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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니끼니... 신발이 좀 날라리 같디요?"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1] 벌써 세번째... 이번엔 라진-선봉으로
12.09.03 15:22l최종 업데이트 12.09.03 15:22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북한으로 향하기 앞서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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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열흘간의 평양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시차 적응을 할 겨를도 없이 다시 북한에 가기 위해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때는 5월 초. 7명의 미국 친구들 중 1명은 가정문제로 또 1명은 직장 문제로 동행할 수 없어 나머지 5명과 재미동포 부부, 그리고 우리 부부까지... 모두 9명이 12일 동안 함께 북한을 여행하게 됐다.

12일간의 북한 여행을 마치고 나면, 우리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베이징을 경유해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우리 부부는 베이징 공항에서 그들과 작별 인사를 한 다음, 항공편으로 옌지(연길)에 닿아 육로로 함경북도 나진·선봉에 갈 계획이었다. 평양에서 직접 나진·선봉을 갈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직접 가기에는 교통 사정이 여의치 않아 힘들다고 했다.

다음에 나진·선봉에 갈 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평양에서 육로로 그곳까지 가리라 마음먹었다. 지난해 10월, 첫 북한 여행 당시 내 고향 대구를 떠올리게 했던 추억의 도시 원산을 경유해 함흥, 청진을 거쳐 슬프디 아름다운 동해안을 따라서 말이다.

한 실향민의 목 메임... "고향 땅 가보는 게 소원"

이번 여행의 백미는 평양 봉수교회에서의 예배와 백두산 방문, 그리고 나진·선봉 지역 관광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에게는 관광보다 더 중요한 두 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해도 사리원'에 가겠다는 것.

북한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쯤이었다. 고향이 이북이라는 한 할아버님이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고향은 황해도 사리원이며, 열세살 때 부모님을 따라 남으로 내려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할아버님은 "아직 미국 시민권이 없어 고향 방문을 못하고 있다"며 "혹시 당신들이 사리원에 간다면 사진이라도 좀 찍어올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할아버님은 "죽기 전에 친척들을 만나고, 고향 땅 한 번 밟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논이며, 밭이며, 시내로 향하는 신작로며, 마을의 동무들이며... 모든 것이 눈에 선하다며 울컥하셨다. 그 할아버님은 "고향 생각이 날 때, 약주를 마시며 <고향의 봄>을 부르는데, 목이 메어 노래를 끝까지 불러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사실, 그동안 남편은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한 보육원에 의약품을 전달해 달라는 한 구호단체의 부탁을 받고 사리원 방문을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측은 "관광 목적으로 입국했을 경우, 관광 외의 일은 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남편은 그래도 사리원을 가야겠다며 북측과 승강이를 벌였다. 그러던 중 그 구호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보내려고 했던 물품들이 유효 기간이 지나 보낼 수가 없게 됐다"고. 그 연락 덕에 우리는 여행사에 연락을 해 "사리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놓은 상태였다.

눈시울을 적시며 할아버님과 통화를 하던 남편은 전화를 끊자마자 여행사에 다시 전화를 걸어 "보육원에는 가지 않아도 되니, 그저 시내 구경만이라도 할 수 있게 일정을 변경해 달라, 황해도 사리원에 꼭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다시 사리원에 가게 해 달라는 남편의 부탁에 북한 측은 보육원 방문도 취소된 마당에 왜 저렇게 사리원을 가려고 하는지 의심하는 것 같았다. 과연 사리원 방문을 허가할지 의문이었다.

순간 그 할아버님께 죄스러운 마음이 생겼다. "고향 땅을 단 한 번만이라도 밟아 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곳들을 우리는 한가하게 관광 목적으로 다녔다니... 갑자기 북한에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기도 했다.

둘째는 평양의학대학 병원에 인공관절 치환 수술 장비를 전해 주는 일.

이 장비들은 지난해 10월 첫 북한 여행에서 돌아와 처음 뵌 이후 우리 부부가 스승으로 모시게 된, 세계적인 정형외과 의사이자 하버드 의대 교수를 지낸 오인동 박사님께서 평양 의학대학 병원에 보내달라고 부탁한 것들이었다.

지난해 북한을 처음 다녀온 후, 나의 무지함을 깨고, 굳게 빗장이 걸려 있던 마음의 눈을 열고 보니 곳곳에서 자신의 재능과 따스한 가슴으로 우리 민족을 위해 정열을 뜨겁게 불태우고 계시는 훌륭한 분들이 재미동포 사회에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별히 우리 부부는 오인동 박사님이 쓰신 저서 중 하나인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을 감명 깊게 읽었다. 우리는 그분의 진심어린 동포애와 민족 통일의 염원을 가슴으로 읽으며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됐고, 뒤늦게나마 그분의 끝없는 열정을 어설프게나마 좇으려 했다.

이미 선생님께서는 수차례 북한을 방문해 북한 동포들에게 '인술'을 베풀어 오셨다. 또한, 그들에게 선진 의술을 전수하고 있었다. 의학 활동뿐만이 아니었다. 오인동 박사님은 지난 2008년 문화관광부 선정 역사분야 우수도서인 <꼬레아 Corea, 코리아 Korea : 서양인이 부른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를 비롯해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다> 등의 저서를 통해 조국의 진정한 독립인 통일을 향해 온몸과 온마음을 불태우고 계셨다.

우리는 박사님의 동포 사랑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자 이번 5월 여행에 박사님께서 정성스레 준비한 수술 장비와 의료품을 전달하고자 계획했다.

"오마니!"... 다시 만난 '우리 딸' 설경이

추억의 평양 순안공항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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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평양공연 여행 후 2주 만에 또다시 찾은 5월의 북녘땅. 이제는 낯설 수 없었다. 그저 반갑고, 보고 싶은 고향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내 나라의 일부처럼 친근하다. 우리와 함께 이 여행에 동행한 미국 친구들도 이미 우리 부부에게 들은 북한 이야기들 때문인지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설렘과 호기심으로 들떠 있다.

어느 시골의 버스터미널 같은 임시공항청사도, 멀리 보이는 순박한 공항청사 직원 아저씨들의 모습, 그리고 세관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의 모습도, 모든 것이 여전하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달나라보다도 낯설게만 느껴졌었던 어느 북한 땅에 너무나도 보고 싶은 '우리 딸' 설경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우리와 함께했던 만룡 안내원과 리인덕 운전사 '당원 아저씨'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그 두 사람은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만룡 안내원은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으며, 리인덕 운전사 아저씨는 작은 밴 전속 담당 운전사로 보직이 바뀌어 우리 일행을 모두 태우고 다닐 수 없단다. 대신 큰 버스 운전을 담당하는 다른 운전사 아저씨가 나올 것이라고 들었다.

섭섭함과 실망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지만, 만룡 안내원과 리인덕 운전사 아저씨를 대신해 새롭게 인연을 맺을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이 고개를 든다. 아쉬운 마음을 기대감으로 위로해 본다.

추억의 평양 순안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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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어두컴컴한 공항청사를 빠져나가 흥분에 들떠 있을 설경이를 만나고 싶다. 그런데, 좋지 않은 공항청사의 전기 공급 사정 때문에 짐을 찾는 레일이 여러 번 정지했다. 때문에 짐 찾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미국 친구들은 이조차도 "관광지에서만 새길 수 있는 좋은 추억거리"라며 느긋해한다.

과연 설경이가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여행을 수속하는 과정서부터 여러 번 북한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한 지인은 "같은 안내원을 두 번 다시 연결시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지난해 첫 북한 여행에서 돌아와 또다시 평양에 가겠다며 계획을 세웠던 이유는 '설경이와의 재회'였다. 우리는 여행사에 단호하게 부탁했다.

"만약 설경이를 볼 수 없다면 여행을 포기하겠다."

애절하게 부탁했던 내 마음이 무색하리만큼 우리 여행을 담당한 여행사는 "북한에서 흔쾌히 선생님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말해줬다. 또 "안 그래도 같은 안내원을 붙여 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이미 그렇게 준비해 놓고 있다"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공항청사에서 짐을 찾고 있는 동안, 남편의 의심증이 또다시 발동했다.

"여보, 설경이가 정말 나와 있을까? 어쩌면 우리를 또 관광 오게 하려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어..."
"설마..."


부정도 긍정도 아닌 이 짧은 말. 이 말 이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북한서 새로 만난 '조카'

12일 동안 우리와 함께한 '조선국제여행사'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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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가방을 찾고 청사를 빠져나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누군가가 "오마니! 오마니!"라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나는 직감적으로 '설경이다'라고 생각했다. 맞았다. 세관 너머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설경이가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소리치고 있다. 나 또한 창피한 줄 모르고 설경이의 이름만 소리 높여 불렀다. 이후 세관을 통과한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 어머님, 아버님은 안녕하시고?"
"네, 그러지 않아도 오신다고 했더니 '잘 모시라'고 하셨어요. 지난 4월 축전 때 뵙고 3주 만인 것 같은데... 왜 이래 오래된 것 같나요?"


흥분을 가라앉힌 설경이가 옆에 서 있는 남자 안내원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내가 본 북한 남성 중 키가 제일 크지 않나 싶은 이 사람의 이름은 방현수. 마른 체격을 더 말라 보이게 하는 콧날, 뾰족한 멋쟁이 구두를 신고 있었다. 방현수 안내원은 자신의 별명이 '탈피(마른명태)'라며 싱글싱글 웃는다. 기분 좋은 웃음이 절로 난다.

방현수 안내원은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다가 이곳 '조선국제려행사'로 옮겨 온 지 몇 개월 안 됐단다. 그는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잘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천성이 순하고 재치가 있는 방현수 안내원. 나와 그의 관계가 '이모-조카' 사이로 발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경이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유창한 영어로 미국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꼼꼼히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설경이가 영어로 말하는 걸 처음 듣는 듯. 마치 설경이와 함께 미국에 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신발이 좀 자유주의입네다"

장난기 많은 방현수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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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에 앉은 방현수 안내원이 "설경 동무는 매사에 빈틈없고 능숙해서 나는 할 일이 없습네다. 고저 설경 동무 하자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면 무탈합네다"란다. 그러더니 정말 할 일이 없는지 차 안에서 뾰족한 구두를 열심히 닦는다.

"구두가 참 멋있네요!"
"우리 집사람이 며칠 전, 요즘 유행하는 기라며 사다 줬는데 구두가 좀 점잖티 안티요? 기랫티 않습네까?"
"부인이 정말 멋쟁이 구두를 잘 골라 사줬네요. 좋기만 한데요?"


"긴데... 신발이 좀 자유주의입네다..."
"자유주의라뇨?"
"기리니끼니... 좀 '날라리' 같다는 말입네다."
"어머, 여기서도 '날라리'라는 말을 쓰네요."
"'날라리' 말입네까? 날라리... 뭐... 좀 있디요. 뭐..."


지금껏 내가 만나 본 북한 사람들 중 가장 북한 사투리가 심한 사람이었다. 이곳 북한도 젊은 사람들일수록 우리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쓴다. 그런데 39세밖에 안 된 방현수 안내원은 북한 사투리가 정말 심하다. 게다가 말끝마다 '뭐'자를 붙이는데, 꼭 여성 말씨다. 게다가 농담과 장난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 재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방현수 안내원의 심한 사투리, 농담, 그리고 장난기로 인해 우리는 금세 가까워질 수 있었다.

병원에는 갈 수는 있는데 장비는 전할 수 없다니...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남편이 설경이를 불러 옆에 앉히고는 묻는다.

"설경아, 평양의대 병원이 어디 있어?"
"평양의대요? 아, 지금은 김일성종합대학과 합쳐졌는데,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고려호텔 바로 근처입네다. 기런데 '평의대병원'은 왜... 오데가 아프십네까?"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짐 가방 중 제일 큰 것이 평양의대병원으로 가는 수술장비들인데, 급히 전해야 하거든. 미국에 사시는 오인동 박사님이라는 분이 보내시는 건데, 지금 '문상민'이라는 병원장님께서 이 장비를 기다리고 계실 거야. 오 박사님께서 이미 이메일을 보내 놨다고 하셨어."


"아, 그렇습네까. 직접 전해 주실 수는 없고... 조금 있으면 '리종' 동지가 호텔로 오기로 돼 있는데, 리 동지에게 부탁하시면 됩네다."
"리종 동지?"
"작년에 '삐짜' 식당에서 함께 만나시지 않았습네까.(웃음) 왜... 저... 머리가 좀 없는..."

"어, 그 '대머리' 선생?"
"리종 동지가 그러지 않아도 선생님 뵙겠다고 호텔로 오고 있는 중입네다. 기런데, '대머리'라 그러지 마십시오. 되게 싫어 합네다. 아버님은 좀 너무 솔직해서..."
"응, 알았어. 그 분 앞에서는 '대머리'라고 절대 안 그럴게. 그런데, 내가 직접 전해줄 수는 없나? 병원 구경도 좀 할 겸."


"병원 참관은 원하시면 할 수 있습네다만, 수술 장비를 전달하는 것은 직접 안 됩네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병원구경은 할 수 있는데 거기까지 가서 물건은 전할 수 없다니. 이왕 가는 김에 물건까지 전하면 좋잖아. 안 그래?"
"공화국에도 다 법과 규칙이 있습네다. 따라야 할 절차가 있습네다."


병원 구경은 원하면 할 수 있지만, 수술 장비를 전하는 것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니... 아주 다급한 환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니 천만다행이지만, 만일 이 장비들이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환자들을 위한 것들이라면...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북한

점점 새로워 지는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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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거리는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4월에 다녀간 뒤 2~3주뿐이 되지 않았는데, 뼈대만 보이는 것 같았던 새 건물들이 그새 또 조금 더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다.

봄이라 그런지 도로변에 활짝 핀 꽃들은 사람들의 옷차림을 한층 생동감 있게 만들었다. 마치 꽃들이 화사한 무늬가 된 듯하다. 따스한 봄 햇살 속 여인네들은 화려하게 수놓은 양산을 쓰고 꽃가루와 함께 둥실둥실 하늘로 떠오를 것만 같다. 호기심이 많은 미국 친구들도 말로만 듣던 북한을 직접 와서 눈으로 보니 신기한 것들이 눈에 띄었나 보다. 연신 설경이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어느새 눈에 익은 고려호텔에 도착했다. 우리 짐을 받아주는 벨보이 아저씨도, 프런트 데스크의 아가씨들도 지난 10월에 만났던 우리를 기억하고서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녀사님! 지난 번 '친선 봄 축전'에서 노래 부르시는 것 텔레비죤에서 보았습네다. 너무 반가와서리 눈물이 다 찔끔했습네다."

벨보이 아저씨가 말하니 옆에 있던 아가씨들도 내가 노래 부르는 것을 봤다며 맞장구쳐준다.

화려한 양산을 즐겨 쓰고 다니는 평양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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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을 만났어도 순수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은 시공을 초월하는 교감을 만든다. 문득, 우리나라는 사상이나 이념이 갈라놓은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절대로 인간을 갈라 놀 수가 없음을 이곳 북한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호텔방을 배정받고 저녁 식사 전까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방에다 짐만 가져다 놓은 뒤 설경이, 방현수 '조카', 그리고 "북한의 '용성맥주'와 같은 이름을 갖고 있어 쉽게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40대 중반의 김용성 운전수 아저씨와 회포를 풀기 위해 로비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리종 선생도 이곳 커피숍으로 오기로 돼 있단다.

수술 장비 가방을 끌고 서둘러 내려가니, 벌써 리종 선생과 세 사람 모두 우리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종 선생은 우리의 손을 붙잡고 아래위로 흔들면서 반가움을 표하더니 그것으로 부족한지 "악수로는 반가움이 전해지지 않으니 미국식으로 '포옹' 한 번 합세다. 영어로는 '허그'라고 하디요?"라고 말한다. 영어를 전공한 티를 낸다.

내가 보기에는 그리 심한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머리카락 빠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라며 머리카락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리종 선생에게 다음에 북한에 올 때는 탈모방지약을 꼭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관계의 단절은 '형벌'... 우리는 벌을 자처한 걸까

고려호텔 커피숖에서 '탈피(마른명태)'를 다듬고 있는 설경이. 별명이 '탈피'인 방현수 안내원은 도저히 마른 명태하고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며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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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반가움으로 축배를 들자"며 초저녁부터 맥주를 마실 명분을 찾은 남자들은 일심으로 의기투합하고 있다. 안주는 '탈피'(마른 명태)! 탈피를 시키면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방현수 안내원을 쳐다 보며 웃었다. 방현수 안내원의 별명이 '탈피'라서. 그러자 방현수 안내원이 귀엽게 한 마디 던진다.

"술자리에는 '탈피' 내가 빠질 수 없디요."

새로운 만남, 그리고 재회! 이것이야 말로 살아있음을 감사하게 만든다.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 '가족, 형제자매, 친지, 친구들...'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한 관계이자 소중한 만남이다. 끊을려야 끊을 수 없는 이 소중한 관계의 단절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일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민족은 이런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인지, 혹시 우리 스스로 이 형벌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 또 반성해 본다.

남편은 리종 선생에게 "우리가 미국서부터 들고 온 중요한 수술 장비 가방을 꼭 평양의학대학 병원에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리종 선생은 "기꺼이 이 소중한 물건들을 잘 전달해 드리겠다"며 의과대학을 대신해 우리 부부와 오인동 박사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이 장비로 수술을 받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될 동포들을 생각하니 내 얼굴에도 미소가 절로 피어난다. 수술 장비를 우리에게 넘겨 주시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던 오인동 박사님의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안내원 "이미 다 지시 받았습네다"

평양 고려호텔 로비에서. 왼쪽부터 설경이, 필자, 리종 선생, 그리고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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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친구들은 먼 여행길에 피로를 느끼기도 했지만,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내일 일정을 기대하며 각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설경이와 우리 부부는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좀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360도 회전 식당으로 향했다. 물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이 듬뿍 가는 방현수 안내원도 함께 말이다. 책임감이 남다른 김용성 운전사 아저씨는 "내일의 안전 운행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양해를 구하고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유머 감각이 풍부한 방현수 안내원 덕분에 정신없이 웃으며 피곤한 줄 모르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방현수 안내원은 내가 자기 막내 이모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단다. 덕분에 만난 지 하루 만에 나는 이모, 남편은 이모부가 돼 버렸다. 그의 순박한 붙임성은 나로 하여금 그를 진짜 조카처럼 느껴지게 했다. 나는 방현수 안내원에게 "앞으로 동생 설경이를 잘 돌봐주길 바란다"고 신신당부하니 남편이 한 마디 덧붙인다.

"내가 오늘 하루 가만히 지켜보니까 방 조카가 설경이를 잘 돌봐주기는커녕 설경이 힘들게나 안 하면 천만다행이겠구만."
"설경 동무한테 벌써 다 듣고 지시 받았습네다."


"뭘 다 듣고 지시 받아?"
"설경 동무 이야기가, 정 선생님 말씀하실 때는 반박하려고도 하지 말고, 따지려고 들지도 말고, 설득하려 들지도 말고, 고저 아무 소리 말고...:"
"음... 그건 맞는 말이지. 근데 아무 소리 말고 뭐?"
"고저... 고저...한 쪽 귀로 듣고 흘려 버리라고 말입네다."


그러자 방현수 안내원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치는 시늉을 한다. 남편이 설경이를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너, 이놈의 자식, 그동안 내가 한 말을 한 귀로 듣고 바로 흘려버렸단 말이야?"
"아버지, 오해하지 마시라요. 제가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아버지 말 속에 들어있는 애정어린 말뜻을 잘 알아서 찾아 들으라 했시요. 안 기래요. 방 동지?"


설경이는 두 눈을 찡긋하며 애교섞인 미소를 띄운다.

고려호텔 회전식당에서 설경이와 함께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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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딸, 그리고 조카... 너무나도 친숙하고 정감 넘치는 사람들의 대화다. 내가 방 조카에게 "걱정 말라"며 한마디 했다.

"조카 뒤에는 든든한 이모가 있으니, 이모부 무서워서 도망치지 말고 내 옆에 꼭 붙어 앉아 있으면 돼."
"긴데... 기러다간 이모까지 '폭탄' 맞을 것 같으니 기냥 올라 가갔시요."


방현수 안내원은 "사실, 내일 미국 관광객 중 한 분이 오전 6시에 조깅을 하는데, 안내원인 내가 함께 가기로 돼 있다"며 "함께 뛰려면 힘을 비축해 놔야 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방에 올라가 잠을 좀 자둬야 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의 '조깅 사건'이 고려호텔 안팎으로 회자되리라곤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