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3703

철없는 딸의 불평 섞인 '평양'이야기
양영희 감독의 위험한 다큐, <굿바이 평양> 리뷰
2011년 02월 21일 (월) 15:23:03 조정훈 기자 http://onecorea615.cafe24.com/xe/tongilnews/mailto.html?mail=whoony@tongilnews.com

일반적인 가족사는 없다. '일반'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가족이라는 유기적인 사회구성원에 접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삶을 보편적 시각으로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듯 각각의 가족사는 구성원들에게 특수한 역사이다.

개개인의 삶을 보편적 시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여기 또 하나의 특수한 사연을 가진 가족이 있다. 가족의 일원을 북으로 보낸 '재일 조선인' 가족.

해방이후 이념대립과 함께 둘로 갈린 한반도는 한국전쟁으로 서로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시대 징용, 징병, 위안부 등으로 끌려갔거나 고단한 식민지 백성의 삶을 타개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고향인 한반도의 정치상황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었다.

  93703_23466_5513.jpg  
▲ <굿바이 평양> 포스터
5, 60년대를 거쳐 재일동포들은 민단과 총련으로 나뉘며 작은 한반도 대립의 시기를 겪어야 했고 지금도 유효하다.

이런 가운데 북을 조국으로 선택한 재일조선인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조국에 보냈다. 그 이유는 다르나 그들은 가족을 조국으로 보내며 통일조국의 꿈을 키워왔음은 분명하다.

<굿바이 평양>을 만든 양영희 감독의 가족도 다르지 않았다.

9만여 명의 재일 조선인들은 북송 배편에 몸을 실었다. 그 중 3명이 양영희 감독의 오빠들이다.

'조국'으로 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는 없다. 오히려 남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빨갱이'일 뿐이었고 관심 밖 대상이다.

그래도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듯이 뿔 달린 시뻘건 얼굴을 한 늑대가 아닌 이상 그들도 사람임에 틀림없고 각자의 영역에서 살아왔을 것이고 지금도 살고 있다.

양영희 감독의 오빠들도 사람으로 북한의 사회에 적응하며 '북한 사람'으로 살았다.

물론 그들이 마냥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렇다고 불행의 연속을 걷고 있다고 섣부른 판단을 할 수도 없다.

남한이든 핀란드이든 어느 나라에서든 구성원으로 살면서도 만족한 삶을 살 수도 있고 불평만 늘어놓는 하루를 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듯 양영희 오빠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아니 9만 북송 재일 조선인의 삶이 다 그럴 것이다.

이념을 우겨 넣어버린 <굿바이 평양>

그런데 양영희 감독은 북에 살고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불행한 삶'이라는 낙인을 과감하게 찍어 누르고 있다.

전작 <디어 평양>이 평양에도 사람이 산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그녀의 의도는 <굿바이 평양>에서 완전히 어긋났다. 즉 <디어 평양>은 이념색을 제거했다면 <굿바이 평양>은 이념을 우겨 넣어버린 것이다.

평양에 살고 있는 자식들에게 매번 생필품을 보내는 어머니를 자식에 대한 지극정성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미 그녀가 말한 '지극 정성'에는 '가난뱅이들에게 보내는 적선'임이 강조됐다.

평양에서 우울증에 시달리다 죽은 큰 오빠에 대한 연민은 '부적응자' 낙인을 넘어 '북한 사회에 대한 원망'으로 빗나가 버렸다.

조카 선화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며 대견함과 그리움을 나타내려한 감독은 영화 후반부에서 조카와 대화 장면을 '암전'으로 처리하면서 선희를 '억압에 짖눌려 자유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하는 철장에 갇힌 파랑새'로 만들어 버렸다.

거기 평양에 살고 있는 북송교포들이 모두 자신의 오빠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표현방식을 썼다.

이러한 감독의 의도는 원하든 원치않든 북한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홍보수단이 될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미 평양을 '굿바이'한 사람들이 같은 민족으로 같이 살아가야할 사람들과 영원히 '굿바이'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 재일 조선인들이 마치 감독과 같은 생각을 가졌고 자신과 같다는 것을 관객들이 생각하도록 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또 다른 유형의 현대판 '반공'영화

왜 감독은 이런 위험한 시도를 했는가. 리뷰를 쓰는 기자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감독의 말에서 대강 짐작이 갈 뿐이다.

양영희 감독은 "이번 영화는 정치적인 굿바이이다. 저에게 가족을 만나지 말라는 평양에 대한 굿바이이다. 가족과 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라며 "바보같이 입국금지도 당하고 작품을 만들었는데 주인공인 선화도 못 왔구나 하는 식. 지금 그렇게 못하는 것에 대한 평양에 대한 안녕"이라고 말했다.

감독은 <디어 평양>을 만들고 난 뒤 북한정부인지 조총련 기관인지 모르는 곳에서 북한 입국을 금지 당했다. 그리고 만든 작품이 <굿바이 평양>이다.

가족이 살고 있는 평양에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그가 갖고 있는 온갖 불평불만을 영화에 다 쏟아 부은 것이다. 불평의 대상이 가족이 아니기에 북한 정부를 향해 자신의 비판을 여과없이 발산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아버지가 들어주지 않자 바닥에 드러누워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저으며 악을 지르며 울고불고 발로 땅을 구르는 철부지 딸. 딱 그 모양이라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1995년부터 10여 년간 찍었다는 필름이 특수한 가족사 이야기를 넘어 현대판 '반공'영화의 또 다른 유형에 쓰이게 됐다는 점이 아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