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47489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아침은 내 마음의 어두운 커튼을 활짝 걷어줬다. 발코니 문을 여니 코를 톡 쏘는 신선한 내음이 마음속을 훤히 밝혀 준다. 오늘은 드디어 노래로만 만났던 금강산에 가는 날이다.

   

남편과 나는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준비를 하고 아침식사를 하러 갔다. 식당은 큰 연회를 치르고도 남을 정도로 시원하고 널찍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그 큰 식당 안에는 우리 부부와 유럽 관광팀 몇 명만이 있었다. 우리 몇 사람끼리만 식사하기에 어색할 정도로 식당은 크고 화려하다. 단정한 용모의 종업원들이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기며 음식을 가져다준다.

 

호텔 로비로 내려오니 만룡 안내원과 설경이가 산뜻한 옷차림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잠만 따로 자고 만났을 뿐인데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기쁘다. 바깥에서는 늘 그랬듯이 리인덕 운전사 당원 아저씨가 자동차를 닦고 있다. 말도 별로 없이 수줍은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 준다. 웃는 얼굴에는 건실함과 진실됨이 묻어난다. 

 

산보다 아름다운 금강산 소녀

   

 설경이와 팔장을 끼고 많은 얘기를 나누며 하산하면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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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가는 길에 우리에게 안내를 맡아줄 해설원을 데리러 갔다. 빨간 점퍼를 입은 앳된 소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딸아이 정도로 보였는데, 스무 살이 넘었단다. 볼이 발그스름하며 눈이 초롱초롱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착한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예쁜 소녀의 이름은 전은심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서 설명을 잘 못할 줄 알았는데, 자동차에 타자마자 차분한 목소리로 금강산에 대해 줄줄 설명을 시작한다. 아름다운 금강산에 대한 자부심이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느껴졌다.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동그란 두 눈을 힘줘 뜨고 설명을 듣는 내내 소녀의 자부심이 전해진다.

   

내 입가에 왠지 모를 흐뭇한 미소가 피어난다. 금강산의 모습보다도 내게는 이 소녀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금강산의 수려한 절경 속에 빠져 이 순간만은 어떠한 원망도 미움도 슬픔도 아쉬움도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다. 그저 자연의 초연함과 아름다움에 겸손해질 뿐이다.

 

북한에서 <타이타닉>을 봤다고?

 

 금강산 계곡에서. 왼쪽 부터 남편, 금강산 해설원 전은심, 필자, 여성 안내원 설경이, 남성 안내원 리만룡.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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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훨훨 날아오르고 싶으나 나이가 잘 따라주지 않는가 보다. 금강산에 들어가는데, 힘들어하는 기색이 우리 두 부부 얼굴에서 나타난 모양이다. 설경이는 팔짱을 끼며 부축해주고, 금강산 해설원 소녀는 남편을 부축한다. 오랜만에 팔짱을 껴 본다. 다정함이 느껴진다.

  

설경이와 나는 금강산을 내려오는 내내 팔짱을 낀 채로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남자친구와의 결혼 준비 이야기, 그리고 우리 아이들 이야기와 설경이네 부모님 이야기... 그중에서도 영어가 전공이었던 설경이가 대학수업 시간에 본 영화 <타이타닉> 이야기는 우리 둘 모두를 영화 속에 다시 한 번 흠뻑 빠져들게 했다. 덕분에 힘들 새 없이 하산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왔을 무렵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가만 있어봐... 여기가 북한인데, 이 아이가 <타이타닉>을 봤다고?' 내가 깜짝 놀라 "그 영화를 어디서 봤다고? 수업시간에 봤다고?"라고 묻자 설경이가 답했다.

 

"네. 영어시간에 그 영화를 교재로 썼습네다. 그런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습네다."

   

그렇다. 설경이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며 하산하는 동안 나는 여기가 북한이라는 것과 설경이가 북한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설경이와 <타이타닉> 영화 얘기를 하면서도 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야 '이 아이가 어떻게 그 영화를 볼 수 있었단 말인가'라고 의아해하며 제정신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움보다, 지금 내 눈은 남편을 부축하며 함께 걸어가던 현지 해설원의 모습, 그리고 내 머릿속은 방금 설경이와의 나눴던 정담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남쪽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산 밑에는 시원한 음료수들과 고소한 지짐이가 갈증과 허기진 배를 채우고 가라고 유혹한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목란관'이라는 식당에서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고소한 냄새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식이라고 위로하면서 먹고 가도 되겠다는 정당성을 마련했다. 산행 후 맛본 대동강 맥주와 녹두 지짐이는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순식간에 달려든 아가씨들... "사진 찍읍시다"

 

 목란관 식당 앞에서. 식사도 하기 전에 남편은 이미 대동강 맥주에 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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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배를 움켜쥐고, 목란관에 닿으니 오색 금강산 나물들이 한 상 차려져 있다. 이곳에서 먹은 산도라지와 고사리, 그리고 녹두묵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다. 특히 산도라지의 향 내음은 금강산을 온통 품은 맛으로 기억될 것이다.

 

금강산의 내음에 취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오려고 할 때, 어디선가 유니폼을 차려입은 발랄한 아가씨 세 명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목란관 기념품 상점'이라고 쓰인 작은 건물에서 말이다. 그들은 다름 아닌 기념품 가게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은 너무 반가워하면서 같이 사진을 찍자고 자신들의 카메라를 들이민다. 순간 '이들이 무슨 일로 우리에게 이러는 걸까?'라며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북한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사진 찍자고 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순간 당황해 내 마음의 방패막이로 반사시켜 버린 그들의 마음을 다시 살펴봤다. 다시 보니 반가움과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자 하는 게 보였다. 우리가 금강산의 호텔에 처음 도착했을 때 차문을 열어주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남한의 관광객들을 진심으로 그리워 하던 그 아저씨 말이다.

 

사진을 찍자마자 세 사람이 카메라에 고개를 들이대며 잘 나왔는지 들여다본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리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활짝 열린 가슴으로 나 또한 기쁘게 사진을 찍었다. 한 아가씨가 잠시 숨겨놨던 내 '당혹감'을 눈치챘는지 "남조선에서 오셨나요?"라고 말을 붙인다. 설경이가 "미국에서 오신 동포이십네다"라고 답하니 그 아가씨가 말을 잇는다.

 

'너희는 절대 서로 총을 겨누지 말거라'

 

 함께 사진 찍기를 원했던 기념품상점 아가씨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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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에 휴가 온 북한의 한 가족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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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요즘은 남조선 관광객들이 전혀 오지를 않습니다. 오랜만에 우리 동포들을 보니 너무  반가워서... 전에는 남조선 동포들이 수도 없이 왔는데, 그때는 곧 통일될 줄 알았어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북한의 주민들이 정말로 '민족 통일'을 갈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나는 북한에 오기 전까지 통일이라는 것에 관심은커녕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말투며 행동거지가 우리 남한의 발랄한 젊은 딸들을 보는 것 같아서 한층 더 친근한 마음이 든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찍는 게 그저 젊은 우리 아이들 같다. 아가씨들은 "같이 사진을 찍어줘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한다. "우리도 너무 좋았다"며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내 등이 슬펐다. 뒤돌아보니 계속해서 세 아가씨가 "또 오십시오"라며 손을 흔든다. "그러겠노라"는 지킬 수 없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하염없이 손만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기념품 가게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자동차로 돌아오는 길에 소풍을 즐기는 여러 명의 가족들을 발견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빠와 엄마 앞에서 노래와 춤을 추며 아이들이 재롱을 부린다. 보기 좋고 행복한 모습이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귀중한 모습이라 얼른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애기 아빠가 선뜻 응해준다. 남편과 내가 아이들을 무릎 위에 앉히고 포즈를 취하며 마음속으로 아이들에게 속삭였다.

 

'남북의 사랑스런 아이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서로 총을 겨누지 마라. 손에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행복의 노래를 아름답게 부르거라.'

 

 금강산 인근에 있는 삼일포에서 호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금강산 해설원 전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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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에서 내려와 우리는 근처에 있는 삼일포라는 호수에 들렀다. 금강산 해설원 소녀는 삼일포에 얽힌 역사적 사연들을 우리에게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열심히 설명한다. 사실 나는 삼일포에 얽힌 역사적 설명보다 곧 헤어질 것을 생각하며 금강산 소녀의 사진만 열심히 사진기에 담았다. 차분하고도 정겨운 그 목소리와 선한 눈빛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금강산의 예쁜 소녀와 작별할 시간이 다가왔다. 몇 시간 동안의 만남이 이리도 가슴 깊이 새겨졌을 줄이야... 우리 부부는 자동차에서 내리는 소녀를 꼭 안아줬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작별의 인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애써 미소 지었지만, 가슴 속은 이미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자동차가 모습을 감출 때까지 소녀는 손을 흔든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던 내 마음속의 금강산이 선명한 색상의 사진이 돼 머릿속 사진첩에 간직됐다. 그 사진 속에는 헤어지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던 예쁜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가슴이 또 미어져 온다. 어째 이 여행은 눈물의 연속이다.

 

'전마선'을 마주하다

 

 동해안의 어촌마을. 포구에 전마선들이 보인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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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동해바다를 끼고 자동차가 산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작은 목선들이 정박하고 있는 포구가 보였다. 노려 보듯 포구를 바라보던 남편이 갑자기 설경이에게 물었다.

 

"저 배들이 혹시 '전마선'이라고 부르는 배들인가?"

"네, 맞습네다."

"아... 아주 작구나. 아... 저걸 타고..."

"저걸 타 보시고 싶습네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가끔 이곳 동포들이 저 작은 배를 타고 남으로 내려와. 우리가 여기 오기 바로 전에도 저 전마선을 타고 한 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함경도 어진가를 떠나 남으로 가려고 했는데, 파도에 떠밀렸다지. 그 사람들은 일본 앞바다에서 구조됐는데... 지금 일본에 있는지 아니면 남으로 갔는지 뉴스를 못 봐서 모르겠네."

 

남편이 탈북자 이야기를 꺼내자 나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천진난만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속이 없다고 해야 할지... 사실 남편은 마음에 있는 말을 서슴지 않고 마구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북한에 가기 전에 시어머님께서 했던 말씀이 떠올랐다.

 

"얘야. 아범 입조심 단단히 시켜라. 괜히 가서 변이라도 당하지 않게. 아이고, 나는 불안해서 못 견디겠네... 아니, 갈 데가 없어서 북한으로 관광을 가?"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남편이 본격적으로 탈북자 이야기를 설경이에게 계속한다.

 

"남으로 온 북한 동포들을 탈북자라고 부르는데, 지금 남쪽에 약 2만 명 이상이 살고 있대."

"그 사람들은 남에서 잘 살고 있습네까?"

 

"우리는 미국서 살고 있으니까 잘 몰라. 주로 인터넷에서 그 사람들의 소식을 듣는 정도인데, 한 사람당 미국 돈으로 한 2만 달러 정도의 정착 지원금을 받는 것 같아. 일부는 그 돈으로 잘 정착해 살기도 하고, 일부는 갑자기 돈이 좀 생기니까 흥청망청 써 버리고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야. 그중 몇몇 사람들은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왔다'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극소수지만 제3국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있대. 그럴 거면 무엇하러 고생하며 내려갔는지."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그렇지 고향만 하겠습네까?"


설경이는 전혀 놀라지 않고 차분한 반응을 보여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남편이 그저 이 정도에서 멈췄으면 하고 있는데... 남편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북한식 '사교육'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작은 고깃배.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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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남쪽은 경제적으로 잘살고 있거든.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시골에 가도 집에 차 한 대씩은 다 갖고 있어. 대중교통이 세계에서 제일 잘 발달돼 있는데도 말이야. 그래도 사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아. 아파트, 자동차 등 매달 나가는 돈이 많아. 또 학비도 많이 들어. 특히 학교 공부 외에 따로 공부를 더 시키는데, 그걸 '과외' 또는 '사교육'이라고 불러. 거기에 돈이 많이 들어가. 우리 민족은 교육이라면 껌뻑하잖아."

 

"여기서도 학교 공부 외에 더 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돈을 주고 하는 경우는 없습네다. 주위에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는데 고저 때 되면 선물하는 정도입네다."

 

"하여간 탈북자들이 살기에 쉽지 만은 않을 거야. 특히 사회주의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거야. 남에서는 모든 걸 자기가 혼자 감당해야 하니까. 게다가 탈북자들이 북에서 받은 교육이라든가 경력이라든가 이 모든 것들이 남에서는 인정 받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많은 탈북자들이 자기 전공분야를 살리지 못하고 막노동을 하는 것 같아. 물론 북에서 교육을 높게까지 받은 탈북자들이 많지는 않다고 하던 걸."

 

"그런데, '막노동'이란 무슨 일을 하는겁네까?"

"응. 소위 3D 업종이라는 것인데... 설경이도 영어를 잘 하니까 금세 이해할 거야. Difficult(힘들고), Dirty(더럽고), Dangerous(위험하고)의 첫 영어 글자를 따서 3D 업종이라고 부르는데, 말 그대로 고생은 있는 대로 하고 돈은 적게 받는 일을 막노동이라고 불러. 예를 들어 청소일, 공사장이나 공장에서 하는 힘든 일, 고기잡이 배 타고 하는 일..."

 

"저는 리해가 잘 되질 않습네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든 보상도 다 비슷하고, 또 힘들고 위험한 로동을 하는 인민들은 오히려 존경을 받으니까 말입네다. 많은 영화나 노래들이 그들을 위해 만든 것들입네다. 물론 여기도 가능하면 편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경향은 있습네다. 무슨 일을 하든 보상에 차이가 없으니까.

 

치과의사였던 우리 어머니와 제가 조선려행사에서 처음 받았던 월급이 거의 차이가 없었습네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외국 관광객 안내원일도, 뭐 이 일이 편해서 하는 것은 아니고 고저 제가 외국어를 좋아하다 보니까 하게 됐는데 보상은 다른 일과 별로 차이가 없습네다. 게다가 광부들이나 어부, 공장의 로동자들, 이런 일꾼들을 위해서 만든 노래나 영화는 수도 없이 많지만 우리 외국 관광객 안내원들을 위해 만든 예술작품은 하나도 없습네다. 우리도 나름대로 조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봉사하고 있는데 말입네다."

 

설경이가 웃어가며 자기들의 노고에 대한 노래나 영화는 없다고 불평한다. 설경이의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남조선에서는 2만 달러로 뭘 할 수 있는지..."


 자연 그대로의 동해안. 양식장 처럼 보인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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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탈북자들이 2만 달러나 받는다고 하는데 그 많은 돈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남조선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은지 리해가 안 됩네다. 그거면 여기 북조선에서 일생을 살 수 있습네다. 2만 달러나 갖고도 살기 힘들다면 대체 얼마가 있어야 살 수 있습네까? 남조선에서는 2만 달러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합네다."

 

"글쎄, 상대적인 거라서 물가를 비교해야 하는데, 나는 이곳의 물가를 전혀 모르니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여간 남에서 저소득층 수준으로 산다고 할 경우 2년 정도는 살 수가 있는데... 문제는 집이라든가 가재도구라든가 하는 것을 모두 본인이 마련해야 하니 그 돈 갖고는 생활이 어려울 수 밖에 없지.

 

게다가 물가가 비싸. 그런데 좋은 직장은 구하기가 힘들고...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하면 아까 얘기한 막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일은 힘들고 보수는 적어. 그러다보니 '괜히 왔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겠지. 소수지만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있대." 

 

"어쨌든 전마선을 타고 남으로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겁네다. 탈북자라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인데, 사실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역은 비교적 자유롭게 왔다갔다 했었습네다. 조그만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고난의 행군 시절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간 사람들도 있었고. 또 중국에 살다가 다시 조선에 와서 살기도 하고 그랬었습네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우린 탈남자들이네"

 

설경이의 말을 들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라웠다. 나는 설경이가 탈북자에 대해서 거의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설경이는 이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남편이 탈북자에 대해서 열심히 얘기를 할 때도 차분히 들으며 의연히 대응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탈북자들을 소위 '배신자들'이라든가 아니면 애국심이 없는 형편없는 인간들이라고 폄하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설경이는 그들을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로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설경이에게 물었다.


"허가를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도 괜찮은 건가?"

"아닙네다. 선생님. 허가없이 국경을 넘는 것은 공화국의 법을 위반하는 일입네다."

"그러다가 잡히면 어떻게 되지?"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처음일 경우 대부분이 경고 정도를 받을 겁네다."

"응, 그래? 밖에 알려지기로는 탈북하다 잡히면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심하면 사형까지 시킨다고 알려져 있거든."

"그건 순전히 공화국에 악의를 품고 하는 악선전입네다. 10번 이상이나 단속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네다. 우리는 오히려 처벌이 너무 가벼워 그렇다고들 말합네다. 형벌이 무섭다면 어떻게 여러 번이나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네까?"

 

설사 형벌이 무겁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렇다고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수긍할 수는 있었다. 일전에 여러 번 탈북을 시도한 끝에 남으로 들어온 한 탈북자의 수기를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당시 나도 그 사람이 '어떻게 여러 번 잡혔다가 풀려 나왔다가 하면서 남으로 올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 적이 있었다. 어쨌든 남쪽에 많은 탈북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 이곳의 삶이 어려운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앞 자리에서 남편과 설경이의 대화를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리만룡 안내원이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경제적으로 잘사는 남조선에 어째서 그렇게 자살률이 높습네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남편이 머뭇거리며 답했다. 나도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잠시 조용하다 싶더니 남편이 또 한마디 한다.

 

"여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한을 떠나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러면 '탈남자'들이네. 안 그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차는 원산을 경유해 평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길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