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61310



저는 오래 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갔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겼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어느날 뜻밖의 전화가 왔다... "평양에 함께 가자"

 

2012년 5월의 북한 여행이 보다 뜻깊은 방문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여러모로 북한을 돕기 위한 계획도 함께 세웠다. 첫째로 자선 단체에서 북한을 열심히 돕고 있는 미국 친구들이 그곳에 있는 탁아소 등을 돕는 길을 열어 놓고 오는 계획을 세웠다. 기회가 닿는 한 초·중·고등학교에 학용품을 지원하는 계획도, 그리고 의약품을 지원하는 방향도 터 놓고 오기 위해 친구들과 우리 부부는 각자들 맡은 분야에서 기쁜 마음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내 마음을 흔드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매년 4월 북한에서 열리는 '세계친선 예술 봄 축전'에 재미동포 예술단이 초청됐는데, 내가 북한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아는 몇 분이 적극적으로 나를 추천했다며 북한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한 것. 150명의 미국인으로 이뤄진 남성 합창단도 간다고 들었다.

 

때마침 베이징에서 북한-미국의 '2·29 합의'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체결됐던 여러 가지 합의 사항 중 하나가 바로 북한과 미국 간의 문화·예술·체육의 교류 증진이었다.

 

나를 추천해 주신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은 일이지만 5월에 미국 친구들과 재미동포 부부, 이렇게 11명이 이미 북한 여행 갈 것을 약속하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흔쾌히 답을 주지 못하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순간,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북한에 닿았을 때 우리 부부를 따뜻한 동포애로 대해줬던 북한 동포들의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다. 김일성 광장에서 매스게임 연습을 하다 우리에게 손을 흔들던 천진난만한 아이들, 모란봉 공원에서 맥주를 권하던 소풍객들, 잠깐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눈물을 글썽였던 북한 동포들의 모습들이 말이다.

 

"그래, 나는 노래로 북한동포들에 대한 나의 사랑과 진심을 전할 수 있겠구나!"

 

내 마음은 어느새 진실한 사랑의 노래를 타고 북쪽 동포들과 마음의 교감을 이루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결심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연에 참가하겠다는 내 생각을 남편에게 이야기하자 남편은 "내 마음까지도 노래에 함께 담아 달라"며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한다.

 

북한 또 간다는 말에 어머니는 머리를 싸매고

 

 해방산 호텔 정면에 있는 연극 대극장.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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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니, 지난 여행 때보다 더 강력하게 나서서 말린다. 5월에 다시 북한을 관광 간다는 소식 때문에 걱정하던 찰나에 예정에도 없던 때에 북한에 다시 가겠다고 하니 말이다. 한국에 살고 계신 내 어머니, 언니, 친지, 친구들은 마치 내가 최전방 전선에 가는 것처럼 걱정에 걱정을 거듭한다.

 

남편도 함께 간다는 소식에 시어머니께서는 자리를 펴고 눕기까지 하셨단다.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소식과 4월 인공위성 발사 소식 때문에 그러신 듯하다. 세계적인 뉴스가 난 상황에서 북한에 간다고 하니 심란하고 걱정스러운 주변 사람들의 마음들이 충분히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북한에 다녀오고 보니, 별다른 걱정이 앞서지 않는다. '불감증'이라고나 할까.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전쟁이 곧 터질 것만 같은 불안한 소식이 들려도 한국을 들락날락했다. 미국 친구들이 "한국 출입을 자제하라"고 말림에도 말이다. 이제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은 북한 동포들과 함께 어울리며, 노래를 통해 그들과 교감할 생각에 되레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최선을 다해 연습해야 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부를 노래를 정하고 연습을 하려 드니 그동안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하나의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연습과 의지로 부담을 떨쳐낼 수밖에.

 

나는 푸치니의 오페라 아리아들과 어둠이 지나가고 희망의 아침이 밝아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레온카발로의 <아침의 노래>를 선곡했다. 내가 부를 노래를 마음으로 경청할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며 노래를 연습하니 저절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기대와 흥분으로 동포들을 마주할 날을 기다렸다.

 

다시 찾은 북한... 이젠 익숙해졌다

 

 출근길 시민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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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9일. 어느덧 두 번째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베이징 공항의 고려항공 카운터 앞에 도착했다. 지난 여행 때보다 훨씬 많은 인파들이 북적북적 댄다. 평상시에는 일주일에 세 번 비행기가 운항한다는데 '친선 봄 축제' 기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비행기가 뜬단다.

 

멀리서 단정한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이 활짝 웃으며 다가온다. 그 여성은 자신이 북한 문화성 직원이며 우리 일행을 마중 나왔다며 정중히 인사를 건넨다. 중국까지 북한 당국자가 마중 나온 것을 보면 이 축제가 대단한 행사인 것 같다.

 

지난 여행 당시에는 북한 고려항공 직원들만 보고서도 마치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 앞자리에 앉아 고지를 향해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마냥 숨도 크게 쉬지 못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마주한 고려항공 카운터 앞 풍경은 그저 늘 봐왔던 공항 안의 낯설지 않은 모습처럼 편안하다.

 

비행기 안의 승무원들도, 그리고 지난번 내 마음에 거부감을 일으켰던 안내 방송의 말씨도 우리나라 다른 지방의 사투리를 듣는 것 같아 어색하지 않다. 마음의 벽을 허무니 모든 것이 친숙하고 안락하게 받아들여진다. 우리나라 몸통에 꽁꽁 매여 있는 답답한 허리띠도 풀어헤쳐 버리면 얼마나 시원하고 편안할까.

 

평양공항은 지난 여행 때와 같이 여전히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임시 건물 같았다. 그 자그마한 건물은 북적대는 사람들로 마치 파장시간을 앞둔 번잡한 시장터처럼 분주했다. 공항이 송두리째 폭발할 것 같기도 했다. 많은 나라에서 찾아온 관광객들과 초청손님들, 그리고 예술단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각자의 말들과 몸짓과 차림새들을 하고 있는 게 벌써 축제의 장을 이뤄 한 편의 예술공연을 보는 것 같다.

 

정신없이 떠밀려 짐 수색대를 지나고 나니 북한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문화성에서 우리를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초청한 기관은 문화성이며 우리가 머무는 동안 안내를 맡은 기관은 해외동포원호위원회라고 한다.

 

공항의 주차장에는 지난해 10월 우리의 관광을 안내한 '조선국제려행사'의 차들도 눈에 들어온다. 20대 중반의 단정한 아가씨들을 보면 모두 설경이처럼 보인다. 북녘땅에 도착하고 보니 더욱더 설경이가 보고 싶다. 혹시나 우연히 만나게 될 수 있을는지.

 

'로동신문' 네 글자에 평양임을 직감

   

 해방산 호텔 오른쪽에 있는 <로동신문> 본사.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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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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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재미동포 예술단'이 열흘 동안 묵게 될 숙소, 해방산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에서는 유럽과 중국서 온 예술단원들이 방 배정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의 맞은 편에는 고전미와 현대미가 어우러진 '연극 대극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로동신문사'가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평양대극장'과 '김일성 광장'이 있다. '해방산 호텔' '로동신문사'라는 건물의 이름을 보니 내가 북한 땅에 다시 온 것이 실감 난다.

 

우리들을 열흘간 안내하며 데리고 다닐 이들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김정남 아저씨, 그리고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박정철 아저씨. 그들의 짧은 환영 인사와 '내일 오전 9시에 로비에서 재미 예술단이 모여 리허설을 하러 간다'는 짧은 공지만 들은 후 우리는 객실로 올라갔다. 4월 평양의 밤은 아직도 냉기가 흐른다.

 

평양의 아침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로 시작된다. 사방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우리 부부는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정체불명의 소리들이 창밖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마치 행진이라도 하듯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다. 출근을 하는 모양이다.

 

북한 출근길의 민낯 이렇습니다

 

 출근길 시민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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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길 시민들.
ⓒ 신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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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니 오전 7시다. 호텔 모닝콜이 따로 없는 듯하다. 남편은 바깥 구경을 하러 나가겠다며 분주하게 준비한다. 사실 나는 오늘 오전에 있을 리허설을 위해 좀 더 잠을 자고 싶었으나 이 상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나는 '일어나서 아침 공기나 마시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준비를 마친 후 로비로 내려가니, 박정철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다.

 

"바깥소리에 잠을 푹 주무시지 못하셨습네까? 조금 전에 정 선생님(남편)께서는 산책하러 나가셨습네다."

 

박정철 아저씨는 왠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남편이 한바탕 불평을 늘어놓고 나갔음이 분명하다.

 

 출근길 시민들을 위해 연주하는 중학교 밴드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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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철 아저씨는 "아침부터 희망차고 즐겁게 하루를 시작하라고 틀어주는 음악"이라며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굳이 바깥 음악을 설명한다. 내 귀에는 음악 소리라기 보다는 주파수를 잘못 맞춰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소음 같다. 얼핏 바깥을 내다보니 길 건너 '연극 대극장' 앞에서는 중학교 밴드부 학생들이 열심히 나팔을 불고 있다. 출근길 시민들을 격려하기 위해 연주를 한단다.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미네소타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우리 음대 바이올린 교수로 계셨던 분으로 나와는 같은 교회도 다녔고, 연주도 여러 번 함께하며 가까이 지냈던 선생님이시다. 너무 반가워 소녀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선생님도 이번 예술단 공연에 초대돼 오셨단다.

 

우리는 머릿속, 빛바랜 사진첩을 꺼내보며 지난날의 향수에 젖어 아침식사도 잊은 채 이야기를 나눴다. 옆에서 박정철 안내원이 더 흥분해 한마디 거든다. "누가 보면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줄 알겠습네다"라며...

 

음악에 담긴 마음의 교감... 이미 시작됐더라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연주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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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대 캠퍼스에 서 있는 북한의 작곡가 김원균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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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예술단의 이름으로는 세 명의 성악가와 한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 그리고 한 명의 지휘자 등 총 다섯 명이 초대돼 이곳 평양에 와 있다. 우리는 첫 리허설을 하기 위해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연주홀로 갔다. 북한 최고의 예술대학이라고 한다.

 

'김원균'이라는 이름을 들으니 생각이 났다. 지난해 10월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 궁전에 갔을 때, 설경이가 설명해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북한 국가를 작곡했다는 그 작곡가의 이름이었다.

 

이미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연주홀에 도착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연주홀 로비에 들어서니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유명한 아리아인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가 들린다. 아! 아름다운 선율이 내 심장 박동을 멈춰 버릴 것만 같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음악의 언어를 싣고 이미 마음과 마음으로 교감을 나누고 있었다.

 

 연습 중인 평양 음대 오케스트라 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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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홀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30대 정도 돼 보이는 지휘자에 맞춰 혼연일치가 돼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옆에 있던 우리 안내원 아저씨가 귀띔해준다. "저 지휘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하고 온 재능 있는 지휘자"라고 말이다. 오케스트라는 학생들과 교원들로 이뤄져 있으며 수준 높은 연주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내 차례가 돼 리허설을 했다. 멋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니 노래가 절로 흥겹다. 온통 음악을 품어 안고 황홀하게 연주홀 안을 날아다니는 기분이다. 연습 내내 사랑의 노래를 들어 줄 북한 동포들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러나 이런 흥취도 잠시, 리허설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남성이 다가왔다. 문화성에서 나온 음악감독이라고 한다.

 

"저 혹시... 우리 노래를 불러주시면 안 되겠습네까? 외국곡들은 외국 사람들에게 부르라고 하고, 신 선생님께서는 우리 동포로서 우리 조선의 노래를 불러주시면 인민들이 정말 좋아할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말입네다. 갑자기 무리인 줄 알지만 선생님이라면 해 주실 수 있을 것 같아서..."

 

공연까지 이틀밖에 안 남았는데 무리는 말할 것도 없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성격의 부탁이었다. 이곳 노래를 불러 북한 동포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나누고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은 좋으나 불가능해 보였다. 생각도 해보기 전에 음악감독은 "부탁합네다"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무심히 사라져 버렸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박정철 안내원이 나를 위로할 뿐이었다.

 

"선생님이라면 할 수 있다 싶어서 부탁하신 것 같습네다. 그리고 선생님한테서는 뭔가 우리 동포를 끌어들이는 특별한 감성이 있단 말입네다."

 

 피아노 반주자와 함께 연습 중인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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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말인 줄 알면서도 할 수 있다는 힘과 의지가 생긴다. 마침 내가 미국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통해 알아낸 <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북한 노래 한 곡을 준비해 오긴 했다. 모두 세 곡을 불러 달라고 하는데 나머지 두 곡은 어찌하란 말인가...

 

박정철 안내원에게 북한 주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곡이 어떤 것인지 물어봤다. 박정철 안내원은 "<심장에 남는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예전에 남쪽의 손님들이 와서 많이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노래로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라는 노래가 있는데, 북한 동포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계획된 노래라 오케스트라 악보가 준비돼 있지 않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불러야 한단다. 그나마 피아노 반주로도 악보가 준비돼 있지 않아 반주자와 함께 논의해 반주 악보를 그려야 할 상황이었다.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피아노 반주자 박혜영 선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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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반주를 해 줄 한 선생을 만나게 됐다. 자신을 박혜영이라고 소개한 그 반주자 선생은 다행히도 세 곡의 멜로디를 정확히 알고 있어서 곡조를 익히는 것과 반주 악보를 준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듯 이틀 동안 잠자는 시간마저도 흥얼흥얼 연습을 했다. 동포들과 한마음이 돼 노래를 부를 생각에 초인적인 기억력과 에너지가 생겼나 보다.

 

피아노 반주자 박혜영 선생은 26세며 이 학교의 교원이라고 한다. 어릴 때 동네에서 '피아노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서 자신이 정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신동인 줄 알았단다. 그녀의 꿈은 '금성학원'에 들어와서 깨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금성학원'은 굳이 비유하자면 한국의 예술고등학교인데 그 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북한의 날고 기는 '예술 학생'들이 다 모여 있었단다.

 

박혜영 선생은 "그래도 우리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제가 피아노를 제일 잘 치는 줄 아신다"며 애교 있게 말한다. 말하는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서로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연습을 하는 데도 오랫동안 함께 연주해 왔던 사람처럼 감정 표현과 곡 해석이 놀라울 정도로 편하게 일치한다. 또한, 즉흥적으로 주문한 곡의 편곡도 아무런 어려움없이 능숙하게 잘해낸다.

 

공연 전날, 참 설렜습니다

 

 왼쪽부터 남편, 해방산 호텔 식당의 웨이트레스 황연희, 그리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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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자와 함께 연습하고 나니 자신감이 부쩍 생겼다. 옆에서 우리의 연습 과정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남편과 박정철 안내원도 응원의 박수와 함께 미소로 우리에게 힘을 줬다. 연습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자동차 속. 내 마음은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가벼웠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호텔 안 식당에 들렀다. 유난히 미소가 예쁜 아가씨가 우리 일행을 반기면서 자리를 안내한다. 웨이트리스 아가씨의 이름은 황연희. 그녀의 아버지는 의과대학 교수고 어머니는 의사란다. 그녀는 "많은 외국 사람들에게 조국을 바로 알리며, 또한 조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 드리고 싶어서 관광대학을 나왔다"고 한다. 말하는 모습이 참 상냥하다. 그 후 일 주일 동안 우리는 그녀 덕분에 서늘한 4월의 평양에서 따스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지낼 수 있었다.

 

내일은 첫 공연이 시작되는 날. 공연을 앞두고 이렇게 가슴이 설레는 경험을 한 기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