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ohmynews.com/NWS_Web/ArticlePage/Local/index_R0500.htm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 재소자 사건과 관련, 20일 동안 3차례에 걸쳐 4900여 명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과 경찰의 불법행위에 의해 집단 희생됐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또 1951년 1.4후퇴 시기에도 대전 산내에서 최소 수백 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대전충청지역 형무소(대전형무소, 공주형무소, 청주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을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보고서를 토대로 재조명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2007년 산내 골령골에서 발굴된 집단희생자들의 유해
ⓒ 심규상
대전형무소

좌익이라는 이유로, 우익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민간인들에게 찾아온 또 다른 공포는 북한군에 대한 '부역 혐의'였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군경은 부역자 색출에 나섰다. 대전형무소는 같은 해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긴급명령 1호, 1950년 6월 28일 발효, 이하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수감된 사람들로 꽉 찼다.

 

대전과 충남 일원에서 9월 28일부터 11월 13일까지 충남경찰국에서 검거한 부역자 수는 1만 1992명에 이르렀다(1950년 11월 15일 내무부가 밝힌 내용). 검거된 부역자는 군법회의를 거쳐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가장 빠르게, 졸속으로, 증거 없이", '사법 살인'의 대명사 '특별조치령'

 

'특별조치령'에 의한 처벌은 매우 엄중했다. 중대범죄와 일반범죄에 대해 사형, 무기징역, 유기징역 10년으로 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특별조치령은 한국 현대사에서 만들어진 법령 중 가장 엄중한 형벌을 규정한 법령으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북한군에 대한 정보 제공, 안내, 자진 방조 등 애매한 규정으로 자의적 법 해석이 난무했다. '자발적 협력자'가 아닌 '위협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협조한 사람들'도 엄중 처벌됐다. 게다가 기소 후 20일 이내에 공판을 열고, 40일 이내에 판결을 하도록 규정했다.

 

"판결에 있어서는 증거설명을 생략할 수 있다는 조항(제11조)과 단심으로 하고 지방법원 또는 동 지원의 단독판사가 행한다는 조항(제 9조)을 통해 처벌을 가장 빠르게, 졸속으로, 증거 없이 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증거재판주의와 심급제의 원칙을 철저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 형의 집행은 '사법 살인', '법률적 학살'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한인섭, 서울대학교 법학 41권 2호, 2000년, 139~140쪽)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무더기로 드러났다. 두개골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뚜렷하다.
ⓒ 심규상
대전형무소

9.28 수복 당시 대전형무소는 미군의 폭격으로 건물의 75%가 파괴됐다. 하지만 이곳에는 마구잡이로 끌려온 약 1000명 이상이 수감됐다.

 

"수감된 사람이 1000명이 넘었다. 특별조치령으로 뭐한 사람은 전부 사형선고를 받았다." (진실화해위원회 참고인 이 아무개씨 진술 녹취록, 이씨는 당시 군법회의에 참관한 대전형무소 형무관)

 

하지만 이들을 맞은 것은 참혹한 죽음이었다. 우선 부역 혐의자들은 충남 각 지서나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동안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한 상태에서 수감됐다.

 

"재소자들 면담 결과 자백을 받기 위한 고문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고문은 정치범들에게 예외 없는 법칙이었다. 1951년 5월 24일 강경경찰서 유치장의 미결수는 하루 30번의 구타를 당했고, 조치원경찰서 미결수는 물고문을 당했다." (1951년 6월 13일 유엔 민사처 보고서, 유엔 민사처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 구호와 원조를 담당하던 기구)  

 

박치선씨는 부역 혐의로 연행돼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는데 조사과정에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1951년 1월 4일 사망했다.     

 

대전형무소에서 20일 동안 439명 사망

 

  
2007년 당시 대전 골령골 유해 발굴을 진행한 충남대 박물관 성원식 학예연구사가 발굴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 심규상
대전 산내

대전형무소에서는 열악한 수용시설에 식량과 의약품마저 부족하자 곳곳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는 재소자가 속출했다. 그런데도 1950년 12월 말 서울에서 2020명의 재소자들이 대전형무소로 이감했다.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다음은 유엔 민사처 보고서 내용이다.  

 

"하루에 약 70명이 재판을 받았다.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20일까지 439명이 죽었다. 대전형무소장은 의약품, 음식 그리고 침구류의 심각한 부족을 극복할 수 없었다." (1951년 1월 31일 유엔 민사처 보고서)

 

이보다 참혹한 현실은 1.4 후퇴 시기인 1951년 1월 다가왔다. 그해 1월 13일,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은 부산형무소로 대거 이감됐다. 영하 14도의 한겨울 이감에, 질병과 굶주림으로 이미 허약해진 재소자들은 대전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했다. 또 화차에 실리는 과정에서, 부산형무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방치돼 사망했다. 부산형무소에 도착하고도 마당에서 대기하다 얼어 죽은 재소자도 많았다.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도 열악한 수용시설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찰서에서 구타를 심하게 당한 뒤에, 형무소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한 재소자들 수십 명이 대전역으로 이동하다 사망했다." (진실화해위원회, 대전형무소 형무관 김아무개씨의 진술조서)   

 

"이들은 초량역에서 내렸는데, 언젠가 한 번은 기차가 왔을 때 기차 안에서 죽은 사람이 350명 정도 되었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 당시 부산형무소 의무과에 근무했던 박 아무개씨 진술조서)  

 

1951년 1월 17일. 헌병대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은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사형수 166명을 대전 산내 골령골로 끌고 가 처형했다. 이날 희생된 사람들은 삼남 각 지구에서 검거돼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한국헌병사, 1952, 638쪽)

 

또다시 산내 골령골로 끌려간 사람들

 

  
부역 혐의(좌익 활동을 한 삼촌을 숨겨준 혐의)로 끌려가 희생된 부친을 생각하며 울먹이는 전숙자씨(충남 부여군 부여읍)
ⓒ 심규상
전숙자

재소자들의 병사, 아사는 같은 해 6월에도 지속됐다. 

 

"현재 대전형무소 1178명의 재소자 중 704명이 치료가 필요하거나 치료 중이고, 이 중 99명은 심각한 상황이다. 일주일 동안 10명이 죽었는데, 이는 연간 재소자 사망률 44%를 의미한다." (1951년 6월 6일 유엔 민사처 보고서)

 

부역 혐의자들이 처한 조건은 공주형무소, 청주형무소 등 다른 형무소에서도 매한가지였다.

 

"재소자 800명을 수용할 예정인데 (미군 폭격으로) 이들을 수용할 감방은 2개밖에 없다. 대부분의 재소자가 쇠약해져 있는 데다가, 현재 작은 의약품 1상자만이 형무소장실에 남아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공주형무소 재소자 희생 사건 진실규명결정서, 당시 공주형무소 부소장 증언 기록)

 

진실화해위, 관련자 대부분 진실규명 '불능' 처리... '특별조치령'도 법?

 

1.4 후퇴 시기 공주형무소와 청주형무소 수감 재소자들은 대전형무소로, 다시 부산형무소로 이감됐다. 앞서 살펴본 바처럼 이 과정에서도 많은 이가 사망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는 부역 혐의로 희생된 유가족이 신청한 진실규명 건과 관련해 처형된 재소자의 경우 재판절차를 거쳤고, 나머지 사망자의 경우 정확한 증거자료가 없어 사망 원인을 특정할 수 없다며 대부분 '불능' 처리했다.

 

이에 대해 전숙자(63, 충남 부여군 부여읍)씨는 "전쟁 당시 아버지가 좌익 활동을 한 삼촌을 숨겨줬다는 죄로 끌려가 대전형무소를 거쳐 1951년 초 산내에서 처형됐다"며 "진실화해위원회가 단지 형식적인 군사재판 절차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국가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