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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지역 빨치산 전적지를 찾아
<참관기> 양심수후원회 2010 역사기행
2010년 11월 22일 (월) 12:18:19 김양희 기자 yang275@hotmail.com

양심수후원회가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1박2일간 ‘치열했던 투쟁의 현장을 찾아-충남지역 빨치산 전적지를 찾아’라는 주제로 2010년 역사기행을 진행했다. 이번 역사기행에는 양심수후원회 산하의 기행동아리 옴시롱감시롱 회원들과 전국의 후원회원, 장기수 등 총 40여명이 참여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회원 자녀들부터 94세의 범민련 고문인 박정숙 선생까지 참가자들의 연령대도 다양하다. 다음은 본사 기자가 역사기행 일정에 참가해 동행한 참관기이다. / 편집자 주


   
▲ 기행동아리 옴시롱감시롱의 역사기행(11.6-7) 참가자들이 6.25한국전쟁 당시 재소자들이 단일 장소로서는 가장 많이 학살된 현장인 대전시 산내 골령골 위령비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40여명이 움직이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지 화창한 날씨였다. 단풍놀이가 한창인 때라 관광을 나온 차들도 많았고, 여행객들의 표정도 밝았다.

그러나 회원들은 결코 밝지만은 않은 기행을 시작한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차가 도착한 곳은 골령골, 이곳은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발발직후 대전형무소 재소자 사건과 관련, 20일 동안 3차례에 걸쳐 4900여명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과 경찰의 불법행위에 의해 집단 희생됐다고 밝힌 바 있다.

단일 장소로서 가장 많이 학살된 현장, 골령골

   
▲ 골령골 학살현장을 알리는 표지판, ‘학살’ 글자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됐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한국전쟁 당시 대전이 인민군에 의해 포위됐을 때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은 물론 보도연맹, 일반인 등 4000~5000명이 처형된 곳으로, 단일 장소에서는 가장 많이 학살된 현장이라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랗지만 훼손된 간판이 학살 현장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누군가 일부러 ‘학살’이라는 단어를 페인트로 지워버렸다. 교회의 출입문을 지나서야 마주할 수 있었던 위령비는 더욱 가관으로 누군가 돌로 곳곳을 찍어내 심하게 훼손됐다.

대전형무소 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의 이름으로 전하고 있는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곳, 골령골(대전시 동구 낭월동)은 1970년 7월초,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제주 4.3사건 및 여순사건 관련자 등 정치범과 대전 충남지역 인근 민간인들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끌려와 집단 처형돼 묻힌 비극의 현장이다.

1999년 12월 말 해제된 미국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 문서에는 1950년 7월 초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 1800여명이 3일 동안 집단 총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정치범 외에 민간인이 열흘 가까이 끌려와 총살을 당했으며 희생자 수도 최소 3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많은 수의 인원을 한꺼번에 학살하려니 그 잔혹함도 상상 이상이다. 커다란 구덩이에 재소자들을 앉혀 구덩이를 바라보게 하고 총을 쏘는데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 다리가 위로 서는 등 별 것이 다 있는 가운데 산위에서 돌을 굴려 시신들을 덮었다고 한다.

희생자 수와 잔혹한 학살 방법도 놀랍지만 진실화해위의 조사결과가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이 교회의 사유지라 본격적인 발굴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 더욱 놀라울 정도다.

대전양심수후원회 측은 “70㎝만 파도 해골이 나올 정도인데도 교회가 지금 건물을 세우겠다고 하며 발굴을 막고 있는 상황이다”며 “교회 부지를 사고 싶지만 너무 비싸게 부르고 구청서 협조를 안 해 어찌 손쓸 수 없는 상황이다”고 밝혔다.

장기수 류기진 선생은 “학살사건 비석 글자 하나하나가 얻어맞고 있다. 이는 상식 밖의 비참한 일이다”며 “좌익 우익 구분 없이 민족은 하나로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생가 방문

서둘러 다음 탐방지인 칠백의총을 찾았지만 이미 개장지산을 훨씬 지난 뒤다.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워 순절한 700의사의 유골을 안치한 묘소로 1592년(선조 25) 8월 18일 조헌(趙憲)이 이끄는 의병과 승장 영규(靈圭)가 거느리고 있던 승병이 합군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금산성(錦山城)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했고 이들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든 것이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기념촬영을 마친 회원들은 서둘러 최후의 빨치산 대장이었던 이현상의 생가로 이동했다.

이현상은 한국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로 해방 후에는 남조선노동당의 간부로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주도했다.

‘한국의 체 게바라’,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 ‘남부군 총사령관’ 등 그를 지칭하는 수식어가 많은 가운데 오늘까지도 이현상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에서는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까지 삼십년 세월을 민족의 독립과 계급 해방을 위해 투쟁한 전설적인 영웅으로 떠받드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비현실적인 이념에 경도되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공산주의자로서 그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범죄시해왔다.

이현상은 일제시대, 조국독립의 일념으로 공산당운동에 뛰어든 이래 평생을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위해 지리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빨치산의 전설적 지도자로 전해진다. 북은 그가 죽기 전인 1953년 2월 날짜로 이현상에게 영웅칭호를 내렸으며 지리산으로 영웅훈장을 보냈다고 발표했다. 1968년에는 평양 신미동에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이현상의 묘지를 제 1호로 만들었다. 시신 없는 가묘였다. 이후 북이 제정한 제 1호 열사증을 추서 받았으며 사망 37년만인 1990년 8월에는 다시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어둑해져 이현상 생가의 위치를 찾기 어려울 줄 알았으나 주변에 물어보니 쉽게 알려준다, 학생은 물론 일반인들도 이곳을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나 간신히 찾은 집은 이현상의 생가가 아니라 새로 지어진 집이며 지금 집에 살고 있는 주인은 집만 빌려 살고 있는 것일 뿐, 이 동네 출신도 아니었다. 다행히 마을 어귀에서 만난 동네 주민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현상의 원래 생가는 2층 목재로 지은 집으로 대문이 여러 개 될 정도로 부자였으나 빨치산 지도자로 나서며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1970년대에 그의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시신을 수습해 산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덤을 쓴 지 사흘 만에 누군가 2길이 넘도록 땅을 파 시신을 꺼내 머리와 창자만 펼쳐놓고 가버렸다고 한다, 때문에 지금 있는 그의 어머니의 무덤에는 시산이 모두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와 창자만 있다고.

당사자도 아닌 어머니의 시신까지 훼손하는 역사의 보복이 이어지는 것이 몸서리치게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충남빨치산’

   
▲ ‘충남빨치산’ 강연을 하고 있는 송세영(맨 오른쪽) 선생.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이현상 생가의 참관을 끝으로 첫날 일정은 끝이 났다. 회원들은 숙소에 짐을 풀고 늦은 저녁 식사를 한 후 송세영 선생의 ‘충남빨치산’ 강의를 들었다.

충남빨치산은 무장부대가 6개 부대였으며 한 개 부대 인원이 100~130명 정도로 대략 700여명 정도였다고 추산이 된다. 총사령관 산하에는 정치부와 참모부가 있으며 참모부 산하에는 6개 부대와 실탄, 수류탄을 제조하고 무기들을 수리하는 60여명의 기술자들로 구성된 공병부대가 있었다. 40여명의 통신대, 40여명의 정찰대가 있었고 10여명의 간호사와 3~4명의 의사, 준의가 근무하는 후방병원, 도당 기관지인 로동신문 등 각종 출판물 발행에 필요한 한지공장 5~6명의 동무들과 20여명의 도당학교 소속인원이 있었단다. 이렇게 해 충남빨치산의 초기 인원은 당, 정권기관, 사회단체 인원들과 각 군당 산하 인원까지 합해 총 1200~130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충남과 인접한 전북지역에서도 1200~1300여명이 활동했기에 대둔산 지역을 거점으로 남북 100리 인근에서만 총 2000여명의 빨치산이 활동을 한 것이다.

항일빨치산의 경우 15년을 지속했으나 남한에서의 빨치산 활동은 이동거리가 좁고 조건이 나빠 길어야 3년을 봤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충남빨치산은 각종 전투를 지속하면서 막대한 희생을 당했고 최종적으로는 1955년 2월 28일 살아남아 끝까지 투쟁을 벌이던 이들이 체포를 당하며 그 역사는 끝을 맺었다고 한다.

안학섭 선생의 소내투쟁 회고

   
▲ 대둔산 구름다리를 오르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전날 과음을 한 일행을 위해 아침식사는 콩나물해장국이다. 그러나 이런 행사 준비자들의 배려와는 달리 안학섭 선생은 연신 맵다고 하며 해장국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감옥에서는 자극적인 고추는 물론이고 고춧가루가 있는 음식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일생을 매운 음식을 먹지 않았던 선생에게 해장국은 수저조차 뜨기 힘든 음식이라고 한다.

안학섭 선생은 감옥에 있던 당시를 들려줬다.

전쟁 후 물자가 부족한 시기 감옥 안은 더욱 처참했다고 한다. 음식으로 매일 같이 적은 양의 짜기만 한 멀건 우거지국만 주다보니 재소자들이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이에 안학섭 선생을 비롯한 장기수 선생들은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죽을 각오된 사람만 단식을 하자고 해 처음 367명이 단식을 시작, 마지막으로는 7~8명이 14일 간 물도 안 먹고 단식을 했다고 한다.(이 대목에서 선생은 물은 물론이고 소금에 효모를 먹기도 하는 요즘 단식은 단식도 아니라며 다시 한 번 죽기를 각오하고 한 단식이라 했다. 실제 단식을 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사망을 했단다.)

이레째 되던 날 사람들은 실신하기 시작했고 교도관들은 재소자들이 사망을 할까봐 두려워 억지로 혈관주사를 놓으려 했지만 혈관이 좋았던 건강한 사람도 혈관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미 몸에서는 썩은 냄새가 났단다.

8일 만에 물 한 숟가락으로 입만 축이며 단식을 이어가니 14일째 되던 날 교도소 구내방송으로 “과잉충성이었다”며 처우가 대폭 개선되었다고 한다.

당시 음식이 얼마나 부실했는지 체중 과잉자도 1년6개월 정도 그런 음식을 먹으면 체내 영양이 완전 소진돼 죽는다고 평가됐을 정도였다. 그간은 재소자들의 음식을 차등 지급해 왔다. 즉 밥 크기와 반찬 등의 그릇을 5등분을 해 1등급부터 5등급까지 있었는데 5등식을 없애고 4등식으로 개선이 됐다. 또 모든 죄수들의 등급을 하나씩 높여 실질적으로는 5등급의 밥을 먹던 사람이 3등급을 먹게 됐다. 음식뿐만 아니라 그간 면회, 운동, 목욕 등이 금지됐었으나 단식 후 개선이 됐다. 이 외에도 이후엔 죄수들을 때리지도 않았고 집필허가를 얻어 편지를 쓰는 것이 허용이 되기도 했다. 선생은 이를 두고 ‘피로써 고쳤고 혁명적으로 처우가 개선됐다’고 평가했다.

대둔산 탐방

   
▲ 충남도당 빨치산 지도부가 있던 느티골에서 참가자 전체가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식사를 마치고 상쾌한 아침공기를 가르며 일행은 대둔산을 오르기 위해 케이블카 승강장 앞에 집결을 했다.

호남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대둔산은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과 충청남도 논산군 벌곡면과 금산군 진산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인적이 드물고 나무와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는 데서 대둔산이라 이름 했다. 충청지역에 큰 산이 없는 가운데 대둔산은 산이 험해서 동학농민군을 비롯해 빨치산들이 투쟁을 벌이던 산이라고 한다. 케이블카의 도움을 얻어 꽤 많이 오르긴 했으나 천길 낭떠러지 위에 흔들거리는 구름다리를 비롯, 깎아 지르는 곳에 거의 직각인 삼선계단은 다시 가고 싶지 않을 정도의 무서움을 자아낸다.

단풍이 멋스럽지만 케이블카 덕에 산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오르고 인공적인 조형물에 일행은 쉽게 정을 주지 못하고 그렇게 하산을 재촉했다.

대둔산을 뒤로하고 일행은 충남도당 빨치산 지도부가 있던 느티골로 향했다.

충남과 전북에 걸쳐있는 대둔산은 빨치산의 아성으로 대전일보 1951년 6월 28일자에는 대둔산 일원에 한듬산·313·나팔·해방·압록강·느티골 부대와 군단사령부·공병대 등 1300여명이 빨치산이 있으며 이중 1/3이 무장했다고 실려 있다. 이들은 남로당 충남도당에 소속돼 인근 논산, 금산, 서천, 완주, 익산 등을 넘나들며 투쟁을 벌였다. 군경은 1950년 9.28 이후 이듬해 6월말까지 양촌· 벌곡 지구에서만 사살 2백 여 명, 생포 7백 여 명의 전과를 거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남이자연휴양림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 흔적은 전혀 볼 수 없다.

   
▲ 낙엽놀이를 즐기고 있는 참가자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기자]

서울로 돌아오는 길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에 있는 계곡인 운일암반일암 계곡에 들렀다. 이 계곡은 골짜기가 워낙 깊어서 반나절도 못 가 해가 떨어지거나 구름에 가린 해 밖에 볼 수 없다고 해 이름이 붙었다.

이른 아침부터 등산을 하고 일정이 빡빡한데도 아이들부터 선생들은 모두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밝은 모습이다.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기념촬영을 하기도 하고, 특히 권오헌 선생은 회원의 자녀들과 함께 물놀이로 즐겁다.

류기진 선생은 “빨치산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동안 가슴이 요동쳤다”며 “80이 넘은 이들도 올라오는 훈기를 억누를 수 없는 마음으로 행사를 참가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딸과 함께 참가한 이윤섭 회원은 “가벼운 마음으로 와 많은 것을 배웠다”며 “앞으로 좀 더 열심히 살 것”이라고 말했다.

강의를 맡았던 송세영 선생은 “세월이 흐를수록 당시의 기억을 잊기 쉬운데 단순히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 아쉽다”며 “더 늦기 전에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