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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잘나가던 엔지니어, 북한서 15년 살고있다고?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6] 드디어 닿은 라진-선봉
12.09.22 11:38l최종 업데이트 12.09.22 11:40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라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중국 국경을 넘어 다시 북한으로

다리를 건너며 버스 안에서 본 북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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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 도착한 우리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행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옌지(연길)로 가는 차이나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옌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고속도로를 달려 북-중 국경지대로 향했다.

중국 측 출입국 사무소에서 출국 수속을 밟은 우리 부부는 북한에서 운영하는 버스로 두만강 다리를 건너 원정리 입국사무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북측 안내원이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안내원의 도움을 받아 입국사무소에서 간단한 짐 검사를 받은 뒤 작은 승합차를 타고 라진-선봉으로 향했다.

평양과는 달리 남자 안내원 한 사람만이 운전기사와 함께 나와 있었다. 안내원의 이름은 문호영, 나이는 25세란다. 억양이 평양말과는 달랐다. 이곳이 함경북도니 함경도 사투리를 쓰고 있는 듯했다. 문호영 안내원은 자신이 평양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평양말을 한다고는 했지만, 내 귀에는 뭔가 다른 억양이 뚜렷하게 들렸다. 물론 알아듣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오히려 한반도 끝자락에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우리말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우리가 라진-선봉을 '자유무역지대'라고 부르자 문호영 안내원은 "명칭이 바뀌어 '라선경제특구'가 됐다"며 정정해줬다. 이곳은 북한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입국 비자가 필요 없었다. 우리는 연길에 있는 크라훈(krahun.com)이라는 관광회사를 통해 이곳에 들어오게 됐는데, 미국서 의뢰할 때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관광회사에 제출하는 것으로 서류 절차를 마쳤다. 아무리 자유무역지대라고 해도 그렇지 소위 '폐쇄적'이라고 알려진 북한에 비자도 없이 입국할 수 있다니... 조금은 놀라웠다. 혹시나 해서 한국 국적의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국 국적 소지자를 제외한 모든 나라 사람들이 출입 가능하다'고 한다. 그 점은 평양과 마찬가지였다.

라선(라진-선봉)으로 가는 도로는 비포장도로.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아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느린 속도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많은 것을 천천히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되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문호영 안내원은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중국과 라선을 연결하는 포장도로를 중국 측에서 건설하고 있는데, 곧 한두 달 내로 완공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측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간다. 화물 트럭과 승용차들이다. 중국 관광객들은 개인 차량을 끌고 출입할 수 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마치 북한과 중국이 한 나라가 돼 버린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에, 두만강이 이렇게 좁았구나

북에서 바라본 두만강. 강 건너가 중국이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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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안에서 목격한 주유소. 농민 뒤로 주유소가 보인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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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의 폭은 생각보다 아주 좁았다. 물론 폭이 넓고 깊게 보이는 곳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 폭이 좁고 수심이 얕아 큰 개울 정도로 보이는 곳이 많다. '이래서 탈북자들이 강을 쉽게 건널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흘러간 옛 노랫말 "두만강 푸른 물에..."와는 판이하게 달라 보였다.

라선으로 가는 길에 비친 농촌의 모습은 북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윤택해 보였다. 이곳은 함경북도 오지니 농촌 사정이 몹시 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심지어 길가에서 주유소까지 볼 수 있었다. '중국 관광객들을 위한 것일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창밖을 보고 있는데 문호영 안내원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곧 라진에 도착하면 구리스(크리스) 선생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어머, 부인하고 애들도 함께 나오나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애들도 라진 시내에 자주 나오니까요."

"에휴, 같이 좀 보면 좋겠는데..."
"애들이 안 나와도 나중에 집에 가면 보실 텐데요. 관광 일정표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크라훈 관광회사'와 련계해 오시는 손님들은 구리스 선생 농장에 가서 체험학습인가 뭔가 하는 '로동'을 하루 동안 하게 돼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하루라도 더 빨리 보고 싶어서 그렇죠."

컴퓨터 만지던 그에게 염소를 키우라니

크라훈관광회사 홍보 동영상 중. 동영상은 라진에서 촬영됐다.
ⓒ krah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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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그의 미국 이름이다. 성은 김씨다. 이곳 사람들은 그를 '구리스 선생'이라고 부른단다. 내 사촌 여동생의 남편되는 사람이다. 이번에 우리가 이용한 크라훈 관광회사가 바로 내 사촌동생 부부가 운영하는 회사다. 이들은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라진-선봉에서 살고 있다. 내 사촌동생과 남편, 그리고 슬하에 있는 세 아이들은 모두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재미동포들이다. 크리스의 원래 집은 샌프란시스코이며 그는 버클리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실리콘 밸리의 한 벤처 기업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는 엔지니어로 일한 바 있었다.

지난 1995년, 당시 25세였던 크리스는 북한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뉴스를 듣고 뜻을 함께하는 미국인 친구와 함께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북한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북한을 돕고자 북한 관리들에게 자신들의 전공 분야인 컴퓨터 공학에 대해 몇 시간에 걸쳐 열심히 브리핑을 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북한의 이곳저곳을 돌아본 후 평양에 돌아가 다시 북한 관리들과 모임을 가졌단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황당무계한 것이었다고.

"저... 구리스 선생의 뜻은 잘 리해하갔는데, 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이 아니고 뭐가 필요하시단 말씀이신지요?"
"저... 혹시 염소를 좀 키워 보시지 않겠습네까?"
"염소를 키워요?"

"네, 구리스 선생, 염소 말입네다."
"아니, 우리는 컴퓨터 엔지니어들인데... 그리고 염소는 만져본 적도 없는데 염소를 키우라니요?"
"그러실 줄 알고 우리도 이 제안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네다. 그런데 염소 키우는 일이라는 게 고저 배우면 금방 할 수 있는 일이라 제안해 보는 겁네다."


"아니, 지금 우리한테 염소 키우는 걸 배워서 하라는 말씀이세요?"
"네, 만일 하시갔다면 함경북도에 라선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 인민위원회와 련계해 드리겠습네다."
"저희는 호텔로 돌아가겠습니다."


염소 젖 짜던 크리스, 도로를 내고 전기를 들이다

신해리집 마당에서 작업을 하는 크리스
ⓒ 크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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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온 크리스와 미국인 친구는 한동안 망연자실해 앉아 있었다고 한다. 멍하니 서로 쳐다보다가 내린 결론은 '염소를 키우겠다'는 것. 북한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두 사람은 '그래, 지금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염소지 컴퓨터가 아냐'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미국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염소를 키워 젖을 짜기 위해 미국을 떠나 북한으로 갔다. 이렇게 크리스의 치열한 북한 생활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들은 라진시내로부터 걸어서 두세 시간 정도에 있는 산기슭에 정착했다. 염소를 키우기 위해 길도 없고 전기도 없는 산골에서 엉성한 집을 지어놓고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겨울이 되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옷이란 옷은 모두 껴입고 잤단다.

그들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며 전전긍긍할 때 미국에서 미국인 '염소 전문 수의사'가 크리스의 동포애에 감동해 북한에 찾아왔고 지금까지 함께 살며 봉사하고 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뜻을 함께하고자 하는 미국인 몇 명이 라진-선봉에서 각자의 재능과 실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가고 있단다.

그들이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려 하자 북한 동포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고 한다. 왜냐면 북한 동포들 눈에는 어려움 없이 편하게 살던 사람들이 왜, 열악한 환경에 굳이 들어와 자신들을 희생하며 살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분명 무슨 사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라진 정착 초창기에 크리스 부부는 길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전기도 없는 산골에 집을 짓고 살면서 '이곳에 가장 필요한 것은 전기·도로·운송수단이라고 생각해 도로를 건설했다. 또 버스를 들여다 운송사업을 폈고, 풍력 발전소를 설치해 전기도 들어오게 했다. 지금 이들이 사는 신해리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어촌마을이 됐다. 뒤로는 산이요, 앞으로는 바다가 있는 마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동네임이 분명하다.

"엄마, 우리 언제 NK로 돌아가?"... 충격이었다

신해리 마을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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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부부는 북한동포들이 외부세계로부터의 일시적인 도움에 의존해 살아가는 걸 원치 않았다. 크리스 부부의 꿈은 일자리 창출을 통해 북한동포들이 삶의 질적 향상을 이루고, 북한동포들과 함께 힘을 모아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이번에 이용한 크라훈관광회사 역시 그들의 꿈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라진-선봉을 담당하는 여행사들은 중국에도 많이 있다. 하지만 다른 여행사들은 주로 중국인 관광객을 모집해 들어 오는데, 크라훈관광회사의 고객은 대다수가 미국인, 유럽인, 그리고 해외동포들이라고 한다. 관광객 중에는 라진-선봉에 투자를 목적으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3년 전, 이들 가족이 미국에 왔을 때 잠깐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들이 사는 마을은 '달나라보다 더 멀리 있는 나라'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지만, 관심이 없었기에 이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왜 고생을 사서 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 길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자기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세 아이들은 무슨 죄로 모든 것이 불편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지... 같은 부모로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좋은 환경을 찾아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구렁텅이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크리스 부부가 용납되지 않았다.

한 번은 크리스 부부와 아이들이 남캘리포니아에 있는 우리집에 왔을 때였다. 여섯살 막내 조카가 내 사촌동생에게 "엄마, 우리 언제 NK(North Korea)로 갈 거야?"라고 묻는 게 아닌가. 나는 속으로 '아이들이 북한에 가기 싫어서 저러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 아이들은 자연과 더불어 뛰어놀고, 순박하게 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북한의 이웃들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번 4박 5일의 관광 일정에 크리스 가족이 사는 신해리 마을을 참관하고, 하루 동안 그곳에서 '북한생활 체험 학습'을 한다고 한다. 크리스 가족을 만날 수 있다니... 그동안 긴 여행에 지쳐있던 내 몸과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가 솟구친다. 그저 꿈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