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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마주친 '관동군'의 흔적, 그런데...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 27] 관동군 소속부대 사령부였던 남산호텔
12.09.25 17:35l최종 업데이트 12.09.25 17:35l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라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북한서 만난 친척 크리스... 통일된 줄 알았네

필자와 운전기사 아저씨(가운데), 그리고 문호영 안내원(오른쪽)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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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에 크리스가 오기로 돼 있단다. 식당에 도착하니 크리스가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크리스의 손을 잡고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크리스! 크리스를 북한에서 만나다니... 잘 있었어? 애들하고 애들 엄마는?"
"집에 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처형 오신다고 전부들 난리예요. 같이 오려고 했는데, 제가 오늘 인민위원회에 볼 일이 있어서 혼자 나왔어요."
"여기서 집이 멀어?"
"차로 한 30분 정도 거리랍니다. 모레 우리 농장에 오시기로 돼 있어요."

"알고 있어. 근데, 국경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보니까, 여기 농촌이 다른 데보다 더 나아 보이던데?"
"아마 그럴 거예요. 여기가 중국하고 가까워 교역을 많이 하니까 아무래도 다른 데보다 생활 수준이 좀 높을 겁니다. 음식도 평양보다 더 나을지 몰라요. 한번 드셔 보세요. 처형, 저 이제 슬슬 가봐야겠어요. 여기서 안내원하고 저녁 식사 하시고 호텔로 가시면 됩니다. 모레 다시 만나요."

크리스는 집에 가기 전에 한 군데 더 볼 일이 있다며 작별인사를 한 뒤 식당을 나섰다. 북한에서 친척을 만나다니, 정말로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통일이 다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다.

식사를 하면서 문호영 안내원은 조금 전에 못다 한 자기소개를 마저 한다. 그는 초등학교를 이곳에서 다녔으며, 동네에서 신동으로 불릴 만큼 공부를 잘했단다. 덕분에 그는 청진에 있는 중학교를 나왔고(라선에서 뽑혀서 갔다고 한다), 평양외국어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전공이 영어였는데, 군대에 가면 외국어를 쓸 일이 없어 다 잊어 버릴 것 같아 군대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이 "군대에 안 가도 되느냐"고 묻자 그는 "북한 군대는 지원제(모병제)를 따른다"고 답했다. 지난해 10월 평양에서 리만룡 안내원이 '북에서는 군대가 지원제'라고 하자 남편이 강한 의구심을 표했던 일이 생각났다(북한 군 복무제도가 지원제라는 언급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6년 전부터 지원제가 됐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며 "지원제가 아니라 징집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편집자말).

문호영 안내원은 "대학 졸업을 하고 나서 평양에 있는 직장에 다니게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다"며 "세상에 제 생각처럼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참 꾸밈이 없고, 생활력이 강하면서도 여성스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자 남편이 또 한마디 덧붙인다.

함께 한다면 '사슴'과 '승냥이'도 친해질 수 있다

낚시를 좋아하는 문호영 안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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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처럼 되는 세상이 어딨어, 이 사람아. 그리고 평양이나 여기나 그게 그거지... 나 같으면 차라리 여기 있겠다. 부모님 함께 계시지, 바다 가까워 낚시도 매일 할 수 있지... 얼마나 좋아."
"어, 선생님 낚시 좋아하세요? 저 낚시 아주 좋아하는데요, 여기 고기 정말 많습니다. 뭐 잘 잡질 않으니까 바다에 나가면 물 반 고기 반입니다. 생선을 좋아하신다면 라진에는 정말 드실 것이 많습니다. 나중에 해산물 상점도 가보시고 장마당에도 가보시면 아실 겁니다."

"뭐? 여기서 장마당에도 갈 수 있다고?"
"네, 여기는 경제특구라서 원하시는 곳은 다 가보실 수 있습니다. 비자도 없이 들어오셨잖습니까. 대신 장마당에서 사진만 찍지 않으시면 됩니다."
"아니, 구경은 시켜주면서 사진은 못 찍게 하는 건 또 뭐야. 차라리 구경을 시키지 말든가... 이런..."

"그거는요, 선생님. 사람들이 관광객으로 가장해 들어와서는 장마당의 이상한 곳만 찍어 왜곡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놔서 그렇습니다."
"그래? 사실은 나도 인터넷에서 그런 것 몇 개 봤지. 그런데 물건은 살 수 있나?"
"그럼요. 사시고 싶은 거 다 사실 수 있습니다."

식당 진열대의 살아있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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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아저씨'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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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나도 귀가 솔깃했다. 식사는 평양보다 훨씬 좋았는데, 아무래도 재료가 싱싱하기 때문인 것 같다. 상에 올라온 것은 주로 해산물 요리였는데, 냉동하지 않은 재료를 사용했단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제일 맛있게 먹은 건 두부부침이었다. 내가 두부가 너무 맛있다고 하자 문호영 안내원이 평생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한다.

"아, 역시 조선음식 맛을 잘 아시네요. 여기가 두부로 유명합니다."
"두부로 유명하다니요?"
"여기서는 바닷물로 두부를 만듭니다. 또 콩이 아주 고소합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두부를 바닷물로 만든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문호영 안내원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남편에게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을 들을까봐 가만히 있기로 했다. 라진의 '바닷물 두부'를 꼭 기억해야겠다.

우리가 이번 여행 때 타게 될 승합차의 운전기사 아저씨는 남편과 동갑이었다. 사슴 같이 선한 눈을 갖고 있다. 마음씨 또한 연하고 선하다. 그러면서도 책임감이 상당히 강한 분이다. 차를 회사 차고에 대놓기 전에는 맥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남편이 아무리 꾀어도 넘어가지 않았다.

운전기사 아저씨는 예전에 포병 군관으로 일했다고 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운전기사 아저씨를 '사슴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분이 '사슴'이라면 내 남편은 '승냥이' 정도일 게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갑내기여서 그런지 여행 내내 아주 가깝게 지냈다. '승냥이' 같은 남편은 '사슴' 같은 운전기사 아저씨를 정말 다정하게 대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다니... 충격과 배신감이 확

옛 일본군 사령부였다는 나진-선봉의 남산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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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문호영 안내원은 우리가 체류할 호텔이 옛 일본 관동군 소속부대의 사령부 건물이었다고 일러준다. 한눈에 봐도 옛 일본식 관청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몹시 오래돼 보인다. 내부를 보니, 사무실을 객실로 개조만 했을 뿐 옛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이 사령부 건물로 무수히 많은 항일 독립군들이 잡혀 와 모진 고문 속에 취조당하며 죽어갔다"고 문호영 안내원이 말해준다. 그런데, 문호영 안내원이 놀라운 이야기를 꺼낸다.

"그 일본의 관동군이라는 부대에 조선 사람들도 장교로 복무했습니다. 만주를 휘젓고 다니면서 독립군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후일 남한의 장군들이 됐으며, 한 사람은 대통령까지 됐습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그 대통령이 누구예요?"
"박정희 대통령."
"뭐요?"

"당신이 존경한다는 바로 그분 말이야."
"박정희 대통령이 관동군이라는 그 부대의 장교였다고요?"
"그래. 박 대통령이 실제로 독립군 토벌에 직접 참가했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그 관동군의 장교였대."

"징병에 끌려간 것이겠지요."
"그랬으면 좋으련만... 뭐 일본에 충성한다는 혈서를 쓰고,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더군. 바로 그 일본 육사,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조선인 일본군 장교들이 나중에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주요 구성원들이 됐고..."
"만주군관학교는 무슨 학교예요?"
"아, 이 사람, 내가 옛날에 그렇게 얘기해도 듣지도 않더니... 이제 그만하고 방으로 갑시다."

옛 일본군 사령부였다는 나진-선봉의 남산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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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충격과 배신감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어려서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했다. 또, 교실에 걸려 있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면서 자랐다. 학교에서 이 헌장을 제일 먼저 외워 상을 받기도 했고, 학생을 대표해서 연단에 올라가 자랑스럽게 암송도 했다. 그런 박정희 대통령이 '혈서를 써 가며 적국의 사관학교에 들어가 적군의 장교가 돼 부역을 한 사람'이었다니... 그리고 훗날 대통령이 됐다니...

마치 나치 독일에 부역한 프랑스 출신 독일군 장교가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에 돌아와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또, 유대계 출신의 독일 나치 장교가 이스라엘에 돌아가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는 격 아닌가.

상하이의 우리 임시정부와 독립군들, 그리고 삼지연에서 본 빨치산 소녀 조각상이 떠오른다. 이 분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인물이었을까. 아마 일본군들보다 더 미웠을지도 모른다. 독립군에 들어가는 대신, 혈서를 써 가며 적국의 장교가 돼 부역을 한 것도 조선 청년 박정희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묻고 싶다.

문득 젊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 감옥에도 가셨던 내 외할아버지가 떠오른다. 개신교 목사셨던 할아버지께서는 후에 제헌국회에 들어가셨으며, 자유당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국회의원을 지내셨다. 박정희 같은 이가 독립 후 창설된 대한민국 국군의 장교가 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외할아버지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5월인데 함경북도의 밤은 춥기만 하다. 호텔방 역시 냉기가 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 방에서 고문을 당하며 취조를 받았던 독립군 병사의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고통스러운 고문과 취조를 조선인 출신의 일본군 장교로부터 당했다는 생각을 하니... 이제는 가슴이 아리다.

내일은 어디를 가 또 무슨 말을 들을는지 겁부터 덜컥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