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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 재소자 사건과 관련, 20일 동안 3차례에 걸쳐 4900여 명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과 경찰의 불법행위에 의해 집단 희생됐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또 1951년 1.4후퇴 시기에도 대전 산내에서 최소 수백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대전충청지역 형무소(대전형무소, 공주형무소, 청주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을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보고서를 토대로 재조명합니다. <편집자말>
  
매년 대전형무소 옛터(대전 중구 중촌동)에서 열리고 있는 '자유수호 애국지사 합동위령제'.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희생된 우익인사 1557명을 추모하는 행사다.
ⓒ 심규상
대전형무소

대전 산내 골령골(동구 낭월동)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살해는 인민군에 의한 우익인사 처형으로 이어졌다. 보복 살해를 낳은 것이다.

 

1950년 7월 19일 아침. 인민군은 제3사단, 제4사단, 제105탱크사단을 앞세워 대전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이후 7월 21일 오전 6시 무렵 대전을 완전히 점령했다. 이날 일부 인민군은 곧장 산내 골령골 집단희생지로 향했다.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의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마지막 집단학살이 있은 지 나흘이 지난 뒤였다.

 

현장을 목격한 인민군은 산내 골령골에서 민간인 및 좌익을 살해한 가해자를 체포하는 일에 집중했다.

 

인민군은 충남도청을 군 본부로, 도립병원을 미군 포로수용소로 사용했다. 경찰서는 내무서로, 파출소는 분주소로 바뀌었다. 점령지역에는 인민위원회가 조직됐고, 군청에는 군 인민위원회가, 면 단위에는 면 인민위원회가 들어섰다.

 

  
목동천주교회(대전시 목동)에 서 있는 안내판. '6. 25 전쟁이 나자 이곳 성전은 공산당 충남도당 정치보위부 본부 및 수용소로 쓰였고, 전남지역 사제 3명과 충남지역 사제 8명이 총살돼 순교했고, 그외 목사, 외국인 신자와 민간인 수백명이 학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목동 언덕에서순교한 성직자
ⓒ 심규상
성직자

경찰·군인·청년단체 등 우익인사, 대전형무소-정치보위부에 수감

 

군에는 정치보위부가 설치됐다. 산내 골령골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가해자를 체포하고 분류하는 일은 정치보위부가 맡았다. 충남지역 분주소와 내무서 또는 정치보위부에서 끌려온 우익인사들은 대전내무서(대전경찰서)와 대전 정치보위부(프란치스코 수도원, 대전 중구 목동)에서 2~3차례 취조를 받은 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이 중 일부는 서울로 압송돼 북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인민군은 대전형무소를 '인민교화소'라고 불렸다.

 

대전형무소 및 정치보위부에 수감된 사람들의 체포 이유는 양민을 탄압·학살한 혐의였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대전 정치보위부 건물(대전 중구 목동)로 쓰인 수녀원. 당시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이었다.
ⓒ 심규상
정치보위부

수감자 대부분도 경찰, 군인, 공무원,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인사들이었다. 이들이 희생된 직후 조사된 희생자(702명 기준) 직업별 분류에 따르면 농업 152명(부농이거나 지주), 경찰 118명, 대한청년단 101명, 공무원 83명, 군민회 78명, 군인 25명 등 순이다. (반공애국지사유족회, <우리의 자유를 지킨 사람들> 270쪽, 2003)  

 

북한은 남한 점령 후 "국군 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고 규정하고 군인, 판검사, 경찰간부, 우익단체나 정당의 간부 등은 적으로 취급해 처형했다. 반면 말단 관리나 중도적인 인물들은 면밀하게 검사하여 인민으로 편입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였다. (김동춘, <전쟁과 사회> 156쪽, 돌베개, 2000)

 

하지만 실제 취조과정은 강압적이었다. 생존자들은 "(취조과정에서) 체포된 모든 사람은 '양민을 투옥하고 학살했다'는 내용이 들어간 자술서를 쓰도록 강요받았다"고 밝혔다. 한 수감자가 그런 일이 없다고 자술서를 쓰자 심하게 구타당했다. 이를 본 다른 수감자들은 모두 "양민을 학살했다는 허위자술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 끝까지 자술서를 쓰지 않은 수감자들은 석방됐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인용)

 

"'양민 투옥·학살했다' 자술서 강요"

 

강압에 의해 양민학살을 인정한 수감자들의 경우 항소를 통해 인민재판을 받을 요량이었지만 끝내 그 기회는 오지 않았다.

 

1950년 9월. 조선노동당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인민군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과 함께 각 지방당에 '유엔군 상륙 시 지주(支柱)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인민군은 1950년 9월 25일 새벽부터 27일까지 3일간 수감자들을 집단 처형했다. 정치보위부 간부가 심사 및 처형 명령을 내렸고, 인민군 및 정치보위부원, 내무서원이 총살을 집행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약 500명은 형무소 내 밭고랑과 우물 등에서 희생됐다. 특히 깊이 11.6미터, 둘레 6.3미터의 두 개의 우물에서만 100여 구의 시신이 인양됐다.

 

  
옛 대전형무소 우물.
ⓒ 심규상
대전형무소

정치보위부 건물인 프란치스코 수도원과 목동성당에서도 약 110명 정도가 희생됐다. 이 중 90여 명은 수도원 우물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근에 있는 용두산(현재 을지대학 및 목양마을 아파트 부근)에서는 300m 떨어진 대전형무소에서 끌려온 600여 명이 희생됐다. 대전경찰서 마당의 호에서는 미군 시신과 한국인 시신이 발견됐다. 희생자가 많지 않지만 도마리 뒷산(현 대전시 도마동 및 복수동), 탄방리 남산(현재 대전시 탄방동), 석봉리 망골(현 대덕구 석봉동), 홍도동 등에서도 인민군에 의해 경찰 등 우익인사들이 희생됐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조사 결과 충남지역 우익인사 1557명이 인민군 후퇴 전에 대전형무소 등에서 희생됐음이 확인됐다"며 "이들이 체포·수감된 이유는 양민을 탄압·구속·살해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고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는 "역사교과서 등에 사건 내용을 기록해 전쟁의 참상과 생명·인권의 소중함을 알릴 수 있는 평화·인권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또 당시 인민군에 의한 수감자 또는 희생자 수를 2000명 또는 6832명 등으로 기술한 <대전 100년사> 등 간행물의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수정' 또는 '삭제'할 것을 권고했다. 특히 <한국교정사>에 수록된 '쇠망치로 머리를 쳐서 죽이고, 구덩이를 파고 집단으로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부분은 '사실무근'이라며 '삭제'하도록 했다. 

 

이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대전형무소를 중심으로 최소 6500여 명이 희생됐다.

 

하지만 대전형무소의 피의 광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으로 인민군이 퇴각하자 군경은 다시 인민군에 협조하거나 동조한 부역자 색출에 나섰고, 대전형무소는 다시 부역혐의자로 가득 찼다. 군경은 중국군의 참여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부역혐의자들을 1.4 후퇴(1951년 1월) 시기에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가 처형했다. '보복'이 또 다른 '보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1950년 7월 국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 및 좌익인사에 대한 집단학살은 같은 해 9월 북한 인민군에 의한 보복 학살로 이어졌다. 사진은 대전형무소 옛터에 세워져 있는 '반공애국자영령추모탑' 및 추모공원.
ⓒ 심규상
대전형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