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을 ‘비핵.개방.3000’의 운명
대북 진정성은 ‘비핵.개방.3000’ 폐기부터
2008년 12월 24일 (수) 17:18:22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이명박 정부의 첫 해 대북정책의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다른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것도 아니지만 대북정책은 상대가 있는 만큼 유독 실패가 두드러져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걸었던 ‘한반도 대운하’, ‘747공약’이 공약(空約)에 그치고 만 것처럼, 대북정책 주요 공약이었던 ‘비핵.개방.3000’이 최근 정부 안에서조차 버림받는 조짐이 공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상생공영은 ‘비핵.개방.3000’에 모자 씌운 것”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을 전제로 3000달러 국민소득 수준을 만들어주겠다던 자기 중심적인 구상은 초반부터 현실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북측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지만 인수위 시기를 지나 현 정부 초기까지 확고한 대북정책 기조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결국 통일부를 중심으로 ‘상생공영 정책’이 현 정부의 공식적인 대북정책으로 표명되면서 ‘비핵.개방.3000’은 상생공영 정책의 하위 수단으로 전락했다.

고위 당국자는 7월 1일 ‘상생.공영정책’이 이 정부 대북정책의 ‘캐치프레이즈’라고 분명히 밝혔고, 7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비핵.개방.3000’은 언급하지 않은 채 ‘상생과 공영의 길’이라는 소제목으로 대북정책 구상을 밝혔다.

7월 15일에는 통일부 정세분석팀장을 지낸 강석승 통일교육원 과장이 “(통일부에서) 차관과 과장급 이상 간부들이 모여 브레인스토밍(난상토론)을 가졌다”며 “앞으로 정부 당국자가 ‘비핵.개방.3000’을 운운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 인수위원을 역임하며 ‘비핵.개방.3000’ 성안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서재진 통일연구원 원장은 『남북 상생.공영을 위한 비핵.개방.3000 정책의 이론적 체계』라는 책자를 펴냈고, 지난 8월 21일 “상생공영의 대북정책은 ‘비핵.개방.3000’에 모자를 씌운 것이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북측은 “비핵이란 우리를 일방적으로 완전 무장해제 시키고, 개방은 자랑높은 우리 체제를 허물겠다는 것”이라며 일관되게 부정적 인식을 명백히 밝혀왔다.

통일연구원, ‘비핵.개방.3000’ 수정 움직임

이같은 상황에서 ‘비핵.개방.3000’ 정책의 산실 역할을 담당했던 통일연구원이 지난 19일 기자간담회와 23일 토론회를 통해 스스로 ‘비핵.개방.3000’의 ‘개선’에 나서고 있어 주목된다.

서재진 통일연구원장은 19일 기자간담회에서 “경색국면이 지속되면서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 구상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떨어지고 있다”며 “‘비핵.개방.3000’ 구상은 선거 당시 공약 수준에서 훨씬 구체화 되고 현실화 되고 유연화 돼 있다”고 말했다.

서 원장은 “‘비핵.개방.3000’은 전제조건이 아니라 북한의 비핵을 실현하도록 지원하고 경제발전을 지원해 주겠다는 정책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며 “다행히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과 오바마의 ‘핵무기 없는 세계’는 지향점이 유사하기 때문에 비전이 공유될 수 있다”고 다소 자기중심적 주장을 내놓았다.

서 원장은 “지나치게 경직된 조건부 정책으로 인식하는 공약수준에서 벗어나서 통일연구원과 정부에서 새롭게 수정, 보완한 ‘비핵.개방.3000’ 구상이 좀 더 국민들에게 잘 알려졌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23일 통일연구원이 주최한 토론회에서는 한발 나아가 ‘비핵.개방.3000’을 아예 ‘비핵평화.개방개혁.통합통일’로 대치시켜 놓았다.

김구륜 통일연구원 남북협력연구실장이 책임연구자로 된 ‘남북협력의 새로운 추진방향’ 연구는 전봉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가 발표자로 나섰다.

전 교수는 “그동안 우리는 내부적인 역량도 있고, 지식적인 한계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곳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비핵은 이미 6자회담에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해 정부의 ‘선핵폐기론’이라는 기본 기조의 변경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전 교수는 “비핵이라는 것은 6자회담에 맡기고, ‘3000’ 부분에 관심을 갖는다면 북한의 개발지원 프로그램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할 것”이라고 주문하는 등 “‘비핵.개방.3000’ 구상이 초기에 선거구호성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것이 고착됐다는 데에서 문제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사실상 ‘비핵.개방.3000’의 실패를 인정했다.

전 교수는 “그동안 비핵을 강조했고, 평화를 강조했다면 앞으로는 평화와 개혁, 통일도 같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면서 가치라고 생각한다”며 3대 추진목표로 ‘비핵.평화.3000’ 대신 ‘비핵평화.개방개혁.통합통일’ 병행추진을 제기했다.

대북 진정성은 ‘비핵.개방.3000’ 폐기부터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서재진 원장은 24일 <통일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비핵.개방.3000’은 그대로 유효하다”며 “전봉근 박사의 발표 내용은 통일연구원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김구륜 실장은 “좀더 근본적으로 선진적인 개념을 넣어서 남북관계를 생각해보면 어떻겠는가 하는 연구를 담았다”며 “통일연구원의 공식견해와 다룰 수 있지만 연구의 가장 중요한 것이 창의성으므로, 넓게 보면 ‘비핵.개방.3000’에 대한 조정과정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비핵.개방.3000’에 대한 ‘현실화’ 내지는 ‘유연화’이든 새로운 개념들로 대체하는 ‘조정과정’이든 ‘비핵.개방.3000’이 본래의 취지를 상실하고 수술대에 오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아직 통일부는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학자들 개인영역”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통일부 관계자는 “‘비핵.개방.3000’은 비핵화가 전제가 아니라 핵문제 해결의 진전 속도에 따라 북한을 지원할 수 있다는 중장기적 전략의 하나로 상생공영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고 다만 “구체화 하고 있는 과정이다”고 말해 여지를 남겼다.

통일부는 그간 북측이 우리의 상생공영 정책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핵.개방.3000’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다고 누차 강조해왔다.

그러나 현 정부의 ‘상생공영 정책’이 ‘비핵.개방.3000’에 모자를 씌운 꼴에 머문다면 지금까지의 북측이 태도로 보아서는 그 ‘진정성’이 수용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한 것으로 판단된다.

현 정부 초기의 ‘비핵.개방.3000’이 이미 실패한 대북정책으로 판명났다면 자꾸 덧칠을 하거나 자의적 해석을 추가하기 보다는 과감히 폐지하고 상생공영의 대북정책에 맞는 추진전략을 새롭게 마련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자칫 다 죽은 ‘비핵.개방.3000’을 붙잡아 보려다 어렵게 마련한 ‘상생.공영 정책’마저 깡그리 부정당하는 사태를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비핵.개방.3000’은 한시바삐 청산하고 ‘상생공영’의 ‘진정성’에 맞는 대북정책 추진전략을 마련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