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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南北) 현대사 속의 남북축구

1991년 6월 포르투갈 세계 청소년대회에 참가한 남북 단일팀 '코리아' 선수들이 아일랜드와 경기후 관중들에 인사하고 있다.(제공=한국 축구 100년사)

남북 축구 대결은 언제나 그 시대상을 반영해 왔다. 한때 북한축구는 우리에게 공포를 안겼고, 반드시 이겨야 하는 '타도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후 변해가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남북 화합의 장'을 여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국 현대사와 남북 축구의 발전상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전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인 한국과 북한의 맞대결은 언제나 세계적인 관심을 받아왔다.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예선에서 남북대결이 성사된 직후 국제축구연맹(FIFA) 홈페이지는 '코리안 더비(Korean derby)'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다.
1978년 첫 번째 A매치 이후 11번째 맞대결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과 북한.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남북 축구'가 어떤 모양으로 변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정치 상황: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식을 통해 휴전 상태로 돌입했다. 하지만 총성 없는 전쟁은 계속됐다. 1959년 6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무력 북진통일을 재강조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이 1960년 8월 14일 8·15 경축대회 연설에서 남북연방제를 선언했지만 한국 정부는 넉달 뒤 '유엔감시 하의 남북통일'이 공식적인 통일방안임을 천명했다. 남북 간 이념 경쟁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6·25전쟁 이후 1978년까지 남북한 간 공식적인 A매치 기록은 없다. 하지만 양팀은 실제 축구경기만 벌이지 않았을 뿐이지 끊임없이 '체제 경쟁'을 벌였다.
한국 축구는 50년대 이후 올림픽, 월드컵 예선, 아시안컵에 활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시아권에서 권위를 자랑하던 메르데카컵, 킹스컵에도 거의 매번 참가했다. 그러나 북한 축구는 국제대회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양측의 대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1963년 정기총회에서 북한을 가입시키는 의제를 논의했는데 한국은 활발한 외교활동으로 북한의 가입을 저지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의 8강 진출에 자극을 받은 한국은 1967년 중앙정보부 주도로 양지팀을 탄생시켰다.(제공=한국 축구 100년사)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과 북한은 나란히 축구 종목 본선에 진출하며 최초의 남북 대결이 열릴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북한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의 갈등 탓에 올림픽 직전 기권하고 말았다.
1965년에는 한국 측이 잉글랜드 월드컵 예선 불참을 결정했다. 당시 국제무대에서 29승1패를 기록하며 축구강국으로 떠오른 북한에 지는 것을 꺼려한 탓이다. 결국 한국은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벌금 5000달러를 부여받았다.
1966년 북한은 잉글랜드 월드컵서 '8강 신화'를 이뤘다. 이는 한국 축구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소위 '한국형 스포츠 국가주의'가 탄생된 것. '반공 애국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 북한의 월드컵 8강신화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주도로 군팀인 양지팀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인 장덕진 씨가 대한축구협회장이 된 것도 이런 이유가 어느 정도 작용되지 않았는가 하는 축구계의 얘기가 있다. 장덕진 회장은 금융단 축구를 창설해 한국 축구의 새로운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엄청난 지원으로 거의 국가대표팀급 위용을 자랑하던 양지팀은 1970년 3월 정치적인 이유로 해체됐다. 이후 한국 축구대표팀은 상비군 1군 '청룡', 2군 '백호' 체제로 운영된다.

#정치 상황: 1968년 1월 21일 '1·21 사태'가 일어났다.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기습을 시도했다.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며 잠시 해빙 무드를 맞는 듯 했지만 1974년 8월 15일에는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서거하며 긴장감이 조성됐다.

1974년 9월 열린 이란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한국 축구에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대회에서 북한 축구는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육영수여사 서거 사건 이후 북한과의 대결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 대한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에서 한국 축구가 북한 축구에 패하기라도 한다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
결국 이 대회는 한국의 '북한 피하기'로 얼룩지고 말았다. 1차리그 A조에 속했던 한국이 B조의 북한과 2차리그 같은 조에 속하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한국은 9월 6일 쿠웨이트에 예상대로 0-4로 대패를 거두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2차리그 마지막 경기서 승리를 거두면 또다시 3-4위전서 북한을 만날 위기에 처했던 한국은 결국 말레이지아에 2-3으로 패하는 '이변'을 연출하고 만다. 북한과의 맞대결을 피하려는 '져주기'였다는 게 현재까지도 정설처럼 굳어있다.

#정치상황: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이 발생.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 분단 이후 남과 북의 첫 축구 A매치가 열렸다. 4년전 테헤란 대회만큼 양측 선수들이 투쟁적인 감정을 가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물러설 수 없는 한판승부였다. 피말리는 연장승부까지 펼친 끝에 결과는 0-0 무승부. 남북의 주장은 시상대 제일 윗 자리에 서야 했다. 당시 김호곤 주장(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은 북한 김종민 주장에게 시상대에 먼저 올라가라고 양보했다. 시상대에 먼저 자리잡은 김종민은 김호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김호곤은 겨우 비집고 올라가 자리를 잡았지만 뒤에서 북한 골키퍼 김광일이 미는 바람에 시상대에서 떨어졌다. 첨예한 '체제 경쟁'을 하던 남북한의 긴장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공동 우승을 차지한 한국 대표팀 주장 김호곤(왼쪽)과 북한 주장 김종민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기뻐하고 있다.

(제공=한국 축구 100년사)

다시 시상대에 선 김호곤은 김종민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리며 "다른 사람들이 다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데 웃으면서 포즈나 취해 주자"고 제안했다. 조금 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두 선수는 웃음을 보였다. 위험천만했던 남북 축구 대결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정치상황: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 이후 남북 관계에는 '해빙 무드'가 조성됐다. 1990년 9월 남북 고위급회담이 열렸고 이 흐름을 타고 스포츠의 장에도 대결 구도가 아닌 화합의 무대가 열렸다. 1991년 6월 17일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UN)에 가입했고 1992년 2월 남북 기본합의서가 발효됐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남북 정상회담 추진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1년 4월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출전과 1991년 6월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남북단일팀 '코리아' 출전은 국민들에게 '한민족'의 개념을 인식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은 화해 무드에 큰 변수로 작용했다.

70~80년대 남북 대결에 나섰던 선수들은 "경기 며칠 전부터 부담감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1980년 9월 쿠웨이트 아시안컵 준결승서 한국이 2-1승리를 거둔 이후 남북 대결은 좀처첨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이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경기 중 심판 구타 물의를 빚어 수년간 국제대회 출전 금지를 당해 침체기를 걷는 동안 한국 축구는 중흥기를 맞았다.

198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북한전에서 김주성의 슈팅 모습. (제공=한국 축구 100년사)

198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탈리아 월드컵 최종예선 2차전을 통해 양팀은 9년만에 맞대결을 벌였다. 당시만 해도 북한전은 한국 입장에서 감정적으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이날 한국은 황선홍의 헤딩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90년대부터 남북대결은 이전만큼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펼쳐지지 않았다. 1990년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치른 남북통일축구를 계기로 서로 적대시하고 두려워하는 분위기는 크게 누그러졌다. 오히려 선수들끼리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누기도 하는 관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 5월에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단일팀(코리아) 구성을 위한 1,2차 선발전을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가져 6월 본선에서 83년 멕시코대회 4강 이후 가장 좋은 8강에 오르며 해빙 무드가 최고조에 올랐다.

1990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를 마친 뒤 양팀 선수들이 유니폼을 바꿔 입고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제공=한국 축구 100년사)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한국은 94 미국월드컵 최종예선 최종전 상대로 북한을 만났다. 자력으로는 본선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 일단 김호 감독이 이끄는 한국은 북한에 3-0 완승을 거뒀다.
그리고 얼마 안돼 다른 곳에서 벌어진 일본-이라크전에서 이라크의 자파르가 종료 직전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리고 바로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선수들은 부둥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혹시 남북이 짜는 경기를 하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남북전을 지켜봤던 AFC 고위 관계자들도 한국의 월드컵 3회 연속 본선진출을 축하해 주었다. 패자 북한도 일본을 제친 한민족의 본선 진출을 마음 속으로 축하해주었을 것이다. 이것이 이미 전설이 돼 버린 '도하의 기적'이었다.
하지만 1994년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한이 또다시 국제 스포츠계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지는 못했다.

#정치상황: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1998년 6월 22일 강릉에 북한 잠수정이 침투하며 남북 관계가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했다. 1998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이 처음 시작됐지만 1999년 6월 15일 1차 서해 교전이 발생했다.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됐다. 하지만 2002년 1월 29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2002년 6월 29일 2차 서해교전이 발발하는 등 남북 관계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2000년대 들어 남북 관계에서 스포츠가 차지하는 비중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스포츠, 특히 남북 축구는 '체제 대결'이나 '자존심 대결'의 의미를 뛰어넘어 정치 논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2002년 서해교전과 북핵문제로 냉각된 남북관계는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에 북한이 참가하면서 풀렸다.
2005년 2월10일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으로 다시 경색된 남북관계는 동아시아선수권대회를 통해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2005년 8월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이어 인공기의 게양과 북한 국가 연주가 허용돼 남북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1991년 세계 청소년 대회에 참가할 남북 단일팀 선수 선발을 위한 평가전이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열렸다. 잠실 주경기장 경기후 남북 선수단이 한데 모여 기념 촬영.(제공=한국 축구 100년사)

#정치상황:  2006년 10월 북한이 핵 실험을 강행했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서 역사적인 2번째 남북정상회담을 벌였다.

2008년 2월 중국 충칭에서 열린 동아시아선수권대회를 통해 3년여 만에 축구대결을 벌인 남과 북. 1-1 무승부를 거뒀지만 이전만큼 긴장감이 조성된 접전은 아니었다. 양국 경제력의 차이만큼이나 벌어진 축구 실력의 차이도 확연했지만 더이상 한국민들도 축구로 '체제의 우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
1978년 12월 첫 A매치를 치른 이후 19년여 동안 이어진 남북 축구대결. 남북 현대 정치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북한이 한국의 태극기와 애국가를 허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26일 열리는 월드컵 아시아예선 홈경기를 FIFA의 중재까지 거쳐 상하이 중립경기로 치르기로 수용한 점은 아직 긴장감이 남아 있는 양국 관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많이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과 북이 가깝고도 멀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이지석기자 monami153@sports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