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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도 '684부대'있었다

북한 66년 월드컵 8강 진출에 청와대 쇼크
김형욱 中情부장 "북괴꺾어라" 양지팀 창설
벌써 8백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본 영화 '실미도'. 북한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기도(1968.1.21)를 보복하려고 만들어진 비공식 특수부대의 비극이 36년이 지나 대박흥행의 소재가 됐다.

'684부대'. 그 684부대가 한국축구에도 있었다.
진짜 684부대처럼 적을 죽이는 임무가 아닌, 북한 축구팀을 꺾기 위한 최정예팀 '양지(陽地)축구단'이다.
역시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만들었다.

"북괴를 꺾어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이 명령 한마디에 당대 최고 선수들을 징발해 만든 팀.
양지축구단은 684부대보다 1년 앞선 1967년 2월 창단됐다.

골키퍼 이세연, 수비수 김호.김정남.조정수.서윤찬, 공격수 허윤정.정병탁.김삼락.이회택.임국찬…. 쟁쟁한 스타들이 모두 모였다. 그중 일부는 지금도 축구계에서 활약한다.

 



*** 67년 정예멤버 징발 중정서 지옥훈련

그 전 해인 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은 8강에 올랐다.
'동양의 진주'라고 불린 박두익을 선두로 한 벌떼축구로 이탈리아까지 꺾었다.
세계가 놀랐고, 한국은 더 놀랐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진두지휘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받은 충격은 무척 컸을 것이다.
북한을 국제 경기에서 만나 지기라도 한다면….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그래서 김형욱 정보부장이 나섰다.
최강의 팀을 직접 만들기 위해서였다.
육.해.공군과 해병대, 그리고 실업팀 선수까지 징발했다고 당시 관계자는 말한다.

초대 감독은 '황금 다리'라는 별명의 최정민(작고)씨였다.
'양지'라는 이름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 부훈(部訓)에서 땄다.

김형욱은 "이기라면 이기고, 죽으라면 죽어라"고 선수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대신 돈이든 해외 원정이든 전력에 보탬이 된다면 아낌없이 지원했다.
양지팀 소속 기간을 군복무로 인정해줬고, 매달 2만5천원을 생활보조비 명목으로 줬다.
쌀 한 가마니에 4천원 하던 시절이었다.




*** 매일 갈비 식사 … "日도 묵사발 내"

서울 이문동 중앙정보부 청사 내 장교숙소가 합숙소였다.
훈련도 전국 유일의 천연잔디 구장이던 정보부 운동장에서 했다.
주장이었던 정병탁(유소년 축구교실 운영)씨는
"매일 갈비를 먹을 정도로 먹는 것도 최상급이었다"고 회상한다.

물론 훈련은 지옥 같았다.
체력 강화를 위해 오전 6시 일어나 한시간 이상 달리기를 했다.
권투선수들이 하듯 3분 간 줄넘기를 하고 1분씩 쉬는 훈련도 매일 열번 이상 반복했다.
사생활도 통제했다.
휴가 때는 딴 짓(?) 하지 않도록 요원을 시켜 감시했다.

당시 국가대표팀도 양지 선수들이 주축이었다.
67년 7월 구성된 대표팀 23명 중 11명이 양지 소속이었고, 이들이 대부분 주전이었다.

69년에는 한국축구 사상 처음으로 유럽 전지훈련을 갔다.
서독.프랑스.스위스.그리스 등을 도는 1백5일의 대장정이었다.
양지팀은 현지 연습경기에서 26전18승2무6패라는 좋은 성적을 냈다.
그러나 양지팀이 존속하는 동안 남북 대결은 한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숙적 일본이 있었다.
김형욱은 양지 선수들을 만날 때마다 "일본×들은 묵사발 내버려"라며 흥분했다고 한다.


*** 金부장 실각 뒤 흐지부지 팀 사라져

69년 10월 12일 멕시코월드컵 아시아예선 한.일전이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경기 전날 김형욱은 양지 숙소를 찾았다.
"내가 뭘 해주면 일본을 이길 수 있겠나?"

막내였던 이회택(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당돌하게 말했다.
"격려금을 좀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형욱은 껄껄 웃으며 즉석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다음날 김형욱은 전반이 끝난 뒤 라커룸에서 선수들을 독려했고, 한국은 일본을 2-0으로 꺾었다.
그러나 이날 정오 라디오에서는 "김형욱 중정부장이 사임했다"는 뉴스가 이미 흘러나왔었다.
사표를 낸 상태에서 경기장을 찾은 거였다.
김형욱의 낙마와 이후 남북 해빙 무드로 양지축구단에 대한 관심도 크게 줄었다.
마침내 70년 3월 17일 창단 3년 만에 소리소문 없이 해체됐다.
선수들은 새 팀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양지축구단은 냉전시대 남북 간 스포츠 경쟁을 위한 산물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국축구가 한 단계 도약하는 기폭제로 작용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출처:중앙일보(
http://news.joins.com/ )정영재 기자2004.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