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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봉 지음❙발행일 2011년 12월 5일❙
❙ 미안해요! 베트남―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현장을 가다❙ 352면❙값17,000원❙
■이규봉(010-3003-6869) ■담당: 신상미(02-720-8921)
푸른역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82 우) 110-040
전화 720-8963 팩스 720-9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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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 · 3, 베트남 전쟁, 광주민중항쟁까지
우리의 민간인 학살 기록을 이 한 권에

한국은 베트남 전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국군을 파견한다. 자유
베트남을 돕겠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우리 군은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일어난 제주4·3 등의 사건을 통해 ‘민간인 학살’을 학습한 결과이며,
베트남에서의 학살은 다시 광주에서의 학살로 이어진다. 두 나라 민간인 학살의 기억을 떠올리며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성찰한 ≪미안해요! 베트남≫(이규봉, 푸른역사)이 출간되었다. 단순한 고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공존의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한 작업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 —베트남 민간인 학살 —광주 민간인 학살’은 결코 독립된 사건이 아니다. 앞선
사건을 부정하고 왜곡했기에 연결되어 일어난 사건으로, 하나같이 공산주의자는 무조건 죽여도 좋다는 무의식 속에
무고한 시민을 빨갱이 또는 베트콩으로 몰아 죽이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만일 우리 국군(특히 육군)의 정통성이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이나, 그 뿌리가 된 신흥무관학교에 있었다면 생각이 좀 다르다는 이유로 동족을 이렇게
잔인하게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 사건들의 진실에 관해 정치적 목적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휴머니즘
의 입장에서 알리지 않는다면, 정치적 목적을 지닌 또 다른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진실을 발굴하고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한다.

베트남 참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없었기에 오늘날 우리 정부는 상대국 대다수의 민중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미국의 요청으로 또 다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키스탄에 우리 군대를 파병했다. 심지어 원전수주를
핑계로 아랍에미리트에도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베트남 참전과 같은 불행했던 과거를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기에
똑같은 일 혹은 실수가 반복되는 것이다.—<들어가는 글> 중에서



하노이에서 호치민까지―아픔의 기억을 찾아 떠난 베트남 자전거 기행

저자 이규봉(배재대 전산수학과 교수)은 3년의 준비 기간 끝에 2010년 1월 20일, 마침내 하노이에서
호치민을 종단하는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우리 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알리고
그 미안함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베트남 종단은 2월 8일까지 16일간 이어져 매일 평균 112킬로미터씩
총 1798킬로미터를 달렸다.

저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활동하던 중 일제강점기 군 위안부 문제를 불러일으킨 주체가 한국이라기보
다는 일본 시민단체였고, 그들의 노력이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끌어내어 공론화하기까지 우리 자신보다 오히려 가해자 측인 일본 시민단체의 역할이 더
컸음을 알고는 놀랍고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 일을 계기로 저자는 베트남을 떠올렸다고 한다.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던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우리나라
와 같은 분단국이 되었다. 다시 식민 지배를 꾀하는 프랑스에 대항하여 ‘항불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은
통일된 독립 국가를 이루려 했으나 미국이 개입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을 우리는 보통 ‘베트남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항미전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비슷한 고통을 안고
있는 베트남에 동병상련을 느끼기는커녕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군대를 파병한 것이다. 물론 실질적인
목적은 우리나라의 경제사정과 관련되어 당시 군부 독재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
로 우리 군은 베트남 대다수 민중의 염원이었던 통일을 이루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트남에 대해 일본이 우리에게 한 것처럼 가해자
아닌가?

일본 시민단체에 마음의 빚을 졌다고 생각해 우리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이 엄청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도 없고 항상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는 교육만 받은 우리 시민들에게 우리가 저지른 잔혹성을
알릴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왜냐하면 베트남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결코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
아니고 우리의 아픈 역사의 연속선 위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의 비극은 반복된다
―제주4·3, 베트남 전쟁,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일련의 사건

가장 끔찍한 것은 12월 12일 잠복한 정부군이 시신을 수습하러 온 사람을 붙잡아 산 채로 화장시킨 ‘잠복 학살사건’이
다. 서귀포 정방폭포 위에 있는 소남머리는 4·3사건의 최대 학살터다. 1948년 11월 24일 이후 여섯 차례 이상 대학살이
자행되고 살인 경험이 없는 사병들의 실습용으로 양민들을 이용했다고 한다. 1949년 1월 22일 무등이왓 사람들
한 살부터 70대 노인까지 86명이 학살됐다.—<다시 읽는 베트남 역사 4> “제주 민간인 학살” 중에서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와 동네 사람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베트남 말이란 겨우
‘디, 디’라는 말이 전부였다. ‘디’라는 말은 가라는 뜻이다. 그들은 통역관을 데리고 있지 않았다. 군인들은 나이든
남자들과 소년들을 군중들 가운데서 끌어내 한쪽으로 줄을 세운 후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줄 제일 끝에 있던 열세 살짜리 남자아이를 사람들 앞에 세워놓고 한국말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물론 그 아이나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들이 하는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군인들은 아이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총을 쐈다. 그리고 구덩이에 던져버렸다. —<다시 읽는 베트남 역사 3> “꽝응아이 성의
학살 현장 목격담” 중에서

시위 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때려 쓰러뜨리고는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 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얼굴을 위로 돌리게 해 놓고는 안면을 군홧발로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
곤죽을 만들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으며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가 축 늘어지면 걸레 던지듯 트럭 위로 던져 올렸다.
—<다시 읽는 베트남 역사 4> “광주 민간인 학살” 중에서

저자는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 군이 저지른 학살이 결코 베트남전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병사들은 대부분 해방 전후에 출생했다. 그들은 자라면서 남북
분단 상황의 정치적인 논리에 의해 자신들이 겪은 불행이 모두 ‘빨갱이’ 때문에 생긴 일이며, 빨갱이는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사상 교육을 받았다. 파병 후 전투 현장에 투입된 병사들은 처음에는 베트콩 용의자
를 향해 쉽사리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지만, 점차 민간인 학살을 자행할 만큼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토록 정상적이던 그가 도무지 인간으로 보이지 않던 고참들과 꼭같은 야수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병원에서 돌아와 수색 정찰을 나갔을 때 바로 앞에 가던 동료가 베트콩이 설치한 부비트랩이
폭발하는 바람에 몸이 산산조각 나는 사건을 겪으면서, 함께 훈련을 받은 동기생들이 어디서 날아 오는지 알 수
없는 베트콩의 총알에 맞아 하나씩 쓰러지면서 그는 악마처럼 보이던 고참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야수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다.―<다시 읽는 베트남 역사 3> 중에서

우리나라 국내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크게 나누어 한국전쟁이 전면전에 들어가기 전에 발생한 사건과
전면전 중에 발생한 사건, 그리고 한국전쟁 후에 발생한 사건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전쟁 전에 발생한
학살로 대표적인 것은 대구 10월항쟁과 제주4·3항쟁, 여수·순천 사건 등이다. 이 밖에도 1949년 12월 24일
경북 문경에서 국군이 다수의 노인과 어린이가 포함된 마을 주민 86명을 학살하고 무장공비의 소행으로
은폐한 ‘문경 민간인 학살’, 1950년 4월∼5월 거제도에서 주민 200여 명을 총살 또는 수장시킨 ‘거제도
민간인 학살’ 등 전국에 걸쳐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이 감추어지고 왜곡되면서 베트남에서 또 다시 같은 방법으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계속되는 군부 독재의 영향으로 베트남에서 저질러진 학살은 알려지지 않고 오히려 베트콩을 잡은 무용담으
로 전개되면서 똑같은 사건이 다시 우리나라 광주에서 일어나 무고한 시민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하는
일로 되돌아왔다.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물론 광주민중항쟁에 투입된 많은 부사관과 장교들
역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경험을 쌓았던 군인들이다.



역사의 진실은 우리를 성찰하는 거울
―우리는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

이 책은 저자의 베트남 기행을 비롯해 베트남의 역사와 베트남 전쟁, 우리 군이 참전한 전투, 민간인
학살 관련 기록 및 증언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에서는 왜 하노이에서 호찌민까지 자전거로 종단했는지
그 배경을 설명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 베트남의 지리와 역사를 약술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하노이에서
후에까지의 기행문과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사실을 기술하고, 제3장에서는 후에에서 냐 짱까지의 기행문과
베트남 전쟁 중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제4장에서는 냐 짱에서 호찌민까지 기행문과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
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다루고 있다. 제5장에서는 베트남과 우리나라 민간인 학살의 공통점을 살피고,
민간인 학살을 밝힌 시민단체의 노력과 베트남을 지원하는 정부 차원의 노력을 대별하고 있다. 또 베트남과
의 관계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의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공식 입장은 “과거를 닫고 미래를 보자”로 압축할 수
있다. 베트남 정부는 전쟁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민간인 학살에 관한 어떠한 공식 조사나 사과,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있으며, 시민단체의 활동 또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혹 과거사가 개혁 개방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우리 정부 또한 많은 증거와 증언이 있음에도 공식적으로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의 그러한 입장이 우리가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는 이유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제는 베트남 현지에 역사관을 건립해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
한국에 건립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그곳을 찾아오는 한국 학생뿐만 아니라 일본 학생들에게도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처럼 베트남을 방문하는 한국 학생들에게도 그런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역사 교과서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바로 알려야 한다. 끊임없이 일본의 역사 왜곡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왜곡해서야 되겠는가? 한국군에 의해 윤간당하고 살해당한 베트남
여성의 숫자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어 위안부 활동을 한 할머니들의 숫자보다 적을까? 과연 우리는
일본에게 사과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할 대목이다.

진정한 역사 화해는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 사이에 인식의 일치가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미국에서는 베트
남전의 진실을 밝히려는 시민단체와 참전 군인들이 유대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어 활동하며 인권단체와
참전군인 그리고 베트남이 함께 베트남의 슬픔을 먼저 헤아리고 있다. 우리 참전군인들도 그릇된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베트남전의 진실을 밝히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의 구성
들어가는 글 5

1. 하노이에서 호찌민까지 1,798킬로미터의 반성문
미안해요! 베트남
5시간 동안 기내에 갇히다
때론 강하고 약할 때도 있었으나
다시 읽는 베트남 역사 1―건국 초창기부터 1945년까지 간추린 베트남 역사

2. 1번 국도에서 만난 사람들―하노이에서 후에까지
신나게 달렸는데 허전한 등, 아! 내 배낭
응에안 성에서 호 찌 민을 만나다
맥주 여덟 병 값의 자전거 보관료
다시 읽는 베트남 역사 2―베트남 전쟁

3. 학살의 현장을 가다―후에에서 냐 짱까지
복원되고 있는 후에 황궁
700킬로미터 만에 처음으로 맞이한 하이 번 고개
‘남조선 용병’이란 표현에 암울해진 기분
손미 학살과 노근리 학살
새 출발 ‘한베평화공원’
다시 읽는 베트남 역사 3―베트남 민간인 학살

4. 까나에 울려 퍼지는 향피리 소리―냐 짱에서 호찌민까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향피리 소리에 몰려든 여인들
1,798킬로미터 달려 호찌민 통일궁에 도착
다시 읽는 베트남 역사 4―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전면점 발발까지

5.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베트남 파병의 배경 및 그 여파
민간인 학살들의 연관성과 베트남 지원
과거를 딛고 미래를 보자

부록―제주4․3사건 유적지 자전거 기행
관광지 곳곳에 서린 민간인 학살 흔적
훔친 땅을 투기꾼에게 넘기다
4 ․ 3 → 베트남 → 광주, 학살은 반복됐다



❱❱❱지은이
이규봉
서강대학교 수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응용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소 자전거
타기를 즐겨 기행문을 남긴 자전거 여행만 현재 8,000킬로미터에 이른다. 수학을 실생활과 사회문제에 응용하는
것 외에 한국 근현대사와 환경 문제 그리고 국제 정치와 우리나라 전통 음악에 관심이 많다. 현재 배재대학교
전산수학과에 재직 중이며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대전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그리고
대전국악단 피리 주자로 활동하고 있다.