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49940


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온 세상이 태양 빛으로 눈이 부시다. 오늘은 평양 시내와 몇 군데 기념비적인 곳에 간다고 한다. 날씨가 쾌청하니 차창 밖 사람들의 모습도 환하게 보인다. 분명 사람들의 겉모습은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봤던 그 모습 그대로인데, 훨씬 생동감이 넘쳐 보인다. 마치 얼어 있던 세상이 따스한 봄 햇살에 사르르 녹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내 가슴속 깊이 얼어붙어 있었던 마음의 눈이 녹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쟁 기념관, 뭘 기념할 수 있을까

 

 평양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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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해방전쟁 승리 기념관'에 도착했다. 기념관 이름 자체가 내게는 낯설고 어색하다. 말 그대로 '조국이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치른 전쟁의 승리를 기리는' 기념관이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압제는 미국으로부터의 압제일 것이고, 해방 역시 미국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전쟁 승리의 상대도 미국과 '미국의 앞잡이'인 남한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부부는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인, 남한 출신의 미국 시민이다. 적군이 적의 나라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 손님 대접을 받으며 다니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 감이 안 잡혀서 머리가 복잡하다.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안내 설명을 들었다. 열심히 영어로 설명하는 여성군관 해설원도 그 설명을 경청하는 우리 부부도 적과 적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덤덤하다. 설명을 듣는 내내 '이런 비극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쓰라린 사연을 담고 세상을 달리했던 수많은 이들의 한 맺힌 슬픔이 쓸쓸하고 서글픈 전쟁의 잔해물들이 돼 서늘하게 남아 있다. 전쟁기념관에서 무엇을 기념하며 무엇을 기뻐할 수 있을까.

 

 '조국 해방전쟁 승리 기념관'에서 유럽 관광객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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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이 끝나자 여성군관 해설원이 유럽 관광객들을 제쳐놓고 우리를 문앞까지 배웅해 준다. 아마도 남편과 내가 우리 말로 대화하는 것을 듣지 않았나 싶다. 군복을 입은 모습은 내가 처음 평양의 공항에 도착해 봤을 때와 사뭇 느낌이 달라다. 그때는 말이라도 붙이면 어떡하나 불안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수고 하셨어요. 힘드셨지요?"

"일없습네다."

"군복이 참 잘 어울리네요."

"아, 그렇습네까? 감사합네다."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수줍음을 탄다. 해설할 때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고 영락없는 우리네 여성이다. 내가 북한에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겸손하다는 점이다. 특히, 칭찬이라도 하면 남녀를 불구하고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주 다정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원쑤'의 나라서 온 사람

 

 '조국 해방전쟁 승리 기념관' 여성군관 해설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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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데서 오셨습네까?

"저... 저... 미국에서 관광 왔습니다."


북한사람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약간 주저했다. 이들에게는 '원쑤'의 나라일 테니까.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행동해도 속으로는 욕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아, 재미동포십네까? 멀리서 오셨습네다. 어쩐지 남조선말을 해서 궁금해 하던 차였습네다. 요즘 남조선에서는 평양에 전혀 오지를 않는다 말입네다. 참관은 많이 하셨습네까?"

"금강산과 원산에 다녀 왔어요."

"조선에는 금강산 말고도 좋은 산이 많습네다. 칠보산도 있고, 묘향산도 좋고, 백두산은  정말로 웅장합네다. 조선 민족의 기상이 깃들여져 있는 산입네다. 이번에 백두산도 가십네까?"

"아니요. 이번에는 못 가고 혹시 다음에 또 오면 꼭 가 볼게요."

  

어느새 우리 안내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갔다. 수고했다는 말을 다시 하고 헤어지는 인사를 하는데... 군관답지 않게 거수경례 대신 손을 흔든다. 그런데 얼굴 표정이 아까 해설할 때와는 전혀 달라 보였다. 뭔가 아쉬운 표정. 그 여성군관 해설원은 스물서넛 정도 되지 않나 싶다. 동포의 정이 듬뿍 느껴진다. 또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래, 꼭 또 올게'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만약 그녀가 거수경례를 했다면 그런 뭉클함은 덜 했으리라.

 

여기가 텔레비전에 나온 그곳 맞아?

  

 김일성 광장. 광장 왼쪽에 아이들이 매스게임 연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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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나오니 마음이 환해진다. 마치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 손잡고 나란히 줄지어 가는 학생들의 밝은 얼굴이 보인다. 전쟁이라는 단어조차 떠올리고 싶지 않다. 전쟁 기념관에서 불과 10분쯤 갔을까. 익숙한 넓은 광장이 나왔다. 김일성 광장이다.

   

텔레비전에서 북한 소식이 보도될 때면 항상 등장하던 그곳. 로봇 같은 군인들이 탱크나 미사일들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행진을 하는 모습 대신 아이들이 매스게임 연습을 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너무나 생소했다. 텔레비전을 보며 느꼈던 무시무시한 위압감은 온데간데없고 아이들이 뛰어놀면 딱 어울리는 그런 광장이다. 단지 한 건물 위에 김일성 주석의 사진과 북한 깃발이 있고, 광장의 규모가 엄청나 조금은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연습하다가도 우리와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들며 반긴다. 정말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저 아이들 모습 속에서 일깨워져 내 가슴에 새겨진다.

 

 전쟁 후 복구된 대동강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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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드나무 강변을 지나면서 차안에서 본 피라미드 모양의 류경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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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따라 주욱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가 병풍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내 눈에 평양은 '공산 혁명의 수도'라기 보다는 차라리 아름다운 전원도시로 보인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외부공사를 마친 피라미드 모양의 류경호텔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겉을 유리로 장식해 빛을 발하는 모습이 마치 동서양의 화폭을 새로운 감각으로 섞어 놓은 듯하다.

   

조금 더 지나니 대동강 철교가 보인다. '조국 해방 전쟁' 때 끊어졌던 철교 다리를 다시 연결시켜 놓았단다. 어린 시절 학교 때 책 속에서 본 듯하다. 끊어진 다리 위를 기어오르며 피란을 가는 사람들을 담은 그 사진 속 그 다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동강 철교를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역사 저편에서 잊히고 있는 희미한 장면을 애써 기억하며 사진으로나마 내 기억 속에 담는 것이 전부였다.

  

헉! 북한에도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있다니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식당'에서. 유럽 사람들이 현지 사람들보다 더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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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에는 여행 일정에 잡혀 있는 식당에 가지 않기로 했다. 남편이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한턱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안내원들과 운전기사 외에 '조선국제려행사' 간부 두 분도 초대했다. 남편이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수집한 정보에 입각해 심사숙고해서 정한 식당이다. 정보에 의하면, 레스토랑 셰프들이 직접 이탈리아에 유학가서 배워 왔단다. 식재료 역시 모두 이탈리아에서 공수해 만든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풍부한 재료로 만들어진 미국식 피자나 스파게티보다 절제된 정통 이탈리아 음식을 매우 좋아해 이 음식점을 택하긴 했지만, 절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피자를 즐겨 먹는 남한이라면 모를까 '피자'라는 말이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를 이곳 북한에서 이탈리아 음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안고 우리 일행은 식당으로 향했다.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식당 앞에는 우리가 타고 온 차량과 비슷한 버스들이 눈에 띈다. 역시 들어와 보니 유럽 사람들이 현지 사람들보다 더 많이 있었다. 제법 이탈리아 음식점 분위기가 나게끔 신경 써서 장식해 놨다.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은 극장식 음식점으로 무대에서는 스포티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피아노를 번갈아 치며 멋들어지게 칸초네를 부르고 있다. 속으로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노라니 곧 식욕이 돌아 빨리 음식을 맛보고 싶어졌다.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 (피자 레스토랑) 에서. 왼쪽부터 남편, 설경이, 필자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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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초대한 간부들과 인사를 나눈 뒤 남편이 피자를 종류별로 하나씩 주문했다. 당원 운전사 아저씨는 이탈리아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며 위층 한식점에 육개장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에 여행사 간부 한 분이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이 식당을 아셨습네까?"

"아, 예. 인터넷으로 알아냈습니다."

"그러셨습네까? 그러지 않아도 우리 관광총국에서는 요즘 인터넷에 조선 관광에 대한 많은 정보를 올려 홍보에 크게 힘쓰고 있습네다. 아마 선생님께서도 이 식당에 대해 관광총국에서 유투브에 올려 놓은 것을 보고 아셨을 겁네다."

 

남편이 물었다.

 

"혹시 여기서도 인터넷을 쓰고 있나요?"

"아직 인터넷을 전체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대학이나 연구소 그리고 정부기관에서는 다 쓰고 있습네다. 일반 인민들은 국내에서만 하는 인트라넷을 하는데 조만간 보완 문제만 해결되면 곧 모든 인민들도 인터넷을 하게 될 겁네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으로 이메일을 좀 보내야 하는데, 원 답답해서..."

"아, 그러십네까? 호텔에 가시면 인터넷을 쓸 수 있게 돼 있습네다. 국제전화도 가능합니다. 저, 리 동무. 호텔에 가면 선생님 인터넷 하실 수 있게끔 안내해 드리오."

   

남편이 뭔가 계속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그만 음식이 나왔다.

 

심상치 않은 북한의 '이딸리아 삐짜'

 

 '해운 이딸리아 특산물 식당'(피자 레스토랑)에서 셰프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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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 오른 피자는 모양부터 심상치 않다. 이탈리아에서 맛있게 먹었던 모양 그대로 햄과 소시지로 장식돼 있었다. 기대 이상의 맛이다. 정통 이탈리아 피자 맛이다. 입으로 가슴으로 즐기며 기쁘게 식사했다. 

   

옆에서 육개장을 먹고 있던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는 내가 너무 맛있다고 연신 감탄을 하며 먹으니 "어떤 맛인지 궁금하다"며 한 조각 먹어본다. 맛을 보더니 먹던 육개장을 옆으로 밀어두고 피자 맛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집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같이 오리라' 다짐하고 있을 것이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똑같으니까.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들이 왜 북한에서는 신기하고 감동적으로 내 가슴을 두드리는 것일까.    

 

식당을 나오기 전, 우리는 셰프 아가씨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둘 다 "'이딸리아' 로마에서 요리기술을 익혔다"며 "'삐짜' 맛이 어땠냐"고 궁금해한다. 느낀 그대로 말해줬다.

 

노래 한 곡조에 담긴 애절함

 

 고려호텔 회전식 라운지에서 <그리운 금강산>과 <가고파>를 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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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정을 마치고 우리 자동차는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이탈리아 식당에서 맛봤던 낭만적인 분위기를 좀 더 즐기기 위해 호텔 맨 위층에 있는 360도 회전식 라운지에 올랐다. 꼭대기 라운지에서 내려다보는 평양의 밤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별빛이 아름다운 시골의 밤하늘을 바라보듯 은은한 운치가 있다. 우리 일행은 이미 회전식 창가에 기분을 싣고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라운지는 조용하고 아늑하다. 피아노가 우리 앞에 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내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라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다. 이 노래를 평양의 한 호텔 라운지에서 부르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어떤 무대보다 내 마음을 감개무량하게 만들었다.

   

일행들이 한 곡만 더 불러 달라고 부탁한다. 예의상 청했겠지만, 김동진 선생님의 <가고파>를 불렀다. 북한땅에서 남쪽을 그리며 불러보는 이 노래 또한 내 가슴을 애절하게 했다. 모처럼 느껴보는 여유롭고 푸근한 밤이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심정을 안고 객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