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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6․15남북공동선언을 생각해 봅니다
<칼럼> 김진환 건국대 HK연구교수
2012년 06월 18일 (월) 09:17:58 김진환 tongil@tongilnews.com
김진환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지난주에 2박3일 동안 상주, 목포, 순천으로 ‘강연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시절이 아무리 하수상해도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6․15를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참으로 소중한 통일일꾼들을 만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잘못 보았을 수 있습니다만, 갈수록 경색되는 남북관계에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까지 더해진 탓인지 강연을 시작할 때 강연장 분위기나 표정들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평소 강연할 때 우스갯거리를 하며 분위기를 띄우곤 했는데, 왠지 여기서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엄숙함마저 느껴졌으니 요즘 모두 마음이 힘들긴 힘든가봅니다.

그래도 통일일꾼들이 통일운동의 들메끈을 다시 매겠다는 의지를 담아 마련하셨을 강연회에, 변변찮은 강사인데도 초청을 받았으니 ‘밥값’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고 왔습니다. 강연 중에 6․15남북공동선언과 관련해서 드렸던 말씀을 아래에 요약해보겠습니다.

통일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독일은 여전히 구서독 주민과 구동독 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러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일부 주민들은 상대를 가난하고 게으른 동쪽 놈(Ossi), 거만하고 역겨운 서쪽 놈(Wessi)이라고 욕하고 있고, 최근에는 구동독 지역에서 동독 시절에 대한 향수를 뜻하는 ‘오스탈기(Ostalgie)’ 현상도 일상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 한국에서도 지역주의가 심각할 때 “경상도에서는 해태 껌 안 씹고, 전라도에서는 롯데 껌 안 씹는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떠돌았는데, 실제 이야기를 들어보니 구동독 주민들은 담배도 구동독 지역에서만 생산된 걸 핀다고 하더군요. 물론 독일인들이 대외적으로는 20세기 이후 유일하게 ‘평화통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자주 드러내지만, 그러한 자부심과는 별개로 ‘사람의 통일’에는 여전히 힘겨워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서로 전쟁을 치르지도 않았고, 분단 시절에도 풍부한 인적 교류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할 기회를 가진 뒤에 통일했는데도 독일인들이 여전히 상대 지역 주민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입니다. 양독 간 상호 방문자 통계를 보면 1972년 12월 양독관계를 정상화한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 연간 500~700만 명 정도의 서독 주민이 동독을 방문했고, 동독 주민 역시 연간 150만 명 정도가 서독을 방문하다가 1987년 호네커의 서독 방문 이후에는 여행규제가 대폭 완화되면서 서독과 비슷한 수준인 연간 500~600만 명이 서독을 찾았습니다.(염돈재,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평화문제연구소, 2010, 123~124쪽) 그런데도 왜 독일은 ‘제도의 통일’을 넘어 ‘사람의 통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까요?

제 짧은 생각으로는 동서독 ‘제도의 통일’이 단번에, 그리고 사람의 ‘차이’에 대한 고려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독일 통일은 서독이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동독을 정치.경제적으로 단번에 흡수한 통일입니다. 특히 동서독 ‘1:1’ 화폐통합은 서독 자본에게는 동독 지역의 산업과 상업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가 된 반면, 동독 주민에게는 경제적 몰락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얼마 전 읽은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의 글(『한국경제』 2011년 7월 27일)에 따르면 화폐통합 1년 뒤 동독 지역 산업생산은 통합 전 30% 수준으로 폭락했고, 실업률은 7.2%에서 25%로 급증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몇 년에서 몇 십 년 동안 사회주의 체제에서 살아왔던 동독 주민들은 서독의 정치.경제제도, 그리고 그 제도 속에서 살아온 서독 주민들의 가치관, 정서, 생활문화에 순식간에 몸과 마음을 맞춰 가야 했습니다. 독일 통일 과정을 다룬 영화 「굿바이 레닌」을 보면, 동독 시절 대표적 여가였던 ‘TV 발레’가 통일이 되면서 사라진 걸 아쉬워하는 동독 노인들, 통일 이후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자괴심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린 전직 교장 등이 등장합니다. 또한 생활비를 대주는 서독 출신 매형에게 “동독 사람들은 매사 불평불만이 많고 감사할 줄 모른다”고 비난 받고, 화폐통합 과정에서 거만한 서독 은행가 앞에서 분노하는 동독 청년의 모습도 나옵니다. 만약에 동서독이 단번에 통일을 하지 않고, 서로의 가치관, 정서, 생활문화의 차이를 존중하는 통일 제도를 만들어나갔다면 오늘날 통일 독일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그런데 자랑스럽게도 남북한은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와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의 만남 이래 ‘단계적’, ‘점진적’ 제도 통일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 왔고, 마침내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에서 양측 최고지도자가 이를 합의하는데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적, 점진적 제도 통일은 남북한 주민이 서로의 가치관, 정서, 생활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통합해나가는 ‘사람의 통일’에도 좋은 조건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성취와 희망이 바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6․15남북공동선언 2항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독일 민족보다는 늦었지만 그들보다 ‘더욱 좋은 통일’로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집시다. 6.15남북공동선언을 증거 삼아 베트남, 예맨, 독일 등 선발주자의 사례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성실하고 지혜로운 후발주자라고 만방에 자랑합시다.

이 글을 쓰며 조금 살을 붙이기는 했지만 거의 이런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강연회 주최 측에서 강연장을 나서는 사람들 표정이 들어올 때보다 조금은 밝아졌다고 말씀해주시더군요. 통일일꾼들의 표정이 나아졌다면 그게 어디 제가 드린 말씀 때문이겠습니까. 전적으로 6․15남북공동선언이라는 훌륭한 통일 이정표를 만들어 낸 분들 덕분입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제가 이 선언을 더욱 자랑스러워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습니다. 최근에 강연을 다니면서 우리가 그동안 통일을 너무 ‘경제’와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경향이 강했던 건 아닌지 돌아보자는 말씀을 자주 드렸습니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라는 옛말도 있듯이 통일을 해야 하는 인도주의적 이유 또는 인문학적 이유에 좀 더 주목해보자는 제안이었지요.

그런데 6.15남북공동선언을 보면 3항이 인도주의 관련 내용이고(“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하였다”), 4항이 경제 관련 내용입니다(“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어떤 분들은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하겠냐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남북한 주민, 해외에 살고 있는 코리언 디아스포라 등이 일제 식민지배, 분단, 전쟁 등으로 인해 받아온 마음의 상처(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 설령 돈벌이가 안 될지라도 통일은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제 입장에서는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순서입니다.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이 선언의 1항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겠지요. 12년 전 그날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제 딱 6개월 남았습니다. 12월 대선에서 당선될 남한 대통령은 6.15남북공동선언의 역사적 의의와 실천적 지향을 가슴에 새기고 북한 최고지도자와 함께 불철주야 통일을 위해 애쓰는 대통령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진환 (건국대 HK연구교수)

동국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 전에는 민주노동당 통일외교 정책연구원,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객원연구위원 등으로 일해 왔다. 이 밖에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경실련 통일협회 같은 통일 관련 단체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북한위기론: 신화와 냉소를 넘어』(2010), 『민족과 통일』(2010, 공저), 『시련과 발돋움의 남북현대사』(2009, 공저), 『남북관계사』(2009, 공저),『조선로동당의 역사학』(2008, 공저), 『전환기 한미관계의 새판짜기 2』(2007, 공저) 등이 있다. 현재 월간『민족21』에 ‘김진환의 동북아시아 열국지’를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