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47888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전날만 해도 낯설게 느껴졌던 바깥 풍경들이 지금은 친숙한 모습들로 우리를 반겨 준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풍경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파도 소리도, 바닷새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친근해지니 이렇게 잘 통한다. 나와는 상관없이 다른 공간에서 펼쳐질 것만 같았던 장면들은 이제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함께 이 하늘을, 이 공기를, 이 우주의 섭리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이 우주 공간이라는 한울타리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너는 너, 나는 나'가 아닌 바로 '우리'로 말이다. 

   

도로변 논둑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우리 차를 보더니 일제히 손을 흔든다. 나도 두 손을 흔들었다. 어릴 적 시골에 갈 때, 차창 밖으로 보여지던 그리운 장면이다. 마음이 훈훈해진다.

 

설경이가 운전사 당원 아저씨에게 "석왕사 절로 둘러가면 어떨까요"라고 청한다. 고려 말에 세워진 이 절의 풍경이 아름답고 공기와 계곡의 물이 대단히 맑고 깨끗하단다.

 

"먼 곳에서 힘들게 오셨으니 한 곳이라도 더 참관하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네까?"

 

설경이가 우리에게 묻는다. 남편과 나는 사실 피곤해 호텔로 바로 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설경이가 우리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고마워 마지못해 그러자고 했다.

 

그림 그리는 아이들... 사생대회라도 나왔나

 

 석왕사에 스케치 나온 미술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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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따라 제법 들어온 것 같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만 같은 산길 풍경과는 달리 석왕사에 접어드니 어디서들 왔는지 초등학생들과 중·고등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북적댄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고 있는 선생님들의 걱정어린 소리... 계곡에서 가재를 잡느라 흥분한 아이들은 선생님의 걱정을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반대편 느티나무 아래서는 중·고등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석왕사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실력들이 대단해 보인다. 리만룡 안내원에 따르면 이 학생들은 앞으로 미술을 전공할 계획인 '미술 전문반' 아이들이란다. 미술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내 눈에도 '역시, 그러면 그렇지' 뭔가 특별하다 싶었다.

 

관광객이 방문하는 북한의 모든 유적지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현지 해설원이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곳에는 해설원이 보이지 않았다. 설경이가 해설원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자 운동복 차림의 여자 선생님 한 분이 뛰어 온다. 

 

"이 곳을 방문해 주신 손님이신 게지요? 저는 아이들을 인솔해 온 선생님입니다."

 

뚜벅뚜벅 걷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진 것은...

 

 석왕사에서. 왼쪽부터 설경이, 필자, 그리고 안내를 맡았던 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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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산 시민들. 얼굴 표정에 굳은 삶의 의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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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았을 뿐 아니라 석왕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니 이곳을 안내해 주겠단다. 여자 선생님은 친절한 미소를 짓기 바쁘게 석왕사 설명을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동화를 구연하듯 재미있는 말투와 손놀림이 귀엽게 느껴진다.

 

한 번 훑어보고만 가려고 했던 우리는 신바람 나게 설명하는 선생님 이야기에 취해 저 멀리 꼭대기에 있는 작은 암자까지 단숨에 구경했다. 활달하고 유머 감각이 있는 선생님 덕분에 이별의 슬픔도 느낄 새 없이 우리는 정신없이 웃으며 자동차에 올랐다. 북한에 와서 웃으면서 헤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어느새 자동차는 원산시내로 접어들고 있나 보다. 바삐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뜨문뜨문 보이기 시작한다.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나는 그들에게서 초라함과 고단함, 그리고 무력함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모습 속에서 희망을 향하는 간절한 바람이 느껴졌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저들의 소망이 모두 이뤄지길 마음으로 기도한다. 기도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저들의 소망이 곧 나의 소망으로 다가오는 것을 조용히 느낀다. 

 

북한 아줌마들의 관심사는 바로 이것

 

 북한의 아주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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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운동장에서 매스게임을 연습하는 초등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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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원산시의 모습은 친숙하다. 학교 운동장에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남새(야채) 상점 앞에서 속닥 속닥 담소를 나누는 아줌마들의 모습도, 등 뒤에 무언가 잔뜩 지고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친근하게 느껴진다.

   

저 아줌마들은 대체 무슨얘기를 나누고 있을지... 같은 아줌마로서 매우 궁금해진다. 옆에 있는 설경이에게 물어봤다. 이곳 아줌마들의 관심사는 무엇이냐고. 설경이는 첫째가 아이들 교육 이야기라고 했다. 그리고 물론 남편 얘기도 빠질 수 없단다. 설경이네 엄마는 자신과 동생의 뒷바라지 때문에 하던 일(치과의사)도 그만뒀다고 한다.

   

마치 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극히 당연한 대답에 왜 나는 놀라는 것일까. 북한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당과 나라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며, 이들의 관심 또한 당연히 그와 유사한 내용들일 것이라는 내 머릿속 정답은 대체 어디에서 온 오답인 것일까. 머릿속이 퍼즐 조각 마냥 어지럽다.

 

아쉬운 작별... 당분간 호텔은 텅 비어 있을 듯

 

 원산역 박물관에서 원산시를 배경으로. 왼쪽부터 설경이, 필자, 원산역 해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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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래전에 세워졌다는 원산의 동명 호텔에서 하루 자고 가기로 했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운치 있는 호텔인데, 손님이 거의 없는 느낌이다. 우리 팀 다섯 사람과 유엔에서 파견된 유니세프 직원 외에는 다른 투숙객을 보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이 호텔에서 제일 좋은 방에 묵은 것 같다. 넓은 거실과 커다란 책상, 그리고 대형 소파 세트까지... 가구들은 예전의 영광을 추억하며 빛바랜 모습으로 쓸쓸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살포시 서려 있는 냉기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분주한 모습의 생기 넘치는 아침이 기다려진다.

 

아침, 남편이 창문을 연다. 동해의 신선한 아침 바닷바람이 아름다운 햇살과 함께 나의 무거운 심신을 단번에 일으켜 깨운다. 새롭게 맞이하는 오늘이 말할 수 없는 기대감과 호기심으로 설렌다.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갔다. 식당 안에는 우리뿐이었다. 늘씬한 아가씨가 우리를 위해 식사를 가져다 줬다. 그 큰 식당에서 혼자 일을 하고 있었다. 설경이가 들어 오더니 반갑게 아가씨와 인사를 나눈다. 식당 종업원 아가씨는 설경이와 같은 학교를 나온 친구인데 평양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인 원산에 내려와 일하고 있단다. 둘은 한동안 친구들의 안부를 물어가며 이야기를 나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여러 번의 작별인사를 나눴다. 작별을 고했음에도 못내 아쉬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 번 더 나눈 후에야 비로소 호텔 식당에서 나왔다. 결혼한 딸을 남겨 놓고 오는 부모마냥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손을 흔드는 그 아가씨의 모습이 왜 이리도 쓸쓸해 보이는지... 왠지 우리가 떠나고 나면 당분간 호텔은 텅 비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과밭을 보니... 떠오른 곳이 있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옛 원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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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시를 벗어나기 전 우리는 예전의 원산역에 갔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라고 했다. 김일성 주석이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된 뒤 소련에서 북한에 귀국해 이 역에서 평양으로 향했다고 안내원이 설명해줬다. 당시 타고 갔던 기차까지도 잘 보관돼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귀국 후 동지들과 함께 처음으로 회의를 한 장소인 일본식 여관도 역사 유적지로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 사건들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설명하는 해설원 아가씨에게서 더 많은 감동을 느꼈다.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내 나라를 얘기하면서 저토록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해 본 적이 있었단 말인가.

  

짧은 시간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항상 헤어질 때는 섭섭하고 아쉽다. 우리가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눈빛만으로도 정을 나눌 수 있었다.

    

내 머릿속의 북한 사람들은 외계인보다 더 낯선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낯설지 않다. 오랜 시간 보지 못하고 지낸 고향 사람들처럼 반갑다. 되레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사람들에게서는 가끔 낯선 감정을 느낄 때도 있는데... 아마도 미국에서 살면서 체득한 한 박자 느린 느긋한 감정 변화가 부지런히 앞질러 가는 내 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쫓아가기 벅차서 그런가 싶다. 그런 면에서 이곳 사람들은 예전 방학 때면 내려가 만났던 외가 동네 사람들처럼 편안하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감정이기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우리 다시 만납시다"라며 손 흔들며 배웅하는 한복 차림의 아가씨를 뒤돌아 보니 차마 차에 오를 수가 없다.

 

원산에서 벗어나자 길가에 사과밭이 보인다. 갑자기 고향 생각이 난다. 내가 태어난 대구광역시는 사과로 유명한 곳.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사과밭을 볼 수 있었다. 원산은 나에게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 그리고 그리운 내 고향 대구를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도시로 남을 것이다. 

     

차 이름이 뻐꾸기? 거참 재밌네

 

 평양역 앞에 있는 평화자동차의 대형 광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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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보는 도로변 산들은 나무가 없어 쓸쓸해 보인다. 마치 불기둥이 휩쓸고 간 자리마냥 휑하다. 너도나도 이고 지고 가는 저 땔감이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산에 나무가 없으니 홍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그나마 도로변을 따라 활짝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내 마음을 위로한다. 

 

학교가 끝난 시간인가 보다. 어린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종종걸음으로 가고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길 주위에는 집들도 안 보이는데... 어디쯤 집이 있는 것일까. 집으로 향하는 마음을 다리가 따라주지 않는가 보다. 뛰다시피 하는 종종걸음이 거북이마냥 앞으로 쭉 뺀 몸통을 쫓아간다. 그 와중에 자동차를 보더니 반갑다고 손을 흔든다.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살고있는 이 땅을 왜 나는 오랜 시간 외면하고 살았단 말인가. '뿔난 도깨비'들의 나라인 양 금기시하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너무 미안해 울컥 차 오르는 눈물마저 부끄럽다.

 

차들이 점점 많이 다니는 것을 보니 평양이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이곳에서 만들어내는 자동차 이름들이 재밌다. '휘파람' '준마' '뻐꾸기' 등이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이 차의 이름은 '삼천리'다. 외국 이름의 자동차에 익숙한 나는 처음에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지금, 어느새 그 이름이 순박해서 친근하다. 그다지 멋진 모습의 자동차는 아니지만 이름처럼 휘파람을 불며 삼천리를 휘젓고 다니는 듯하다. 소박하고 겸손하지만, 당당해 보이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언제쯤 덩실덩실 춤출 수 있을까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을 기념해 세운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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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조국통일 삼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자동차가 잠시 멈췄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방문했을 때, 나는 김 대통령의 방북 장면을 특별한 감동 없이 봤다. 텔레비전 속에서 열렬히 환영하던 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위선적인 가면은 언제쯤 벗어 던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도 떠오른다. 부끄러운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깨끗한 백색의 한복을 입고 서로를 갈구하듯 팔을 뻗쳐 올린 두 여인의 거대한 조각 속에서 백의민족의 지조와 기개, 그리고 민족애가 물씬 풍긴다. 안내원이 "왼쪽의 여인이 남쪽을 대표하고 오른쪽의 여인이 북쪽을 대표한다"고 설명한다.

 

어느 쪽이 남이든, 어느 쪽이 북이든 아무려면 어떠랴. 그저 한 민족인 것을! 눈기둥처럼 얼어 붙어 있는 조각상이 언제쯤이면 살아나 부둥켜 안으며 덩실덩실 춤출 수 있을까. 어느새 나도 그 텔레비전 속의 한 여인이 돼 그날의 감동을 되새김질 한다. 미래의 한 모습이 돼 다시 보여질 수 있기를 희망 하면서...

 

북적북적... 이곳이 고려호텔입니다

 

 붐비는 고려호텔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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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주한 고려호텔 앞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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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 우리가 묵을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은 평양시의 번화가에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호텔 맞은 편으로는 상점들이 분주히 늘어서 있고, 상점 뒤로는 아파트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세워져 있다. 각양각색의 자동차들도 많이 오가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발걸음 역시 도시적이다. 높은 하이힐에 가죽 핸드백, 그리고 전화를 하면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호텔 안 분위기도 지난 호텔들과는 달랐다. 관광객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커피숍이나 호텔 상점, 로비에 많이 보인다. 생동감이 느껴져서 그런지 내 기분도 살아난다. 기분이 살아나니 입맛이 돈다.

 

 고려호텔 지하식당 앞. 사진을 찍으려 하자 애기 엄마가 환한 미소로 응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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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시간이 기다려지기는 처음이다. 우리는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호텔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호텔 2층에 더 큰 식당이 있는데, 음식은 지하 식당이 훨씬 더 맛있다고 한다. 식당 안은 고급스럽게 잘 꾸며져 있고 많은 사람들로 분주하다. 식당 분위기가 좋으니 음식 맛도 좋을 것이라 기대되기도. 내 생각은 적중했다. 특히 냉면이 맛있어서 국물까지 한 방울도 안 남기고 깨끗이 다 먹어 치웠다.

   

식사 후 안내원들과 그냥 헤어지기 섭섭해 호텔 커피숍에 갔다. 커피숍은 사람들로 가득 차 앉을 자리가 없었다. 중동 지역 사람들로 보이는 외국인들이 많이 보인다. 그 이유인즉, 북한의 휴대전화 사업은 물론 105층짜리 류경 호텔 공사를 이집트 회사가 맡았기 때문이다. 설경이는 이런 이유 때문에 평양시내 곳곳에서 중동 지역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했다.

 

한 땅덩어리, 한 형제인 한국에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휴대전화 회사, 건설회사들이 즐비한데 왜 여러 면에서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는 이집트 회사에게 공사를 맡겼는지 생각하니 속이 상해 머리가 아프다. 앉을 자리가 없어 간단히 음료수 몇 병만 사 호텔방에 올라왔다. 

 

저주했던 이땅... 이제 장막이 걷힌다

 

 차 안에서 본 류경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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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치도 모르고 경제도 모른다. 사상과 철학도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게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싸우며 원수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내 종교적 신념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상대를 용서하라'라고. 하물며 '원수도 사랑하라'고 말이다.

 

예전에는 이 북한 땅을 향해 이런 생각을 가져 보기는커녕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악당들이 사는' '그저 무찔러 없애야 하는' 존재였다. 며칠 간 나는 이 악당들의 땅에서 악당들의 실체를 발견하기는커녕 내 마음속 겹겹이 쳐뒀던 검은 장막을 하나하나씩 걷어치우고 있다. 장막이 걷히기 시작하니 조금씩 희미한 빛줄기가 스며들어온다. 따스한 빛줄기다.

   

오랫동안 헤어져 살았던 형제의 집을 방문하고 보니 헤어져 살아야만 했던 미움도, 서먹한 감정도, 원망의 마음도 이제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운명이 슬프고, 또 서러워 두 손 맞잡고 밤새 울고 싶다. 울고 또 울며 그동안 쌓인 회한을 모두 풀고 싶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가슴이 너무 쓰리고 아파서 잠이 오질 않는다. 빨리 내일의 태양이 내 마음속 축축한 이 슬픔을 말려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