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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 재소자 사건과 관련, 20일 동안 3차례에 걸쳐 4900여 명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과 경찰의 불법행위에 의해 집단 희생됐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또 1951년 1.4후퇴 시기에도 대전 산내에서 최소 수백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대전충청지역 형무소(대전형무소, 공주형무소, 청주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을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보고서를 토대로 재조명합니다. <편집자말>
  
1950년 7월 초, 당시 미 정보장교가 촬영한 집단처형 현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대전형무소

1950년 7월 1일 새벽 3시.

 

이승만 대통령은 비밀리에 충남도지사공관을 떠났다. 대통령의 남하소식에 정부 요인들도 서둘러 대전역을 통해 대전을 탈출하기에 급급했다.

 

대통령 및 정부 요인들의 남하는 대전형무소 수감 재소자의 집단처형을 불렀다. 이 대통령이 피난을 떠난 때인 1일 새벽, 대전지검 검사장은 대전형무소에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하라'는 전문을 시달했다.

 

같은 날, 대전에 주둔하던 제2사단 헌병대와 제5연대 헌병대가 대전형무소에 파견됐다. 처형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제2사단 헌병대 제4과장 심아무개 중위는 대전형무소 소장 서리(직무대리)에게 "좌익수들, 즉 포고령·국방경비법 위반 등 주로 여순반란사건 (관련자), 보도연맹원, 10년 이상 강력범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비밀리에 대전 떠난 이승만 대통령... 같은 시각 "좌익 극렬분자 처단"

 

당시 대전형무소 소장 서리 등이 법무부장관에게 재가를 받으러 갔으나 법무부장관은 군의 요구에 따르라는 대답뿐이었다.

 

"군이 (재소자들을) 달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다... 후일 문제가 생기거든 사전에 장관(나) 만났다는 소리는 말아 달라." (당시 이우익 법무부장관을 만난 진실화해위 참고인 진술 녹취록)

 

재소자 인도과정에서는 당초 분류 기준마저 지켜지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 신분장 첫 장의 죄명만 보고 분류했고, 이 때문에 10년 형을 받고 8년을 복역한 사람도 트럭에 실려 나갔다.

 

1950년 7월 3일.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하나둘 감방 문 밖으로 끌려 나왔다. 보도연맹원들도 포함돼 있었다.

 

굴비 엮듯 묶어 산내 골령골로... 사격 머뭇거리면 가차 없이 욕설

 

"뒤로 다가가 두 사람을, 한 사람 왼손하고 옆 사람 오른손하고 어긋매끼로 묶었어요. 묶어서 감방부터 현관까지 끌고 왔어요. 헌병이 징발한 트럭에 가득 실었어요. (중략) 헌병들은 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앉으라고 했어요. 못 앉을 것 같죠? 재소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앉아서 아주 납작해져요."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 대원 김아무개씨 증언)

 

  
지난 2007년 산내 골령골에서 발굴된 집단희생자들의 유해
ⓒ 심규상
대전형무소

재소자 호송은 헌병과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 대원들이 담당했다. 재소자들이 실려간 곳은 불과 며칠 전 1차 처형이 진행된 산내 골령골이었다. 경찰은 사전에 산내 주민들과 청년방위대를 동원해 구덩이를 파놓았다.

 

트럭이 멈춰 서자 청년방위대원들이 재소자들을 구덩이 앞까지 끌고 가 무릎을 꿇렸다. 총살 집행은 제2사단 헌병대 심아무개 중위의 지휘로 헌병 1개 분대와 경찰 2개 분대가 담당했다. '사격 개시' 명령이 내려지자 경찰과 헌병 각각 10명이 재소자의 등을 밟고 뒷머리에 총을 쏘았다. 이어 헌병들의 확인 사살이 끝나면 청년방위대원들이 시신을 구덩이에 쌓아놓았다. 심 중위는 헌병과 경찰이 사격을 머뭇거릴 때마다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붓고 공포를 쏘았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으로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미터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갈아 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중략)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것 다 있었어요. 헌병 지휘관이 국민방위군(청년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 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 (2009년 2월, 참고인 김아무개씨 진술 녹취록,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36쪽) 

 

이와 관련,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장 이아무개씨는 "살인 강도로 10년 형을 받았지만 잔형이 1년 남아 직원식당에서 일했던 재소자가 '부장님, 나 안 죽었어요. 나 좀 한 방 쏴 주세요'라며 애원했다"고 밝혔다. 총을 이용해 이보다 더 잔혹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초등학교 동문 봐준 경찰도 2년 형 받고 처형돼  

 

  
2007년 당시 대전 골령골 유해 발굴을 진행한 충남대 박물관 성원식 학예연구사가 발굴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 심규상
대전 산내

2차 처형은 5일까지 계속됐다. 3일 동안 희생된 사람은 약 1800명에서 2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조일반제공동투쟁동맹, 경성콤그룹 등을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을 벌였던 이관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씨도 희생됐다. 충남 예산 출신인 오천식씨는 서산경찰서 경찰로 근무하던 중 박헌영 추종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초등학교 동문을 검거하지 않고 봐주었다는 동료경찰의 밀고로 체포됐다. 그는 2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이었지만 이곳 산내에서 처형됐다. 고순현씨 등 제주 4.3사건 연루자 97명은 각각 7년 형을 언도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이때 화를 당했다.  

 

1950년 9월 23일.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에드워드 중령은 워싱턴의 미 육군 정보부로 사진 18장과 함께 '한국에서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보냈다. 이 보고서는 당시 대전형무소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중략) 이러한 처형 명령은 의심할 여지없이 최고위층에서 내려온 것이다. 대전에서 벌어진 1800여 명의 정치범 집단학살은 3일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