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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떼 방북에서 '계약 무효선언'까지... 개성공단 10년

서정환 기자 jhsheo@empal.com
1998년 6월16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몰고 북녘 땅을 밟았다. 몇 년 후 이 소떼 방북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라는 두 가지의 답례품으로 되돌아 왔다.

2000년 8월22일 현대아산의 김윤규 사장과 북한 조선 아태위원회 강종훈 서기장이 ‘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개성공단’이라는 용어가 배태되었다. 같은 해에 먼저 성사된 6.15공동선언이 그 산파였다.

그 2년 후인 2002년11월27일 북한은 ‘개성공업지구법’을 공포하면서 구체적인 국내법 정비에 들어갔고 현대아산 역시 그 해 말 공단지역과 배후 도시 등으로 쓰일 부지 2000만평에 대한 토지 이용증을 취득한다. 그때 이 토지 이용증의 유효 기간이 50년이었다.

2003년 6월30일 개성공단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떴으며 이 때부터 불과 일년 반 만인 2004년 12월15일, 생활용품 제조업체 ‘리빙아트’가 사상 첫 ‘메이드 인 개성’ 제품인 ‘개성냄비’를 생산해냈다.

이어 SJ테크, 신원, 로만손, 대화, 삼덕, 태성, 문창 등의 의류, 플라스틱, 피혁 등 경공업 제품 제조기업들이 속속 입주했고 남북경협사무소(2005년10월28일)와 한국통신(2005년12월28일)이 들어섰다. 개성공단 사업은 탄탄대로를 걸었으며 2007년 12월부터는 개성관광도 허용되면서 명실상부하게 남북교류협력의 상징이자 실체로 거듭났다.

작년 말까지 개성공단의 총 생산액이 5억 달러를 넘어섰고, 이곳에서 종사하고 있는 북측 노동자 수도 3만 명에 달했다. 개성공단 조성에 투자된 자본도 1조4000억을 넘었다.

개성공단에 몰려온 먹구름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동시에 개성공단의 창공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비핵개방3000’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는 6.15와 10.4 선언에 관한 명쾌한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다. 특히 작년 11월23일, 남미 순방길에 오른 이명박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로 통일”이라는 메가톤급 충격 선언을 터뜨리자 남북 관계는 급속히 경색되었다.

그 다음 날인 같은 해 11월24일, 북한은 “다음달 1일부로 개성공단 남한 당국자들과 기업의 상주인원을 선별 추방하겠다”며 남측 당국과 기업체 상주인력을 절반으로 축소할 것을 요구하는 이른바 '12.1조치'를 취했다. 이에 더해 개성관광과 경의선 남북철도 운행을 불허하고 군사분계선을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이 개성공단에 대해 취한 최초의 제재조치였다.

이후 한미연합 군사훈련 ‘키리졸브’가 진행되던 2009년 3월9일부터 21일까지 북한은 군통신선을 차단함과 동시에 세 차례에 걸쳐 개성공단 육로통행 제한 조치를 취하는 등 개성공단의 위기는 점점 더 고조되었다.

또한 북측은 지난 3월 30일 남측에 통지문을 보내 현대아산 유씨가 북의 정치체제를 비난하는 등의 행동을 했기 때문에 "관련 규정에 따라 단속.조사한다"고 전달했고, 유씨는 현재까지 북측에 억류돼 조사받고 있다.

북측의 제안에 따라 지난 4월 21일 개성공단에서 남북은 1차 개성접촉을 진행했으나, 북은 ‘6.15를 부정하는 한 6.15의 혜택은 없다’는 논리로 '개성공단 사업을 위해 남측에 주었던 모든 특혜조치들을 전면 재검토'할 것이며, '기존 계약을 재검토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이니 남측이 성실히 응해야 한다'고 통지했다.

그것이 개성공단과 관련된 마지막 남북의 만남이었으며 5월15일, 북한은 ‘개성공단 계약 무효’를 선언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