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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3일 오전 11시 30분]

  2004년 6월 12일 서울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열린 6·15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학술토론회 개막식이 끝난 후 참석한 여야 정당 대표들과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김대중 대통령. 이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도 참석했다.
ⓒ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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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선언, 잘 발전시켜 나가야죠."

9년 전의 일이다. 2004년 6월 15일 서울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 2000년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한 6·15남북공동선언 4주년 기념행사에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던 박근혜 대표가 참석했다. 

박근혜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정당 대표들과 가진 티타임 자리에서 "4년 전 당시 평양의 경험들이 아주 생생하다"며 "(6·15선언을) 잘 발전시켜 나가야죠"라고 말했다. 함께 참석한 신기남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은 "박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 곁에 있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며 "박 대표가 전향적으로 협조할 수 있어 희망이 있다"고 분위기를 살렸다.

2002년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대화하고, 2004년 6월 '6·15를 잘 살려나가자'고 말했던 박근혜 대표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돌변했다. 이회창 후보와 당내 경선에서 '보수 우익' 선명성 경쟁이라는 정치함정에 빠진 박근혜 후보는 대북강경입장으로 선회했다. 또한 MB정권 5년간 한순간도 여의도 권력을 놓치지 않았음에도 박근혜 대표는 MB의 역주행, 남북관계 파탄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번 대선후보 토론에서는 '가짜 평화론'을 들고 나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을 공격해 남북관계를 개선해보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의심케 했다. 이렇듯 박근혜 후보는 남북문제, 민족문제에 대한 자신의 소신, 철학을 갖지 못하고, 정치상황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게 사실이다.

박근혜의 약속 지켜질까?... MB도 대선 때는 '햇볕정책' 공감

이제 박근혜 대표는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근혜 당선인은 대선 공약에서 "남북 간 기존합의에 담긴 평화와 상호존중의 정신을 실천하고, 세부사항은 현실에 맞게 조정해 나가겠다"고 했다. 박근혜 후보가 말한 '남북 간 기존합의'에는 남북기본합의서(1991년, 노태우), 6·15남북공동선언(2000년, 김대중), 10·4선언(2007년, 노무현) 등이 있다.

그런 박근혜 당선인에게 김정은 위원장이 육성 신년사를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의 요체는 '6·15와 10·4선언을 이행하자'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11년 전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대화하던 박근혜 당선인을 기억할 것이다. 

언론들은 박근혜 후보의 공약, 즉 "남북 간 기존합의 존중"을 상기하며 양측 지도자들의 교감과 남북관계개선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이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박 당선인이 그렇게 강조한 국민통합, 민족화합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염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번 대선과정에서 남북문제에 대해 보여준 박근혜 후보의 모습이 처음 보는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MB도 똑같이 그랬었다.

6년 전인 2007년 8월, MB는 후보 시절 김대중도서관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왔다. 김 대통령은 이명박 후보에게 "남북이 교류를 확대해야 하고, 돈벌이를 같이 해야 하고, 북한에 들어가 경제를 일으켜야 하고, 철의 실크로드로 진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6자회담을 통해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고, 동북아 안보체제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같은 생각이다" "남북통일이 세계 1, 2위로 가는 관건이다" "한국기업이 북으로 가야 한다"며 김 대통령의 말에 여러 차례 공감을 표시했다. 심지어 "같이 상고를 나와서 생각도 같다"고까지 말했다. 

MB는 김 대통령의 대북정책구상인 '햇볕정책'을 찬동했다. 김 대통령은 이런 이명박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었다. MB정권 초기 김 대통령은 MB가 대북정책만큼은 이전 정부(김대중-노무현 정부)의 6·15와 10·4 등 남북화해협력 기조를 따를 것으로 믿었다. MB의 초기 정책기조인 '실용주의'에 대한 기대였다. 미국, 중국 등 해외에 나가서도 지도자들을 만나 이명박 대통령이 남북관계를 잘 풀어나갈 것이니 한국 정부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상황은 급변했다. '남북기본합의서에 모든 해법이 있다'던 MB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이 그 출발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MB에게는 김대중 대통령의 말대로 "남북관계에 대한 철학이 없었다."(<김대중자서전> 2권 554쪽)  실용주의는 폐기됐다. '비핵·개방·3000'의 기치는 휘날리고, 한국판 네오콘들이 득세했다. MB가 한 일이라고는 청와대 벙커를 찾는 일이었다. 2009년 연초 김대중 대통령은 "공든 탑이 무너졌다, 내가 잘못봤다"며 한탄했다. 결국 MB는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3가지 약속'과 선택의 기로에 선 박근혜

  2012년 12월 28일 청와대 백악실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단독 접견을 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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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오후 김대중도서관에서 이희호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신년하례회가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이 설계한 햇볕정책을 정립한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이 인사말을 했다.

"박근혜 후보는 3가지 중요한 약속을 했다. '첫째는 6·15와 10·4선언을 포함한 모든 남북 간 합의를 존중하겠다. 둘째 남북대화를 시작하겠다. 필요하다면 최고지도자도 만나겠다. 셋째 정치상황에 관계 없이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하겠다.' 이 3가지 약속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다. 우리가 할 일은 박근혜 정부가 이 공약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희망을 갖고 전진하자."

MB에게 한 차례 크게 속고, 이번 대선에서 크게 낙담한 참석자들에게 임동원 장관의 이 말이 어떻게 들렸을까. 기대보다는 걱정과 우려가 많았을 것이다. 남북관계를 30여 년 취재해온 한 기자는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 기사를 쓰고 난 후 페이스북에 이런 심정을 소개했다.

"김정은의 신년사 스트레이트는 대충 마무리 하고, 방송 출연도 끝냈다. 새벽잠을 설쳤더니 피곤함이 몰려온다. 그런데 통일부에서 나온 반응은 '새로운 게 없다'라는 거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게 얼마나 되겠나. 무엇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그건 수용자의 의지에 달렸다. 앞으로 5년도 남북관계는 깜깜하다. 저들을 보니…."

내외의 난관은 많을 것이다. 난관 없는 분단시대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인 우리의 의지와 정책이다. 대외환경에서 예를 들자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네오콘 부시 대통령의 대북강경노선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협력을 유지하며 한발한발 전진시켜나갔다. 반면, MB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한반도 대화 노선 위에 출범한 오바마 정권과 한 짝을 이뤘음에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당사자가, 주인이 어떤 책임감, 방향,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40여 년 동안 갖은 음해를 이겨내면서 남북문제를 자신의 철학으로 다듬어온 김대중만한 신념, 정책 의지, 비전, 정교함을 박 당선인에게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지 모르겠다. 다만, 자신이 국민 앞에 한 3가지 약속만큼은 지키겠다는 의지, 평화와 통일의 민족사를 향해 단 한 발짝이라도 내딛어보겠다는 믿음을 박근혜 당선인에게 기대하고 싶다. 

'박근혜, 6·15, 10·4'라는 키워드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 "6·15와 10·4 지지를 철회하지 않으면 박근혜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주장과 글들이 넘쳐난다. 박근혜 당선인은 자신이 한 3가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들을 먼저 설득해야 한다. 같은 보수진영이니까 진보진영이 집권한 것보다는 설득에 유리할 수 있다. 그렇게 했을 때, 결국 그들의 포로가 되어버린 MB의 길을 택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다. 

박근혜 당선인은 이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자신을 지지했지만, 남북이 대화하고 협력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고, 심지어 6·15와 10·4를 폐기하자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당장 대화 상대에게 삐라를 계속 보내도록 허용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6·15와 10·4의 계승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좌빨'이니 '종북'이니 하는 사람들과의 단절, 선거 때 훌륭하게 여론전에 앞장섰던 자신의 우군들, 이들을 설득하는 일이 급하다. 이들을 두려워하는 순간, 박근혜 당선인은 제2의 MB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로 나가자고 말했다. 다른 많은 약속도 지켜볼 일이지만 한반도 한민족의 미래는 박근혜 후보가 약속한 이 3가지 약속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최경환은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한 마지막 비서관이었다. 지금은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 사단법인 행동하는 양심 상임이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