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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가 보여준 MB정부의 '北붕괴론 집착'

정지영 기자
jjy@vop.co.kr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미 국무부의 외교전문을 대거 공개해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공개된 문서 중 '서울발' 문서에는 한국 정부가 가진 정보나 생각이 ‘민낯’ 그대로 드러나 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문서 중 한반도 관련한 내용은 어떤 것이 있을까, 또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北 붕괴에 대한 ‘집착’=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에는 한국 정부가 가진 ‘북한 붕괴론’에 대한 집착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우선 한.미 양국이 북한의 붕괴 이후 ‘통일한국’의 전망을 꾸준히 협의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또 이런 협의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나 북한 경제난, 권력 승계 과정의 내부 혼란상에 대한 ‘평가’가 근거가 됐다.

대표적인 것이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지난 7월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 만난 자리에서, 현재 김 위원장이 북한에서 굳건한 통제력을 갖고 있지만 한국의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2015년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같은 전망에는 아무 ‘근거’도 뒷받침돼 있지 않으며 최근 북한을 방문해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났던 인사들이 한 발언과도 충돌한다.

더불어 지난 2월 천영우 외교안보수석(당시 외교차관)은 스티븐스 대사와의 오찬에서 북이 이미 경제적으로 붕괴하고 있으며, 김 위원장 사후 “2~3년” 내에 정치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올해 1월 유명환 당시 외교부 장관도 방한한 로버트 킹 대북인권특사에게 북한 내부 혼란상이 점증하고 있다면서, 그 근거로 다수의 "해외에서 일하는 고위급 북한 관리"들이 최근 남쪽으로 망명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같은 '붕괴론에 대한 집착'은 현 정부의 대북 압박정책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문서에는 “이 대통령이 자신의 대북정책에 매우 만족하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임기 말까지 남북 관계를 동결 상태로 남겨둘 준비가 돼 있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30일 기사에서 흥미로운 평가를 내놓았다. NYT는 북한 붕괴에 대한 대화가 실제 전략 차원보다 ‘희망’에 기초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러한 관측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에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또 정부 관리들과의 ‘인터뷰’에 주로 기초한 이 문서들에 ‘추측’은 상당히 긴 분량을 차지하지만 ‘사실관계(fact)’는 짧은 분량만 차지하고 있다면서, 이 문서가 국무부 문서이지 정보기관의 보고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상당한 '주관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양면적 시선= ‘위키리크스’ 문서에서 두드러지는 다른 특징은 한국 정부가 중국을 ‘양면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정부 관리들은 중국이 현재 북한을 다루는 태도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북한 문제에서 중국의 역할을 기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NYT 보도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중국이 핵을 가진 북한의 현실에 만족해하고 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이 6자회담에서 책무를 다하지 않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즉 북한에 대해 중국이 가진 경제적 지렛대를 적극 활용해 몰아붙이기보다, 현 상황을 유지하는데 급급하다는 인식이다.

더 나아가 천영우 수석이 중국을 "떼쓰는 아이"에 비유하는가 하면, 우다웨이 한반도사무특별대표(중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를 원색적으로 험담한 내용까지 나온다. 그는 우 대표를 중국의 “가장 무능한 관리”, “북한이나 비핵화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오만한 홍위병 출신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새 세대 지도자 그룹’은 한국에 우호적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드러내기도 한다.

정부 당국자들은 지난 2월 스티븐스 대사 등을 만나 “중국의 젊은 공산당 지도부 인사들은 북한을 유용하고 믿을 만한 동맹으로 여기지 않는다”, “중국 당국자들은 한반도가 남한 주도로 통일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이는 북.중 관계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중국 측 발언 중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북한의 2차 핵실험 후 일정한 냉각기를 겪었던 북한과 중국은 올해 '60년 혈맹관계'를 재확인하면서, 양적인 측면뿐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양국 관계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단적으로 김 위원장이 올해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 인터넷판은 지난 1일 스인홍 중국인민대 교수 인터뷰를 실었다. 그는 이른바 ‘중국이 남한 주도의 통일을 원한다’는 발언에 대해 “중국 외교관 발언에 대한 한국 외교관의 전언을 미국 외교관이 인용한 것”이며 “이는 중국 정부가 선언한 입장과 반대되는 견해”라고 평했다.

또 이 신문은 “북.중 간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오랜 기간 지켜봐온 전문가들은 공개된 메모에 담긴 정보 가운데 상당 부분이 철 지난 견해나 희망사항을 담은 ‘디너파티의 잡담’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고 평가절하했다.

◆‘외교적 무능’ 질타 이어져= 당장 야당에서는 한국 정부의 천박한 외교관에 대한 비판이 흘러나왔다. 특히 북한이나 중국에 대한 주관적 판단이 오판을 부르고, 오판이 곧 ‘외교적 무능’으로 이어졌다는 비난이 주를 이뤘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중국을 '떼쓰는 아이'에 비유하고 '중국은 북한을 포기할 준비가 돼 있다' '중국이 한국 주도의 한반도 통일을 지지한다'는 게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현재 인식"이라며 "이런 무능함과 안이함이 북한에 대한 오판을 가져왔다"고 질타했다.

또 미국 측에 북 관련 정보 등을 ‘충실하게’ 보고해온 데 대한 지적도 나왔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는 “한국의 외교.안보 관계자들의 입이 그야말로 물이 줄줄 새는 수도꼭지처럼 외교.안보 관련 내용을 미국 측 인사들에게 누설하고 다닌 것은 도저히 묵과하기 어렵다”면서 “책임 소재를 밝혀서 책임져야 할 일이 있으면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천영우 수석의 '노골적 험담'에 대해선 민주당 김영근 부대변인이 1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리지 못하는 넋 빠진 한국 외교관들의 발언 때문에 국민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근본적으로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문서들이 ‘권위 있게’ 대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위키리크스의 폭로 자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인 존 페퍼 외교정책포커스(FPIF) 소장은 지난달 30일 홈페이지를 통해 "외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냥 그렇게 놔둬야 할 때도 있다"고 전제한 뒤, 위키리크스의 ‘투명성 근본주의’가 한반도 외교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페퍼 박사는 현재 한반도 상황은 "전쟁이 발발한 위험이 매우 높은" 상황이며 이같은 긴장 국면을 완화하기 위해 미국, 중국, 북한 3자가 즉각 비밀회담을 통해 접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그러나 중국이 북한을 의심한다는 내용이 폭로된 상황에서 "북한과 포괄적 협정을 준비하기 위한 비밀협상이 위키리크스의 차후 폭로에 들어있다면 이는 더욱 나쁜 일"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적 석학 노암 촘스키 교수는 ‘데모크러시 나우’와의 인터뷰에서 이 문서가 가진 정보가 "걸러지고 왜곡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주로 아랍과 관련한 외교문서들에 국한해 설명하긴 했지만, 이 문서들에는 말한 것의 일부만이 선택적으로 기록돼 있어 '필터링'의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문서가 "외교관들이 이미 한번 걸러낸 것"이며 "우리는 외교관들이 정보를 얼마나 왜곡했는지도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