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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협력이 살길이다”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한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2012년 07월 20일 (금) 15:00:25 김치관 기자 ckkim@tongilnews.com

   
▲ 제14회 한겨레통일문화상을 수상한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과 19일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이번 수상 결정은 이태호 사무처장이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평화군축 분야에서 기여한 데 대한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번 수상 결정은 또 통일운동이 시민운동진영과 연대를 넓혀가는 데 대해 심사위원단이 주목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지난 18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열린 제14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시상식에서 안병욱 심사위원장은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수상자로 선정한 사유를 “폭넓은 이론 작업을 진행하면서 실천에도 앞장서고 있는 일선 활동가를 격려함으로써 통일, 평화문제에 대한 관심의 폭을 한층 넓혀보자는 생각도 해보았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이태호 처장은 19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도 의외였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지금 모든 것의 병목지점이 되고 있는 천안함을 둘러싼 의혹,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검증 같은 것에 대해서 사회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그 도구로 저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천안함 사건과 관련 “국가관 검증이라고 하는 냉정적 캠페인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걱정된다”며 “국제적인 공동의 검증이랄지, 북한도 포함시켜서 공동검증 작업을 하거나 검증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 차이를 객관화하는 대화틀이라도 우선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말 국방부의 무기도입 비리 내부고발자 지원활동을 시작으로 2003년 설립된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를 통해 활발한 평화운동을 펼친 이 처장은 “권력감시운동을 하다보면 분단체제라는 게 어느 정도 실제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며 “참여연대가 평화군축운동을 하게 된 것은 필연”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년이 정전 60년이다. 그런데 지금 천안함 이후 남북관계는 정전 이후 최악”이라며 “‘한반도 평화만들기 캠페인’을 우리가 당분간 집중해야 할 중기 사업과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민군 출신의 보수적 목사를 아버지로 둔 그가  집회의 현장에서, 토론회장에서,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평화를 위해 부지런히 걸어온 길이  “조금씩 조금씩 사람의 마음속으로부터 무장이 해제되고 신뢰가 싹트고 뭔가 평화를 위해서 협력해야 한다는 동기가 싹트는”데 밑거름이 된 것이 이 상을 받게 된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다음은 19일 오후 2시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진행한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과의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기념 인터뷰 내용이다. 

“천안함 사회적 문제제기 도구로 저를 선택” 

   
▲ 18일 한겨레신문사에서 임동원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으로부터 한겨레통일상을 수상한 이태호 처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 - 한겨레통일문화재단]
□ 한겨레통일문화상이라는 큰 상을 수상했는데 소감은? 

■ 사실 제가 받을 상은 아닌 것 같다. 평화통일운동에 한평생을 바친 분들을 주로 수상자로 정해 온 굉장히 큰 상인데 저는 연조도 많지 않고, 평화통일 분야에 전담해 활동해온 것도 아니다. 현장 실무자를 격려한다는 차원에서 보더라도 더 열악한 조건에서 분투하고 있는 현장 활동가들도 많다. 그런 점에서 저 스스로도 의외였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선정 경위를 들어보면 남북관계가 너무 대치국면으로 가고 있고, 통일운동 만이 아니라 평화운동, 그리고 시민운동에서 평화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재단 측에서 본 것 같다. 특히 지금 모든 것의 병목지점이 되고 있는 천안함을 둘러싼 의혹,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검증 같은 것에 대해서 사회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그 도구로 저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시민운동단체로서는 드물게 참여연대가 평화군축센터를 운영해온 것이 수상 배경이라 생각된다. 

■ 참여연대 초기는 주로 권력감시 차원에서 안보권력 감시운동도 일부 하기는 했다. 특히 내부고발자 지원 운동이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FX사업 내부고발자 조주형 대령을 지원하는 운동으로 시작했다가 무기도입을 반대하는 사업으로 간 케이스였다. 그 외에 비슷한 사례는 한국형 전차 개발 비리도 내부고발 사업으로 시작해서 국방개혁으로 간 케이스다. 

그런 걸 하다 보니까 그 즈음에 6.15선언도 있었고, ‘민주화라든가 권력감시라고 하는 것이 남한 내의 상황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 한반도 전체를 보고 대안이나 모니터사업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2002년부터 준비해서 2003년에 평화군축센터가 생긴 것이다. 미선이 효순이 촛불집회 할 때 준비단위가 구성돼 있었고, 실제 활동은 2003년 초 이라크파병반대 1인시위를 박순성 교수가 하면서 대외활동이 처음 시작됐다. 

□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가 요즘 다루고 있는 주요 현안은? 

■ 평화군축센터니까 아무래도 크게 보면 한반도와 관련된 정책 모니터를 한다. 예를 들어서 한반도 핵문제와 6자회담을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느냐. 그래서 6자회담을 모니터하기도 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동북아 비핵지대를 추진하는 캠페인도 같이 하고 있다. 

그 다음에 국방예산을 좀 줄이고 국방부의 부실과 비효율도 제거하자 해서, 국방감시 내지는 군축운동을 같이 하고 있다. 이번 FX사업 같은 무기도입 모니터링 사업도 있고, 국방예산을 감축하기 위한 국방예산 감시도 있다. 그 영역에는 제주해군기지 반대운동도 들어간다. 불요불급한 기지를 주민 동의 없이 만들면서 해양의 군사화를 초래하니까, 이런 사업들도 국방감시 군축사업에 해당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평화주체들을 형성하고 평화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노력들을 한다. 평화활동가대회, 평화군축박람회, 평화학교, 이런 평화운동이나 평화군축운동을 대중화하기 위한 교육, 컨텐츠 프로그램, 주체형성 프로그램 같은 것에 신경 쓴다. 

평화군축센터 사업은 아니지만 참여연대 차원에서 6.15남측위원회와 같이 해서 민간교류협력사업도 함께 하고 있다. 남과 북의 대화나 교류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봐서 6.15남측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저는 정책위원회 간사를 계속해왔고,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돼서 지금은 본격 활동은 안하고 있는데 올해부터는 6.15남측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고는 있다. 

“안보권력 감시운동이 국방개혁으로” 

   
▲ 이라크파병 반대운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이태호 처장.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평화군축센터 활동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 저희가 시작하면서 했던 이라크파병 반대운동이다. 국익이나 실리라는 이유로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참여하는데, 그 과정에서 국민 동의절차 같은 것도 없이 그냥 미국이나 강대국의 압력에 떠밀리듯이 진행해왔고, 그것은 우리 헌법에도 위배되고 안전하지도 않다는 파병반대운동을 2003년부터 이라크에서 미군이 최종적으로 철군할 때인 2008년까지 6년간 했다. 그런데 그 뒤에 아프간 재파병을 해서 그 (반대)사업도 계속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군대를 너무 쉽게 해외로 보내고 있다. PKO(평화유지군)도 마찬가지다. 파병 감시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그 다음에 무기도입 감시운동을 하고 있다. 평화군축센터 활동 초기에 한국형 다목적헬기 사업 반대운동을 해서 실제로 감사원 감사를 통해 거의 스톱시켰다. 그런데 그것을 다목적 헬기가 아니라 한국형 기동헬기로 다시 추진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 사업을 하면서 무기도입사업에 대한 모니터링도 전형을 남겼지만 그 뒤로 외교.국방.안보 정보공개 운동을 했다. 천안함 문제도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데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 

□ 시민운동단체가 평화군축 운동을 한 것은 전례도 거의 없었을 것이고,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 우리나라에서 평화군축운동을 한다거나 안보권력의 투명성을 요구한다거나, 민주화시키자거나 민주적으로 통제하자거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거나 이상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지만 지금만 해도 남북한이 군사적으로 대치해서 남북교류협력이 다 막혔는데 당장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고통 받게 된다. 투자자가 파산하기도 하고 일부는 자살하기도 했다. 특히 지금 같이 세계경제위기가 있을 때는 우리 정부가 흔히 말하는 성장동력을 찾아야 되는데 남북 경제협력이라든가 중국과의 협력은 굉장히 중요한 성장동력이 될 수 있는데, 새로운 냉전질서 속에 갇혀 있어서 그런 기회를 잃어버린다든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는 이야기가 먼 이야기, 몽상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는 굉장히 절실한 운동이다. 예전에는 좀 낯설어했지만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또 공감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상황은 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큰 문제다. 

두 번째로는 정보의 절대적 부족이다. 천안함 문제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 제주기지 문제도 그렇고 예전에 저희가 모니터링 했던 전략적 유연성, 주한미군 재배치와 관련된 것도 문제는 뻔히 보이는데 정확한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이것은 사실은 시민단체 문제가 아니라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 조차도 하나도 못 받았다. 천안함 보고서를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500페이지 짜리를 보고 있는데 우리 국회의원들은 10페이지 짜리를 봤다. 

마지막으로 냉전적 인식들이다. 저거 하면 빨갱이가 하는 거고, 저거 하면 종북주의다. 그런데 천안함 같은 경우도 ‘정보 투명하게 공개해라. 과학적 엄밀성을 가져라. 시민들이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게 놔둬라’, 이게 자유민주주의 덕목에서 하나도 벗어난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런데 이런 것이 색깔론으로 덧칠돼서 주장의 합리성들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장애물이다. 

“천안함이 남북 간 병목지점” 

   
▲ 지난 5월 11일 국회에서 민주통합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과 함께 미국 광우병 발생에 따른 쇠고기 수입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천안함 문제가 수상 사유에 중요하게 거론됐는데, 특히 참여연대가 낸 유엔안보리 의견서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 천안함 문제도 진짜 많은 분들이 했다. 그 점에서 본다면 참여연대가 더 많이 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 같은 경우 시종일관 애썼고, 그리고 서재정, 이승헌 등 연구자들이 구체적으로 과학적 근거를 제기함으로써 기여했다. 그리고 많은 비판적 언론들이 이 문제에 달려들었고, 무엇보다 시민들 스스로 이 문제 진상규명 하자고 나선 것이 정말로 드문 일이고 우리 사회운동 역사에서 보면 기념비적인 사례들이다. 그런 점에서 저희는 그 일원이었던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유엔안보리에 서한을 보냈던 평통사도 있었다.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우리는 하나였다. 

저희는 천안함 그 자체로 접근하기 보다는 안보과 연관된 사안의 투명성 문제로 접근했고 그래서 초기에 내용보다 절차에 집중했다. ‘왜 정보공개를 안하나, 왜 말을 바꾸냐, 합조단이라고 하는데 민간이 누가 있느냐, 그것과 관련해서 실종자 가족들이나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조사에 참가시킬 거냐’. 5월 20일까지는 그런 문제를 집중적으로 모니터링 했고, 정보공개 청구도 하고 관련 토론회도 열고, 유사한 사례들에 대해서 제시하기도 했다. 

5월 20일, 그때는 중간결과보고라도 안했고 결과보고라고 했는데, 갑자기 건져낸 어뢰부품도 신통치 않고 어뢰 설계도도 신빙성이 없고, 무엇보다도 해외조사단의 역할이 스스로 말한 것에 비해서 없어 보였다. 그리고 연어급 잠수정이 갑자기 튀어나왔고, 길지는 않지만 8~9년 모니터링해 온 저희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북한 장비가 소개되니까 이것에 대해 따져봐야겠다. 이러면서 내용에 대한 문제제기를 본격적으로 했다. 

전체적으로 저희의 접근은 투명성과 책임성을 요구한 것이었고, 그 다음에 시민이 생각하는 상식, 누가 보기에도 자명한 사실적 근거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합리적 의문들을 몇 가지로 요약해 나가는, 역할이라면 역할을 저희가 했다. 

유엔안보리 의견서를 제출할 때쯤에는 상당히 전문적인 비판들도 나왔는데 의도적으로 전문적인 얘기를 뺐다. 예를 들어 알루미늄산화물 논쟁에 대해서는 자세히 소개하기 보다는 ‘왜 폭발이 일어났으면 화약산화물을 이야기 해야지 엉뚱하게 알루미늄 산화물을 가지고 설명하느냐, 이상하다’ 이런 정도로만 접근했다. 

그런 식으로 합리적 상식을 가지고 했고, 그런 면에서 유엔에 문제제기한 것도 사실은 시민이라면 할 수 있는 상식적인 행동이라고 했는데 몰상식한 반국민적 행위로 비난을 받게 된 게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계기가 됐던 것 같다. 

□ 아직도 천안함 사건은 흔쾌하게 받아들일 만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선을 맞게 됐다. 천안함 사건을 향후 어떻게 대응하려 하나? 

■ 저는 계속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우리 정치권이 <조선일보> 사설이 권했던 방식이라도 해야 한다. 최종 발표 난 다음날 <조선일보>가 사설란을 통으로 털어서 천안함을 썼다. ‘왜 섣부르게 정치적으로 오해받게 하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난삽한 방식으로 해서 의혹을 가중시키느냐. 천안함특위 두 번 밖에 안 했고 검증절차도 없었다. 그러면 국회가 책임지고 이 문제를 가져가서 철저하게 검증하고 드러난 모든 의혹을 올려놓고 토론해라. 그리고 각계 전문가들로부터 검증을 받아서 국민의 의혹을 한 점 없이 씼어라. 국정조사에 버금가는 행동을 해라’. <조선일보>가 제기했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그 얘기는 까먹었는지, 이 문제를 제기하면 자기가 제안했던 것을 주장하는 데도 “왜 입증된 사실을 가지고 트집을 잡느냐”라고 색깔론, 마녀사냥의 선두에 서 있지만 <조선일보> 논설위원들이 제안했던 방법을 우리는 제안하는 것이다. 적어도 19대 국회라면, 이 정부가 할 수 없다면 차기 정부라도 그런 노력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안 할 수 없는 것이 천안함이 남북 간 병목지점으로 딱 있기 때문에, 그냥 그걸로 정리하고 ‘골치아픈데 치우자, 오해와 불신은 있지만 더 거론하지 말자’라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남북이 그것 때문에 계속 갈등되고 군사갈등이 추가로 발생하고, 그것 때문에 서해안에 핵잠수함도 핵항공모함도 들어오고, 그것이 한중 간에 갈등도 되고, 그것 때문에 한미일 군사협력도 되고, 눈덩이처럼 부정적 영향이 확대돼서 동북아 전체가 군사화되고 있는데 왜 이 문제에 대해서 국제적인 이해의 차이를 두고 그냥 갈 수 있겠느냐. 

이것에 대해 정의를 내려야 된다. 해결 안 된 사건이라든가, 해결하기 쉽지 않다든가, 누구 말이 맞다든가, 그 셋 중 하나로는 정리가 돼야 하는데 ‘네 죄를 알렸다’는 식으로 계속 가고 있으니 오해와 갈등, 불신이 계속 오고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응도 훨씬 더 거칠게 되는 것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해서 국제적인 공동의 검증이랄지, 북한도 포함시켜서 공동검증 작업을 하거나 검증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 차이를 객관화하는 대화틀이라도 우선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일각에서는 대선과 맞물려서 천안함 사건이 재론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대선국면에서 천안함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고 보나? 

■ 지금 천안함을 대선에서 다루고자 한 사람은 우리보다 오히려 보수단체나 보수정치세력, 보수언론이 더 많은 것 같다. 천안함 문제가 또 심각한 것 중 하나가 그게 일종의 신앙식으로 돼서 ‘폭침을 믿느냐’는 식의 말하자면 매카시즘 캠페인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검증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 무슨 안보교육의 교재가 되고 집단적인 학습의 교과서가 되는 것이 문제다. 그런 캠페인들을 대선을 겨냥해서 정략적 이해관계 때문에 하려고 하는 것이다. 

6.2지방선거에서 사실은 천안함 문제를 가지고 5.24조치 때리고 대통령이 전쟁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용하려고 했는데 잘 안 먹혔다. 하지만 헌법 재판관 후보에게 ‘네 죄를 알렸다. 이것을 믿느냐’ 해서 ‘아니 그것은 좀더 합리적으로 접근해 봐야 된다’라는 얘기만을 가지고 국가관 운운해서 낙마시킨 사례도 있어서, 말하자면 국가관 검증이라고 하는 냉정적 캠페인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걱정된다. 

그런 맥락에서 천안함 진실을 밝히고 우리 사회에 있는 갈등의 원인을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해야지 신앙이나 이념적 잣대로 접근하는 태도는 제한돼야 하고 자제돼야 하고, 만류되어야 한다. 대선에서 그런 정략적 캠페인이 나올 지 걱정이다. 저는 오히려 국회가 책임있게, 그리고 새 정부가 책임있게 다루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불필요하게 대선에서 정략적 관점에서 등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초정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선배가 연단에 올라가서 ‘백두여! 한라여!’ 외치고 있더라” 

   
▲ 지난해 11월 22일 한미FTA협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자 국회 인근에서 열린 규탄집회에서 규탄연설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시민사회단체 젊은 실무자들을 대표해 수상한 셈이라고 했는데, 평화통일단체 실무자들의 실상이 어떠하고 어떤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보나? 

■ 우리사회에서 평화단체 나아가 통일단체까지 안정적인 물적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해 열악하고 힘든 조건이다. 그리고 민주화운동이나 복지운동 같은 경우 대중적 관심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조명도 많이 받는 반면, 평화통일운동은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관심의 외곽에 있다 보니까 굉장히 힘든 싸움을 해야 한다. 

또 안보라는 사안이 단기간에 성과가 나는 사업이 아니지 않느냐. 조금씩 조금씩 사람의 마음속으로부터 무장이 해제되고 신뢰가 싹트고 뭔가 평화를 위해서 협력해야 한다는 동기가 싹트는 긴 사업이기 때문에 결과가 바로 안 나온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로 어렵다. 

예를 들어서 강정마을만 하더라도 사실 강정마을은 5년 된 싸움이다. 그렇지만 제주해군기지 싸움은 2002년부터 진행된 싸움이다. 화순에서 위미에서 진행됐던 싸움들인데, 지금 강정마을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알게 됐지만 그전까지의 굉장히 외로웠던 싸움들은 기억을 못하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그때 그 문제를 위해서 싸웠던 사람들은 굉장히 외롭고 힘든 싸움을 했다. 그리고 알려진 뒤에도 평화활동가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제도적으로 보장된 틀이 아니라 마을에서 주민으로 살면서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맨몸으로 싸우고 있다. 

또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을 했던 분들도 보면 스스로를 소수자로 만든 것 아니냐. 우리나라 같이 병역기피도 심하면서도 병역의무는 너무 중요하다고 하는 사회에서는 ‘우리는 소방대에 가서 국가에 공적으로 기여하겠다’는 그러한 시민들을 받아들일 공간이 너무 없다. 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 스스로 거부하고 감방에 갔다 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그 뒤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직업도 제대로 갖지 못하고 평생을 평화운동가로서 살아가는 친구들 같은 경우는 정말로 대단한 거다. 이런 사람들의 선구적인 고통들이나 노력들이 새롭게 조명 받았으면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또 통일운동도 어르신들 말고 정말 젊었을 때부터 통일운동을 실무적으로 계속 같이해온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이 이번에 같이 상 받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 남북교류가 다 차단돼 있는데도 어쨌든 그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분들, 그걸 하기 위해서 실무접촉 한 번 했는데, 그거 했다고 과태료 물고 범법자 되고 이런 분들, 이런 분들의 노력도 기억해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 개인적으로 어떤 계기로 평화군축 쪽 일을 담당하게 됐나? 

■ 참여연대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주로 반부패 활동을 했다. 주로 전형적인 권력감시운동을 하는 간사였고 그런 활동 끝에 정책실장도 하게 된 거다. 사실은 그거 하다가 국방과 안보와 관련된 양심선언자들, 내부고발자들과 만나서 그분들을 돕기 위한 활동들을 집중적으로 해야겠다는 계기가 있었다. 

사실은 그 전에도 참여연대가 평화통일 쪽을 계속해야 된다라고 하는 입장을 가졌었고 저 스스로 그 운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북한돕기 운동 같은 것을 참여연대 들어온 직후 법륜스님 등이랑 같이했다. 

그리고 저 스스로가 학생 통일운동이 막 시작될 때 그 운동에 참여했던 김중기 씨가 제 세미나 선배였다. 김중기 씨는 지금은 영화배우하고 있지만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던 선배였다. 어느 날 보니까 맨날 세미나 해주던 선배가 연단에 올라가서 “백두여! 한라여!” 외치고 있더라. 그때부터 ‘아,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보자’하고 통일운동을 같이했다. 

그리고 우리 세대가 관심을 가지 수밖에 없는 세대였다. 86년 87년에 대학을 다닌 세대는 전방입소 반대운동을 했다. 전방입소 반대하면서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분신한 것을 옆에서 지켜본 세대다. 저 스스로도 학생운동을 늦게 했다. 2학년 때 전방입소 갈거냐 말거냐를 가지고 과내 토론회를 하다가 “이것만은 사람이 죽음으로 호소한 이슈인데 더 토론해봐야 되지 않느냐”라고 하다가 운동권이 되고 6월항쟁에 나가면서 학생운동을 본격적으로 한 케이스다. 

그래서 평화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계속해야 된다는 생각이었고 또 권력감시 운동 하다보면 ‘안보라는 성역이 있으면 결국 민주화는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에 ‘복지니 사회경제적 요구를 주장하는 것도 결국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낀다. 뭔가 특권에 도전하려고 그러면 어떤 공포 같은 것을 동원해서 그걸 못하게 하는 기제가 분단상황에서 항상 발생한다. 

이것을 백낙청 선생 같은 경우는 분단체제라고 정의했는데, 권력감시운동을 하다보면 분단체제라는 게 어느 정도 실제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권력감시운동을 하다보면 안보권력 감시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제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참여연대가 평화군축운동을 하게 된 것은 필연이라고 본다. 

아버지는 인민군, 어머니는 종군 간호장교 

   
▲ ‘2013년 정전 60년을 한반도 평화원년으로 삼자’는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태호 처장. [사진 - 민족21 백운종 기자]
□ 부모님이 살아오신 과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기사를 봤다. 

■ 굳이 개인사를 이야기 하자면, 우리 아버지가 인민군이었다가 탈영해서 남한에 정착한 분이고, 우리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문에 차출돼서 종군하게 된 간호장교였다. 우리 가족은 한국전쟁이 맺어줬는데 우리 아버지는 첫 부인과 갓난 아들을 북한에 두고 왔다. 아버지는 북에 두고 온 아들이 죽었다고 믿고 이산가족 찾기도 잘 안 하셨다. 그렇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배다른 형님이 북에 계신 거다. 

제가 대학 졸업하고 한참 후에야 그걸 말씀하셨다. 가족사 자체가 좀 한반도 분단과 깊이 연관돼 있다. 아버지는 대개 반공주의자셨다. 월남 목사님이니 오죽하겠나. 천안함 사건 나기 전에 양친이 다 돌아가셨는데 계셨으면 되게 혼났을 것이다.(웃음) 

□ 이번 수상을 계기로 마음먹거나 새롭게 구상하는 것은? 

■ 내년이 정전 60년이다. 그런데 지금 천안함 이후 남북관계는 정전 이후 최악이다. 이걸 돌파할 수 있는 뭔가 사회적인 노력들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 평화협정운동이라기는 너무 좁아 보이고 평화와 협력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대서양 시대가 끝나고 동아시아 시대가 온다는데, 우리 분단된 나라가 여기서 평화가 올 때 가장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곳인데, 한반도가 오히려 긴장과 갈등과 분쟁의 무슨 진원지 같이 돼서는 우리한테도 답이 없고 주변에도 민폐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장기적인 한반도 비전이나 국가전략으로 어쨌든 평화와 협력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좀 했으면 한다. ‘한반도 평화만들기 캠페인’을 우리가 당분간 집중해야할 중기 사업과제로 하고 있다. 이것을 좀더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할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제주해군기지 반대 운동, 천안함 진상규명 운동도 조금 더 열심히 해야 된다. 

이런 다짐을 할까봐 우리 상근자들이 상받는 것을 반대했다. “네가 상 받으면 일이 더 많아진다”고.(웃음) 평화단체에 지금 연대를 촉진할 단체가 없다. 그래서 참여연대가 자꾸 그런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되니까 참여연대는 크지만 평화군축센터는 작아서 굉장히 과부하가 걸려있는 상태이기는 하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래서 7월 26일 ‘2013년 정전 60년을 한반도 평화원년으로 삼자’는 시국선언을 준비하고 있다. 저희뿐만 아니라 평통사, 시민평화포럼 다 같이 준비하고 있다. 그걸 계기로 이번 대선에서 ‘2012년에는 평화와 협력이 생존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가 합의하자’는 새로운 사회적 합의 운동, ‘평화를 선택하자 운동’ 같은 것을 하려 한다. 

‘민주주의 하자’, ‘복지 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이걸 위해서라도 대결이 아니고 경쟁이 아니고 평화와 협력이 살길이다. 이런 건 아무도 국가가 선택해야 될 전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앞으로 동북아 시대를 살아나갈 한반도, 그리고 특히 남한의 전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당장 그런 거 하자고 하면 북한은 아직 여력이 없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여유 있는 남한이 먼저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이 평화와 협력을 실천하고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화해협력의 룰들을 만들어내고 동북아 평화체제도 만들어내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자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약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다. 동북아 균형자 이야기는 했지만 군비증강하면서, 전략적 유연성 수용하고, ‘통일되면 주한미군 주둔해도 좋다’는 합의 만들면서 그런 걸 했으니까 결국은 현실화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