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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위키리크스가 발가벗긴 한미관계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입력 2011-09-12 11:33:26 / 수정 2011-09-12 11:44:18
<민중의소리> 칼럼니스트인 한호석(56)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미국 뉴욕에 거주하면서 통일학과 한반도 정세분석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범민련 재미본부 사무국장, 6.15미국위원회 사무국장을 거쳐 민주노동당 미국동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평양회담과 연방제통일의 길>(2000년), <자주적 민주정부와 자주적 통일정부를 향하여>(2005년)가 있습니다.


2010년 11월 28일부터 최근까지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킬릭스(Wikileaks)가 공개한 미국 국무부 전문(cable)은 모두 251,287 편이다. 그 방대한 문서들은 1966년 12월 28일부터 2010년 2월 25일 사이에 작성된 것인데, 2급 비밀(secret)로 분류된 문서가 15,652 편, 3급 비밀(confidential)로 분류된 문서가 101,748 편, 일반(unclassified)으로 분류된 문서가 133,887 편이다. 이 문서들은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대사관 관리들이 작성하여 비밀 인터넷통신 소통망(Secret Internet Protocol Router Network)을 통해 미국의 각 정부기관들과 군부에 보낸 것이다. 1급 비밀(top secret)로 분류되는 문서들은 비밀 인터넷통신 소통망을 통해 보내지 않으므로, 위킬릭스에 노출된 기밀문서들에는 1급 비밀로 분류되는 문서들이 없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주한미국대사관이 비밀 인터넷통신 소통망을 통해 보냈다가 위킬릭스에 노출된 기밀문서들이다. 특히 2011년 8월 30일 위킬릭스가 공개한 전문들 가운데 주한미국대사관이 보낸 전문 1,980 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1,980 편은 거의 모두 2006년 1월 1일부터 2010년 2월 28일 사이에 보낸 것인데, 2006년에 431 편, 2007년에 380 편, 2008년에 367 편, 2009년에 690 편, 2010년에 102 편을 보냈다. 예컨대, 주한미국대사관이 2007년 3월 12일에 보낸, ‘한국 대선후보들, 누구의 표가 감소하는가(ROK PRESIDENTIAL CANDIDATES:WHO IS SEEING DIMINISHING RETURNS?)’라는 제목의 2급 비밀문서를 받아본 곳은, 미국 국무부 장관실, 주중미국대사관, 주일미국대사관, 태평양사령부, 주일미국군사령부, 주한미국군사령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미국 국방부 장관실이다.

위킬릭스에 노출된 주한미국대사관 전문 작성자들은 2대에 걸친 대사들인 알렉산더 버쉬바우(Alexander Vershbow)나 캐틀린 스티븐스(Kathleen Stephens), 부대사(Deputy Chief of Mission) 패트릭 라인한(Patrick Linehan), 공사(Chargé D'affaires) 윌리엄 스탠턴(William A. Stanton), 정치부 참사(Political Minister-Counselor)들인 조셉 윤(Joseph Y. Yun)이나 브라이언 맥피터스(Brian D. McFeeters) 등이다.

위킬릭스에 노출된 전문들을 읽어보면, 주한미국대사관 관리들의 주요활동은 한국 정부 고위관리들과 접촉하는 일이다. 물론 그들의 접촉은 언론의 눈을 피해 이루어지는 비밀접촉이다. 주한미국대사관 관리들의 비밀접촉대상은 전현직 대통령들과 청와대 고위관리들, 외교통상부와 국방부와 통일부와 재정경제부 전현직 장관들과 고위관리들, 국회의장과 국회의원들, 사회여론을 주도하는 대학교수들과 언론인들, 그리고 재벌총수들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주한미국대사관이 한국 핵심지도층을 비밀접촉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이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한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한미국대사관 관리들과 한국 핵심지도층의 밀담을 기록한 각종 기밀문서들에는 친미사상이 머릿속에 들어찬 한국 핵심지도층의 굴욕적인 모습이 담겨있다. 위킬릭스가 공개한, 다른 나라 주재 미국대사관들이 작성한 전문을 읽어보면 주한미국대사관처럼 주재국 핵심지도층을 비밀접촉대상으로 삼은 경우는 없다. 한미관계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치욕적인 지배-피지배 관계인 것이다.

각 전문마다 붙어 있는 문서번호를 살펴보면, 주한미국대사관이 보낸 전문은 2006년 4,412 편, 2007년 3,616 편, 2008년 2,499 편, 2009년 2,027 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4년 동안 12,556 편을 보낸 것인데, 이번에 위킬릭스에 노출된 것은 1,868 편밖에 되지 않는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년 동안 보낸 전문 12,556 편 가운데 위킬릭스에 노출된 1,868 편을 제외한 10,688 편은 1급 비밀로 분류되는 문서들인 것으로 보인다. 2006년부터 4년 동안에 주한미국대사관 관리들이 연평균 2,670 편에 이르는 1급 비밀문서를 작성하였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

그들이 1급 비밀문서를 작성한 추세를 살펴보면, 특히 2006년과 2007년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06년에 작성된 4,412편 가운데 431편만 비밀 인터넷통신 소통망에 올랐으니, 나머지 3,981편은 그 소통망을 통해 전송해서는 안 되는 1급 기밀문서들이었을 것이다. 2006년에 그처럼 많은 1급 비밀문서를 보낸 까닭은, 그 해에 북측에서 첨단미사일 발사훈련과 지하핵실험이 실시되었고, 남측에서 한국군 작전통제권 반환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06년보다는 적지만, 2007년에도 다른 해에 비해 훨씬 많은 기밀문서가 작성된 까닭은, 그 해에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고, 남측에서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미국이 한반도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계기들과 사변들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미국이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한국을 지배하는 수단은 한국 핵심지도층과의 비밀접촉만이 아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주한미국대사관이 깔아놓은 비밀연락선이다. 위킬릭스에 노출된 전문들을 읽어보면, “직접 연락선(direct contacts)”, “정기 연락선(regular contacts)”, “고참 연락선(long-time contact)”, “가장 믿을 만하고 정확한 연락선(most reliable and accurate contacts)” 같은 다종다양한 비밀연락선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비밀연락선은 청와대, 정부기관들, 국회에 거미줄처럼 깔려있다. 예컨대, “우리의 한국 정부 연락선(our ROKG contacts)”, “한국 연락선(ROK contacts)”, “우리의 청와대 연락선(our Blue House contacts)”, “우리의 통일부 연락선(our MOU contacts)”, “우리의 외교통상부 연락선(our MOFAT contacts)”, “우리의 국회 연락선(our National Assembly contacts)”, “재정경제부 연락선(Ministry of Finance and Economy contacts)”이라는 표현이 전문들에 나온다. 이 땅에 얼마나 조밀한 비밀연락선이 깔려있는지는 주한미국대사관만 알고 있다.

주한미국대사관이 깔아놓은 비밀연락선이 그처럼 많으니, 첩보공작 전문기관인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가 깔아놓은 비밀연락선은 또 얼마나 많으며, 주한미국군사령부가 한국 군부에 깔아놓은 비밀연락선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 땅의 국민을 배신하고 미국에게 기생한다는 뜻에서 종미주의자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미국의 비밀연락선에 망라된 자들을 그렇게 불러야 마땅하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위킬릭스가 이전에 공개한 기밀문서들에서는 세계 각국에 있는 미국대사관의 주재국 비밀연락선의 실명이 XXXXX로 지워져 있었는데, 이번에 공개한 기밀문서들에서는 실명을 지우지 않았다. 이를테면, 2007년 10월 5일 주한미국대사관 정치참사 조셉 윤이 작성한 기밀문서에는 그가 “빈번한 연락선(frequent contact)”이라고 지칭한, 한국 언론계에 널리 알려진 KBS 기자의 실명이 나오고, 2007년 9월 4일 버쉬바우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작성한 기밀문서에는 그가 “소중한 연락선(valued contact)”이라고 하면서 “엄격히 보호할 것(strictly protect)”이라는 지침까지 달아놓은 청와대 경제정책보좌관의 실명이 나온다.

이 땅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주권국가 국민이라고 믿고 있지만, 위킬릭스가 발가벗겨 놓은 한미관계의 치욕적인 실상 앞에서 그런 믿음은 헛되다. 이를테면, 위킬릭스가 이번에 공개한, 2007년 대선에 관련된 방대한 기밀문서들은 미국이 대선에 깊숙이 개입하여 좌지우지하였음을 말해준다.

내년 12월이 오면 이 땅의 국민들은 2007년 12월에 그러했던 것처럼 소중한 선거권을 행사하여 대통령을 선출할 것이다. 그러나 위킬릭스가 공개한 대선 관련 기밀문서들에 따르면, 국민의 선거권 행사도 미국의 지배질서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미국의 지배질서에 묶여있는 데도,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주권국가 국민들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권국가 국민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