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view/preview/at_prev_pg.aspx?CNTN_CD=A0001415502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 재소자 사건과 관련, 20일 동안 3차례에 걸쳐 4900여 명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 희생됐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또 1951년 1.4후퇴 시기에도 대전 산내에서 최소 수백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대전충청지역 형무소(대전형무소, 공주형무소, 청주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을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보고서를 토대로 재조명합니다. <편집자말>
  
골령골 학살 사건 당시 미군에 의해 촬영된 군인과 경찰의 총살 직전 장면. 이 사진의 배경 장소는 2007년 골령골에서 유해가 발굴된 곳과 인접(50여 미터 거리)해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대전 골령골

"보도연맹원들이 1950년 6월 28일부터 사흘에 걸쳐 산내에서 희생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7월 1일 아침에 형무관 해산명령에 따라 피난갔다." (국방부 전훈국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란 1년지' 중 대전형무소 형무관 이아무개씨 녹취진술록, 1951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한 보도연맹원 총살이 그간 알려진 7월 초가 아닌 6월 28일에 시작됐다는 얘기다. 이에 앞서 당시 정부는 이보다 하루 전인 6월 27일 대전으로 이전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대전으로 피난했다.

 

즉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첫 학살은 당시 이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 등 정부 각료들이 대전에 머물고 있는 가운데 일어났다. 이 대통령이 머물던 충남도지사 공관 및 국무회의가 열리던 충남도청과 대전형무소는 지근거리에 있었고, 대전 산내 골령골과도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당시 피난을 온 정부 각료와 고급관리, 국회의원 등은 대부분 대전시내에 있는 여관인 '성남장'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생활은 전쟁과는 무관해 보였다.

 

"뜰에는 그 사람들이 타고 온 자동차가 80대 이상이나 주차돼 있었고 그중에는 가재도구부터 개까지 끌고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식사용 쌀이 하루 다섯 가마나 필요했고 반찬만도 큰일이었습니다." ('성남장' 주인 김금덕씨 증언,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1권, 1983년)

 

"민간인 1400명, 정부 지시로 경찰에 의해 피살... 시신은 산에 매장" 

 

6월 28일부터 3일 동안 벌어진 1차 살해로 인한 희생자 규모는 어느 정도일까? 미 CIC(육군 방첩대) 파견대의 전투일지에는 1400명으로 적혀 있다.

 

"신뢰할 만한 정보통의 1950년 7월 1일 보고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지시에 의해, 대전과 그 인근에서 공산주의 단체 가입 및 활동으로 체포됐던 민간인 1400명이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대전에서 약 4km 떨어진 산에 매장되었다." (미 제 25사단 CIC 파견대의 전투일지 활동보고서 중에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무더기로 드러났다. 두개골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뚜렷하다.
ⓒ 심규상
대전형무소

미군 전투일지에서 언급된 '공산주의 단체 가입 및 활동으로 체포된 민간인'은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내무부 치안국은 1950년 6월 25일과 29일, 30일에 걸쳐 잇달아 전국 경찰서에 무선정보를 보내 "전국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에서 구금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충남경찰국 사찰과에 근무하던 서아무개씨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과정에서 "6월 25일부터 30일 사이에 치안국에서 무선전문으로 '보도연맹원들을 전부 검거해 처단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고 밝혔다. 

 

실제 희생자에는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외에도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일부가 포함됐다. 

 

이를 뒷받침하는 희생자 증언도 많다. 홍명수씨는 1948년 여순사건 관련자로 경찰에 연행돼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홍씨의 부모는 한국전쟁 발발 열흘 전에 아들을 면회했다. 하지만 홍씨는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9일 총살당했다. 당시 홍씨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대전형무소 형무관으로부터 이같은 사실을 전해 들었다.

 

해방 후 전북 남원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청년단장으로 활동했던 이현열씨는 포고령 위반 등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고, 1950년 6월 30일 희생됐다. 희생된 날짜는 같은 고향 출신의 대전형무소 형무관이 유가족에게 전해 주었다. 이순오씨는 전쟁 발발 직후 단지 좌익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체포·연행돼 대전형무소를 거쳐 6월 30일 산내에서 희생됐다. 그의 제적등본에는 6월 30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나무 기둥에 묶어 총살... 헌병 지휘자가 확인 사살"

 

  
산내 골령골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한 유가족들이 흐느끼고 있다.
ⓒ 심규상
대전형무소

총살은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이루어졌다.

 

"헌병대는 이들의 눈을 가리고 뒤에서 나무기둥에 손을 묶었다. 헌병 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헌병대가 총살을 하고, 헌병 지휘자가 확인 사살을 했다. 뒤이어 소방대원이 손을 풀고 시신을 미리 준비한 장작더미에 던졌다. 시신이 50∼60구씩 모이면 화장을 했다. 그리고 가져온 나무기둥을 다 소진하자 미루나무에 묶어서 총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결정서, B33쪽)

 

하지만 이는 뒤이어 7월 초에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자행된 2차와 3차 살해에 비하면 매우 인간적인(?) 처형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