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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대극장 LG에어컨, 왜 이리 반가울까?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19] 다시 찾은 '삐짜'집과 평양대극장
12.08.16 21:36l최종 업데이트 12.08.16 21:36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오늘도 텔레비전에서는 전날 거행됐던 열병식 장면이 계속 나오고 있다. 나는 '김정은 대장'의 육성 연설에 깜짝 놀랐다. 북한 지도자의 육성 연설을 처음으로 들어 봤다. 연설은커녕 목소리조차 들어 본 기억이 없는 데 말이다.

연설문을 신기하게 듣던 중 내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다시는 인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구절. 제발 그렇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본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 그리고 북미관계의 변화가 꼭 필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국방비를 조금만 줄여도 우리 인민들이 잘살 수 있건만... 미국의 위협이 존재하는 한 우리 인민들은 그 불편을 감수해 나갈 것"이라며 확고한 표정을 짓던 우리 차량 운전기사 아저씨의 모습이 언뜻 떠오른다.

옆에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편도 "평화 체제가 이뤄져 남과 북의 국방비만 줄여도 온 겨레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은 물론, 통일 비용까지도 충당할 수 있을 텐데..."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나 역시도 같은 생각이다.

"'이딸리아 삐짜'가 드시고 싶으십네까?"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푹 쉬란다. 전날 밤, 늦은 시각까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영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평양 시내 구경가자"는 예술단 일행들의 제의도 마다하고 오전 내내 침대 속에만 파묻혀 있다.

북한의 4월은 여전히 싸늘하다. 밤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겨울마저 따스한 캘리포니아 날씨에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전날 밤 '불꽃놀이'에서 긴장 속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벌벌 떨었던 내 몸의 근육과 신경세포들이 놀라 얼어붙었나 보다.

점심 식사 때가 지났다며 김정남 안내원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몸이 힘들수록 억지로라도 뭘 먹어서 기운을 내야 한다"며 "특별히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한다. 남편은 신경 써 주는 게 고마워 일단 로비에서 만나자고 답한다.

로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김정남 안내원은 "두 분께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이시니 저도 기운이 빠집네다"란다. 우리는 뭐라도 먹어서 기운을 차리자며 행선지를 논했다. 논의 끝에 먹으러 가기로 한 것은 피자. 피자가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난해 10월 여행 당시 "꼭 다시 뵙기를 희망합네다"라던 이탈리아 식당 요리사 아가씨들, 정겨운 그들이 보고 싶어서 결정했다. 김정남 안내원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묻는다.

"'이딸리아 삐짜'가 드시고 싶으십네까?"
"네. 지난번 평양에 왔을 때 아주 맛있게 먹었거든요. 저희가 대접할 테니 다른 안내원분들도 다 함께 가자고 하세요. 꼭 우리 팀 안내원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평양에 '삐짜' 식당이 몇 군데가 있는데... 어느 곳을 가셨는지 이름이 기억 나십네까?"
"'해운 이딸리아 식당'이라고 기억하고 있어요."


김정남 안내원은 "피자를 좋아하는 딸에게 확실하게 물어봐야겠다"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아마도 딸에게 우리가 갔다는 식당이 어떻게 생겼는지 묻는 모양이다. 김정남 안내원은 딸과의 통화를 마친 후 전화를 끊으며 우리에게 묻는다.

"딸 얘기가 그곳 말고도 더 맛있는 곳이 있다는데, 이왕이면 새로운 곳으로 가지 않겠습네까?"

또 다른 피자식당에 대한 궁금증도 고개를 들었지만, 우리가 피자를 먹겠다고 결정한 것은 꼭 피자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식당의 요리사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운 이탈리아 식당에 가자고 말했다. 반가운 재회를 고대하면서 자동차에 오르니 마음속 풀 죽은 잎사귀에 생기가 돋는 듯했다.

휴대전화로 아버지 안부 묻는 모습, 한국 풍경이 아닙니다

다시 찿은 '해운이딸리아특산물식당'. 왼쪽부터 운전기사 아저씨, 필자, 김정남 안내원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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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더 반가운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 우리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피자를 굽고 있던 요리사 아가씨들이 우리를 알아보고는 하던 일을 멈추고 펄쩍펄쩍 뛰며 반겨준다.

"또 오시겠다고 하셨는데 빈말이 아니었습네다. 반갑습네다."
"그동안 많은 손님들이 왔을 텐데... 어떻게 우리를 기억하고 있어요?"
"해외동포 손님은 흔치가 않아 잊을 수가 없습네다. 그때 여기서 '이딸리아' 노래도 부르셨지 않았습네까. 동무들과 '언제나 또 오실까'하고 이야기하곤 했지요. 그런데 '봄 축전 공연' 중계화면에 선생님이 나오지 않갔습네까. 모두들 깜짝 놀라 '야! 가수였구나, 어쩐지...'라며 '지금 평양에 계실 텐데 혹시 안 오실까' 했습네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네다."
"아, 그랬군요. 우리도 보고 싶어 일부러 안내원에게 부탁해서 왔어요. 정말 반가워요."
"맛있게 구워드릴 테니 어서 앉으시라요."


정말 순수하고 정이 많은 아가씨들이다. 오늘 '삐짜' 맛은 먹어 보나 마나다.

지난번 먹었던 피자 중에서 가장 맛있었던 피자를 주문했다. 김정남 안내원은 "큰딸이 삐짜를 좋아해서 가끔씩 집에 사가는데 비위가 안 맞아서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냉면을 주문한다. 때마침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찾아갔는지 걱정이 돼 전화한 모양인데 얼마 뒤 "걱정하지 말라우, 약은 잘 챙겨 먹고 있으니까니"란다.

전화를 하며 걷고 있는 여학생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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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편찮으시냐고 물어보니 김정남 안내원은 "심장 쪽 가슴이 아프다"고 말한다. 이어 "이제는 정말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단단히 다짐한다. '딸아이 무서워서' 여러 번 시도를 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고. 김정남 안내원은 "사실 딸아이는 지금도 담배를 끊은 줄 알고 있다"며 두 눈을 찡긋거렸다. 웃는 김정남 안내원에게 "효녀 딸을 두셔서 좋으시겠어요"라고 했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수줍은 표정을 짓는다.

정말이지 이곳도 휴대전화 문화가 빠른 속도로 일반화되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와 딸이 휴대전화로 건강 상태를 묻고, 친구끼리 문자를 주고받는다. 또, 사람들이 <로동신문>을 휴대전화로 읽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동영상을 휴대전화에 저장해 우리에게 보여주기까지 하니 말이다.

오늘은 명절기간이라 식당 안이 꽤 붐비는데, 외국 관광객보다는 북한주민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식당의 무대 위에서 한 꼬마가 춤추며 노래를 부른다. 아이의 엄마가 흐뭇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다. 꼬마의 아빠는 먼발치서 사진을 찍고 있다. 행복한 모습이다. 다른 쪽 테이블에서는 아이의 흥겨운 춤솜씨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 다정히 담소를 나누고 있다. 시켜 놓은 피자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피자를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진솔한 사랑의 고백이라도 하러 온 듯 보인다.

피자식당에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어린이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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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커에서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산타루치아>가 흘러나온다. 얼어 붙어있던 내 근육 세포들이 나른해진다. 아! 북한에도 이런 낭만이 있다니... 북녘의 모든 동포들이 이렇듯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그날을 간절히 소망해 본다.

"5월에 미국 친구들과 꼭 다시 오겠다"며 식당 요리사 아가씨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몸과 마음에 새로운 에너지를 비축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여전히 환하고 걷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생기발랄해 보인다. 남편도 이리저리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김정남 안내원과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기력을 회복했음이 분명하다.

북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화는?

기념품으로 판매되고 있는 화폐개혁 이전의 구화폐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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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 가게에서 산 테이블보를 비롯한 각종 수공예품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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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점에 들러 쇼핑을 했다. 북한에서 쇼핑할 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외국인은 북한 화폐를 소유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바로 그것. 보통 외국여행을 할때 그 나라 화폐를 써 보는 것도 관광의 중요한 부분인데, 이게 북한에서는 불가능하다. 항상 돈을 내려고 할 때면 상점의 직원은 "어느 나라 돈으로 내시겠냐"고 묻는다. 그동안 북한의 이곳저곳 다니면서 느낀 것은 이곳 사람들은 중국의 인민폐를 가장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이 유로(Euro), 다음이 달러다.

북한 사람들조차 호텔이나, 식당, 상점에서 외화를 쓰고 있었다. 주로 중국 인민폐를 낸다. 북한 화폐를 쓰는 사람들도 보이긴 했지만, 극히 드물었다.

상점에 있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중국산이었다. 놀랍게도 미국 제품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마저도 겉 포장지에는 한자가 적혀 있었다. 중국과 활발하게 교역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중국 화폐를 선호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군데군데, 국가가 운영하며 북한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는 곳으로 보이는 화폐 교환소가 보인다. 공식 환율은 1달러당 대충 북한돈 100원. 그런데 화폐 교환소에 붙어 있는 환율표를 언뜻 보니 1달러당 북한돈 4천 원이 넘는 것 같다. 북한 주민들은 다른 환율 계산법을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저런 큰 환율 차이가 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북한에서는 꾸겨지거나 약간이라도 파손된 외화를 받지 않는다는 점. 그 때문에 여행사 안내문에는 '북한 관광을 갈 때는 꼭 깨끗한 돈을 준비해 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덕분에 우리도 이곳에 올 때 새 돈을 준비하느라 이 은행 저 은행을 오가곤 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역시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안내원에게 물어볼까 생각해봤지만, 앞으로 하나하나씩 알게 될 것이라 믿어 그만두기로 했다.

우리가 들어간 기념품 가게는 북한 화폐 개혁 이전에 사용됐던 구화폐들을 기념품으로 포장해서 팔고 있었다. 남편은 구화폐 한 세트를 샀고, 나는 아기자기한 전통 수예품과 인형을 샀다.

평양 달리는 현대 자동차, 놀랍습니다

평양대극장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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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로 돌아오는 길, 내일 공연을 하게 될 '평양대극장'을 지나쳤다. 극장 앞 광장에는 아이들과 가족들이 자전거를 타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휴일을 즐기고 있는 북한 사람들이 보인다. 우리 호텔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 들러보자고 했다. 건물 주위를 돌아보면서 우연히 건물 벽을 쳐다봤는데... 한국의 LG 에어컨 실외기가 달려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평양대극장 건물 벽에 붙어 있는 LG 에어컨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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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본 현대 자동차. 국제녹십자사 차량인 듯하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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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차를 타고 평양을 다니다 보면 가끔 대우나 현대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어떻게 한국의 차들이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라는 놀라움과 의문, 그리고 설렘이 미묘하게 교차했다. 순간적으로 통일된 나라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오늘 평양 대극장의 벽에 LG 에어컨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나니 더욱 더 그런 느낌이 든다. 지난해 10월 북한을 처음 여행할 때 나는 정치나 경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방면에 문외한인 나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경제학을 전공한 남편 역시 북한에 대해 모르기는 매한가지. 게다가 당시 나의 관심사는 '북한의 동포들은 과연 우리와 얼마나 다를까'라는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관심의 영역을 더 넓힐 수 있었다. 열흘간 평양에서만 머무르면서 이곳 사람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떠오른 생각이 바로 '활발한 남북 경제교류'였다. 경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아줌마도 이곳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눈에 훤히 보이는 것들이 있다.

평양의 중심에서 '경제'를 생각하다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어디를 가나 볼 수 있고, 또 구입할 수 있는 중국상품들이다. 나는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질 좋은 한국의 상품들이 진열대의 중국제품들을 밀어낸다면 서로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전화 사업만 해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질의 값싼 노동력. 그동안 북한에 와서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북한의 인건비는 월 50달러도 채 되지 않는 듯하다. 한국 돈으로 6만 원도 안 되는 돈이다. 두 배로 쳐서 100달러를 준다고 해도 월 12만 원을 넘지 않는다. 우리 기업이 해외로 나가는 이유 중 하나가 값싼 노동력 때문이라고 하던데, 세상에 이보다 더 싼 임금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교육을 잘 받아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손재주 역시 좋아서, 하다 못해 뜯어진 옷의 수선을 부탁하면 감쪽같이 그 자리서 해결한다. 말해서 무엇하랴, 우리 민족인데. 그뿐이랴, 말 통하고 먹는 음식 같으며 정서적인 부분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생각에 생각을 잇다 이내 속만 상한다.

가까운 미래에 북한 사람들이 세계 각국을 활보하고 있는 멋진 한국의 자동차를, 요술 방망이같이 질 좋은 휴대전화를, 이곳 사람들도 좋아하는 맛 좋은 라면들과 과자 등을 함께 즐길 수 있길 바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모조리 중국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는 북한의 싱싱한 수산물, 수려하고 오염되지 않은 묘향산, 금강산, 송악산, 백두산의 풍경, 싱그러운 산나물과 맛 좋은 생수들을 남쪽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되길 절실히 바란다. 이런 생각을 하니 가슴 한쪽이 아프게 저리다.

개성의 송악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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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지난 10월에 판문점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면서 지나쳤던 개성공단이 떠오른다. 나는 지금까지 '개성공단은 북한을 전적으로 도와주기만 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남북 경제협력 얘기가 나오면 소위 '퍼주기'라는 말들을 많이 해 자연스레 선입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만일 개성공단에서 우리 기업들이 수년간 월 100달러의 임금을 지불하며 기업 활동을 했다면 이것이 과연 '퍼주기'만 했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기간 값싼 임금으로 생긴 수익만 따져봐도 수십억 달러에 달하지 않았을까 싶다.

호텔로 돌아와서도 내내 생각해 본다. '나 같은 아줌마도 남북경제협력의 엄청난 혜택이 훤히 보이는데, 경제부국 한국의 경제인들이 모를 리 없지 않을까'라고. 정치인들의 지혜와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처음으로 실감해 본다.

이제 그만 생각해야겠다. 내일은 '평양대극장'에서 중요한 공연이 있으니 말이다. 동포들과의 더 깊은 교감을 위해 공연에 집중해야겠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두 눈을 감는다. 지금까지 스쳐 지나간 북한 동포들이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다. 그 미소가 나의 가슴에 파고들어 와 내 입과 눈을 애틋한 전율로 떨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