조선 사람이지. 그걸 말이라고 해?"
"긴데 이모, 통일되면 내가 피양랭면 뎡말 맛있게 만들어 줄께. 옥류관 것은 상대도 안 되디, 뭐."


"어머, 방 조카도 음식을 만들 줄 알아?"
"기건 아니고... 집사람이 잘 하디. 한 겨울에 동티미 국물에 말아 먹는 긴데, 꿩고기 국물을 섞어야 돼. 뎡말 맛있디, 뭐. 랭면은 겨울이 맛있디. 꿩도 겨울에 잡아 먹어야 맛있디, 뭐."
"그래, 통일이 되면 나도 꼭 조국에 와서 살테니 꿩냉면 꼭 해줘."

이 말을 하는데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얼른 물 한 잔을 들이킨다. 오늘은 생각치도 않게 냉면이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남북 단일팀, 지난 일로만 두지 맙시다

세계태권도 대회가 열렸다는 평양의 태권도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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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양의 여기저기를 다녀 본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 부부가 가보지 못한 곳들이다. 설경이는 하나라도 더 많이 구경시켜 주고 싶었는지 짜임새 있게 시간 분배를 잘해놨다. 오전에는 북한의 태릉선수촌이라 할 수 있는 체육 거리에 들렀다. 예전에 배구선수였다는 방현수 안내원은 남편과 올림픽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남편이 북한의 '계순희' 이야기를 꺼냈다.

"방 조카, '계순희' 선수라고 알지?"
"계순희 모르면 기게 조선사람인가요."
"한 15년 전에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 때 계순희가 정말 잘했어. 상대였던 일본의 다무라 료코가 진짜 유명했잖아. 한 번도 진 적이 없었고. 그때 계순희가 매트에 올라오는 걸 보니 얼굴이 앳된 소녀 아이인 거야. 16세였나... '아이고, 이젠 죽었구나'라며 망연자실해하면서 중계를 보는데... 한 1~2분 지났나? 계순희가 상대 선수를 매트에 그냥 꽂아 버리는 게 아니겠어? 너무 좋아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다 마시던 맥주를 다 뒤엎고 난리가 났었지."
"그때 대단했디요, 뭐. 인민들도 좋아서 뛰쳐 나오고 했디. 상대가 일본선수니끼니 더 했디 뭐."


"런던 월드컵 축구대회 이야기는 알아?"
"들어서 알디요, 뭐. 나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잘 했다 그러더라고요."

"잘 한 정도가 아냐. 예선에서 강력한 우승후보인 이탈리아를 꺾었고, 8강에 올라서는 포르투갈을 전반에 3-0으로 앞서고 있었어. 그러다가 '유세비오'인지 뭔지 하는 놈이 네 골을 넣는 바람에 5-3으로 지고 말았지."

"그때 그걸 보셨어요?"
"아니, 나도 아주 어렸을 때인데... 뉴스로만 듣다 나중에 세월이 지나고 기록 영화로 일부만 봤지. 그때 북한의 박두익이란 선수가 정말 대단하더라고. 기록 영화를 보니까 세계축구협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박두익 선수에게 '동양의 흑진주'라는 별명을 붙였더구만. 그분 아직 살아계시지?"
"네, 국가대표 감독도 하시고 그랬디요. 이모부, 북남이 합치면 우리나라 정말 대단할 텐데 말입네다. 가끔 국제대회 때 북남의 우리 선수들끼리 맞붙으면 가슴 아파 못 보디."
"그래, 예전에 여자탁구 단일 팀 만들어서 중국을 꺾고 우승했잖아."
"... 뭐, 슬프디요, 뭐."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문득 북의 성악가들이 생각난다. 지난 4월에 북한에 닿았을 때 북한의 성악가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을 기회가 많았는데 실력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언젠가는 남북의 예술인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날이 오겠지...

유럽 분위기 풍기는 유화는 '북한 스타일'?

인상에 남는 만수대 창작사의 서양화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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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에 남는 만수대 창작사의 서양화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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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화촬영소'를 참관한 뒤 '만수대 창작사'로 향했다. 북한 최고의 예술가들이 작품활동을 하는 곳이다.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라고 불리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조선화'를 하신다는 유명한 화가와 사진을 찍었는데, 그분의 존함이 생각나질 않는다. 다음부터는 꼭 수첩에 기록을 해야겠다.

이곳의 많은 작품들 역시 사회성이나 이념적 지향을 내포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중 두 작품이 내 눈길을 끌었다. 서양화인 유화들이 바로 그것. 하나는 한 여성을 그린 초상화인데 우수에 젖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 또한 그녀와 똑같은 감상에 젖어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된다. 마치 내가 그 그림 속의 여인이라는 착각을 하게 한다. 또 다른 작품은 운하를 끼고 있는, 이탈리아의 한 동네 같은 모습을 그린 유화다. 상당히 의외라고 느껴졌던 작품이다. 과연 북한 사람들이 유럽풍의 풍경을 보고 감상에 빠질 수 있을는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북한의 현대미술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평양 근교에 있는 단군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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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단군릉으로 향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무덤을 발굴해 새로 단장을 했다고 하는데, 그 규모가 가히 피라미드급이다. 그 찰나, 남편의 의심병이 이곳에서도 발동해 나는 또 한 번의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남편이 의심하는 부분은 '이 무덤이 진짜냐 가짜냐' '고증은 제대로 했는가'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됐는가' '과학적 검증은 철저히 했는가' 등등. 아... '철이 없으니 겁도 없는' 남편의 의심병과 막말에는 치료약이 없는 듯하다.

차 안에서 본 '민속공원' 건설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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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릉 참관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로 하여금 나중에 평양을 다시 찾고 싶게끔 만드는 건설 현장을 목격했다. 엄청난 부지에 '민속공원'이라는 것을 조성하고 있었는데, 내부는 이미 공사가 많이 진척돼 밖에서도 쉽사리 알아볼 수 있었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끔 대표적인 건축물 모형들을 전시해 놓을 계획이란다. 모형이라고 하기에는 꽤 커보였다. 내년에 다시 들르게 되면 필히 들러보겠다는 다짐을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묘향산에 도착했다. 지난 번에 다녀간 곳이긴 하지만, 우리는 보고팠던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누렸다. '향산호텔' 식당의 다정한 여종업원 아가씨, 서글서글한 벨보이 아저씨, 묘향산 기념품 가게의 순박한 아가씨, 국제친선 관람단의 당찬 해설원 그리고 쑥스러움을 많이 타시던 보현사 스님까지... 지난 10월 여행 당시 만났던 바로 그들을 다시 만났다.

그리던 이와의 만남. 그것은 바로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요, 나눔이요, 사랑이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상대의 마음을 바라보니, 하나 됨에 어긋남이 없다. 사람이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고귀한 비결임을 깨달았다.

우리 일행은 묘향산에서 돌아온 뒤 환송회를 위해 외교관 클럽으로 향한다. 이곳은 지난 10월 여행 때 들렀던 곳이기도 하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우리 부부는 방현수 안내원과 함께 평양시내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호텔을 나와 지하도를 지나니 평양역이 나온다. 역 옆에는 스낵집들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은 지붕이 있는 길가나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맥주를 마시고 있던 한 남성이 우리를 보더니 '조선맥주 한 잔 하시라요'라며 맥주병을 흔든다.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남편은 그들과 어울려 한 잔 하고 싶었는지 자꾸 그 남성에게 눈길을 준다.

방현수 안내원은 "호텔 가서 드십시오"라며 길을 재촉한다. 메뉴판을 올려다 보니 자장면도 있다. 나 또한 동포들과 어울려 길거리 테이블에 앉아 자장면을 함께 먹으며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방현수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스낵집들은 재일동포가 운영하는 가게라고 한다.

평양역에서 듣고 싶은 '서울행... 발-차"

평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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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앞은 여객들로 꽤 분주하다. 한쪽에는 군인들이 군용백을 가지런히 세워 놓고 앉아 있다. "훈련을 마치고 근무지를 배치받고 임지로 가는 병사들 같다"고 남편이 말한다.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남편은 "저 군용백들과 제복 모두 새것인 걸로 봐서 훈련을 마친 신병들 같아 보인다"고 한다. 자기도 신병 시절에 열차에서 내려 꼭 저런 모습으로 역 앞에 앉아 있었다고. 그리고 배가 무척 고팠다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

저 군인 아이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휴전선으로? 아니면 방현수 안내원처럼 삼지연으로? 얼마나 부모님이 보고 싶을까, 또 부모들은 집 떠난 아들이 얼마나 걱정되고 보고 싶을까. 군인 무리 중에는 아주 어려 보이는 아이도 있다. 가슴이 찡한 게 눈물이 나오려 한다. 군인 아이들에게 눈길을 주려고 그쪽을 바라보며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군인들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인사를 했다.

국가가 있으면 물론 군대가 있기 마련.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는 이산가족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가 서로 총을 겨누고 있다. 어찌 우리는 이런 비극 중의 비극을 눈앞에 두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언뜻 들여다본 평양역 내부는 어렸을 적에 봤던 서울역과 비슷해 보인다. 일제 치하 당시 만들어졌던 역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 같았다. 평양역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나는 기차역은 언제나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묻어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방송이 승강장에 달려 있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때, 그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서였기 때문인 듯하다. 장내 방송이 끝나면 열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양역에 서 있으니, 마치 그런 장내 방송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서울행... 발-차... 서울행... 발-차...'

이별의 순안공항... 이제 라진-선봉으로 갑니다

우리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준 외교단 회관의 바텐더와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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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클럽에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한다. 신기할 정도로 가는 곳마다 우리를 기억하는 이들을 만난다. 식당 여종업원들이 깜짝 놀라며 반가운 목소리와 북한 특유의 억양으로 인사를 건넨다.

"다시 뵙게 돼 반갑습네다."
"어떻게 기억하세요? 잊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너무나도 재미나게 웃으시고, 다정히 말씀을 나누셨던 모습이 인상에 많이 남아서 가끔씩 저희들끼리 두 분의 이야기를 하곤 했습네다. 저기 수영장 창가에 앉지 않으셨습네까. 게다가 봄 축전 때 노래하시는 장면을 텔레비죤에서 봤지 않았갔습네까. 얼마나 반갑고 감동스럽던지..."

이곳에 오니 만룡 안내원과 리인덕 운전수 당원 아저씨가 더 보고 싶어진다. 그때 우리는 이곳 식당에서 그동안 한껏 쌓아온 정을 나누며 얼마나 가슴 아린 웃음을 나눴던가... 이 여종업원의 눈에는 내 웃음 뒤에 숨어 있던 슬픈 그림자를 보진 못했을 게다. 그 시절이 떠오르니 다시 가슴이 애잔하게 매어온다. 이제는 설경이와 방현수 안내원, 그리고 용성 운전수 아저씨의 얼굴이 미어지는 가슴에 짙은 그림자가 돼 드리워지고 있다.

이별의 시간은 어김없이 빨리 찾아온다. 엊그제 이곳 평양공항에 도착해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날 희망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는데, 어느새 착잡한 심정이 돼 출국 수속을 하고 있다. 이젠 사랑하는 딸 설경이뿐만 아니라 듬뿍 정을 준 방현수 안내원까지 이곳 북녘땅에 두고 가야 하니 마음이 더 우울해지고 슬퍼진다.

"방 조카, 설경이를 잘 부탁해... 그리고 통일이 되면 '단고기' 어깨에 메고 이모 찾아 서울에 온다고 했지? 약속 꼭 지켜야 해."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고 출국수속대를 통과했다. 눈물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걷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다. 설경이와 방현수 안내원, 그리고 용성 아저씨가 두 손을 높이 흔들고 있다. 우리 일행이 비행기가 서 있는 바깥 문으로 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두 손을 하염없이 흔들고 있다. 슬픔에 지쳐 흔드는 그들의 손이 아른아른거리며 희미하게 보인다.

우리는 베이징행 고려항공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옌지(연길)을 거쳐 함경북도 라진-선봉으로 가기 위해서다. 언제나 그렇듯 북한여행은 상당히 아름답다. 그러나 떠나는 순간, 그 순간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싸여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